유럽인들의 노예무역 : 그 속에는 설탕이 있었다
● 설탕을 알게 된 유럽인들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는
지금으로부터 만년 전
뉴기니섬에서 재배되기 시작해서
인도로 전파되어
BC 4세기부터 인도인들은
사탕수수를 가지고
결정 형태의 설탕을
만들기 시작했다.
때마침 유럽에서는 알렉산더의 군대가
인도를 침략하게 되었는데
이때 사탕수수를 처음 목격한
유럽인들은 이렇게 감탄했다.
"생긴 것은 영락없는 갈대인데
열매가 달린 것도 아니고,"
"벌의 도움 없이도
꿀을 만들 수 있다니, 정말 놀랍구나!"
하지만 이후 천 년이 넘도록
유럽인들은 사탕수수를 접할 수 없었다.
"고대 유럽인들은 그저 꿀과 무화과 등으로
단맛을 즐겼을 뿐.."
▲ 무화과
그리고 다시 유럽인들에게
설탕이 소개된 것은
아랍인들이 스페인을 침략한
8세기 무렵이었다.
당시 아랍인들은 사탕수수를
지중해 인근에서 재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 사탕수수 재배의 전파 : 중국에서는 2세기 경부터 사탕수수가 재배되었다.
"오! 이게 무슬림들의 설탕이란 말이지!"
"굉장하군.
하얀 가루가 이토록 달콤하다니!"
그렇게 소개된 설탕은
훌륭한 식품이자 비싼 약품으로 취급되어
유럽에서는 엄청난 값으로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값이 폭증하는 데에는
통행세가 한몫했다.
당시 유럽으로 들어온 설탕들은
육로를 거치는 과정에서
여러 곳에서 통행세를
물어야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가뜩이나 비싼 설탕의 값은
더욱더 치솟아
13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설탕과 은이 같은 무게로 거래되었다.
"헐!"
이후 통행세를 피하기 위해
해상을 통해 설탕을 운반하고자 했으니
그렇게 해서 번성하게 된 곳이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였다.
이미 소금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베네치아는
여기에 설탕과
향신료 무역까지 더해
더욱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 노예 무역의 시작
중세시대 포르투갈은
유럽의 가난한 변방 국가였다.
▲ 포르투갈은 14세기까지 줄곧 이민족의 지배를 받던 나라였다.
하지만 이들은 이슬람을 통해서
유럽 국가들 중에서
가장 먼저 먼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항해술을 터득하게 된다.
▲ 포르투갈의 해안가
"옳지! 이렇게 돛을 달면
자유자재로 바람을 이용할 수 있구나."
▲ 이슬람 삼각범선과 포르투갈의 카라벨선
그리고 이슬람이 독점하고 있는
향신료 무역을 건드려보기 위해
15세기 중엽,
아프리카 해안을 탐사하게 된다. ☞ 참고
엔리케 왕자
"정말로 대서양이 막혀있는 게 맞음?"
▲ 당시 유럽에서 통용되던 세계지도 (포톨레마이오스의 지도)
엔리케 왕자
"만약 뚫려있다면
배를 타고 직접 인도와 중국으로 가서.."
엔리케 왕자
"향신료와 비단을 얻어올 수만 있으면
완전 대박 나는거 아님?"
이러한 발상에서 시작한
포르투갈의 항해는
정말로
뜻밖의 소득을 가져다주게 된다.
먼저 아프리카는
유럽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대륙이었다.
▲ 당시 세계의 끝이라 여겨졌던 보자도르 곶
"헐! 대서양이 이렇게 넓었구나!"
그리고 생각지도 않았던
커다란 보물을 가져다주었다.
그 보물이란
무엇이었을까?
① 향신료
② 상아
③ 황금
④ 노예
정답은
④번 노예였다.
물론 포르투갈인들은
세네갈에서 후추를 얻고
코트디부아르(상아해안)에서
상아를 얻고
가나(황금해안)에서는
황금을 발견하게 된다.
상인
"따봉!"
이때 포르투갈인들은 서둘러
가지고 온 물품을 꺼내
가나 사람들의 황금과
맞바꾸려고 했다.
상인
"이것은 세숫대야, 이것은 팔찌,
이것은 술, 이것은 직물.."
상인
"자, 이 중에 갖고 싶은 거 있음 말해봐.
너희들의 황금과 바꾸고 싶다능."
하지만 가나 사람들의 반응은
의외로 시큰둥했다.
"노예는 없음?
우리는 노예가 필요한데.."
상인
"노예는 왜 필요한데?"
"가마꾼으로 부리고
농사짓는 일꾼으로도 부리려고.."
▲ 아프리카의 가마
그것은
뜻밖의 요구였다.
상인
"알겠음. 기둘려.
노예를 가지고 오겠삼."
그리하여 포르투갈 사람들은
가나 옆 동네인 베넹으로 갔는데
다행히 그곳의 원주민들은
유럽의 물건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기꺼이 자신들의 노예를
내어주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포르투갈인들은
노예해안(베넹, 나이지리아)에서 노예를 구입하고
이를 통해 황금해안(가나)에서
황금을 맞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당시의 노예는
'중간 상품'에 해당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곧 베넹에서
노예 공급을 중단하자,
"우리 노예들은
이제 더 이상 나올 곳이 없다능."
포르투갈인들은
콩고로 내려가서 노예를 샀고
▲ 포르투갈 상인들은 노예 수급을 위해 콩고 → 앙골라로 지역을 확대하게 된다.
또 가나에서도
더 이상 나올 황금이 없었기 때문에
"너희들한테 다 주고 이제 없어."
포르투갈인들은 노예들을
유럽으로 팔기 시작했고
상인
"자, 아프리카에서 직수입한
일 잘하고 튼튼한 노예가 왔어요."
이후 '노예'들은
앞으로 유럽인들에게 가져다 줄
황금만큼이나
값진 보물이 되어 준다.
▲ 리스본의 흑인들
●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설탕농장
하지만 유럽으로
노예를 파는 것보다
훨씬 더 짭짤한 아이디어가
나타났다.
바로 설탕을 만들어서
유럽으로 내다 파는 것이었다.
다행히 포르투갈에게는
아프리카 항해 도중에 발견한
대서양의 외딴 섬, 카보베르데라는
식민지가 있었다.
이곳에 사탕수수 농장을 만들어
설탕을 제조하고
유럽으로 팔아넘기면
엄청난 수익이 예상됐다.
사실 설탕을 생산하려면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로 했다.
사탕수수 베기,
사탕수수 분쇄와 수액짜기,
수액을 달여서 졸이기,
졸여 만든 농축액(당밀)을 정화하고
결정화시키기,
건조시키기
등등 모든 일에
사람 손이 필요했다.
때문에 노동력을 확보하는 일이
설탕 산업의 관건이라 할 수 있었는데,
노예 공급을 담당하던 포르투갈로서는
충분히 해볼 수 있는 사업이었던 것이다.
상인
"좋아, 바로 이거야!"
그리고 그렇게 시작한 설탕사업은
정말로 대박을 터뜨렸다.
"와! 포르투갈 넘들 재주도 좋네.
이 많은 설탕을 어떻게 다 들여온겨?"
당시 유럽인들은
베네치아 상인들처럼
포르투갈인들도 이슬람을 통해
설탕을 들여온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포르투갈은
모든 일을 철저히 비밀로 하고 있었다.
무역을 담당하는 선원들에게는
비밀엄수의 명령이 떨어졌고
문헌에 함부로
지도와 해도를 싣지 못하도록 했으며
지도와 해도의 제작도
충성스러운 특정 가문에게만 전담토록 한 것이다.
혹시나 외국 선박이
주위를 얼쩡거리기라도 하면
나포해서 선원들을
모두 사살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존 리더,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 p.473)
하지만 이웃나라 스페인은
모든 걸 뻔히 알고 있었다.
다만 스페인 사람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고
자신들도 서인도제도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만들어
원주민들의 노동력을 통해
설탕 무역을 하고자 했기 때문에
포르투갈의 독점 행위를
조용히 눈 감아 줬고
오히려 스페인은 포르투갈과 협정을 맺어
서로의 독점권을 인정하기로 했다.
"서경 46도를 기준으로 동쪽은 포르투갈이 갖고
서쪽은 스페인이 갖도록 하자능."
"좋아. 대신 넘어오기 없기다."
이렇게 지들 맘대로
지구를 반땅을 해 먹었던 것이다.
그런데 스페인 사람들에게
난데없는 재앙이 닥쳤다.
그 많던 인디언 원주민들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스페인 상인
"뜨아!"
구대륙의 풍토병에
내성이 없었던 원주민들이
천연두를 비롯한 질병으로
모두 다 증발해버리고 만 것이다.
스페인 상인
"아놔, 일해줄 일꾼이 없잖아."
때문에 스페인은 포르투갈로부터
흑인 노예를 사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더라도 스페인은
크게 불평하지 않았다.
당시 스페인의 전략 사업은
페루와 멕시코 등지에서 나오는 은(銀)이었기 때문에
은(銀)을 중국과 유럽에
팔아먹는 것만으로도
▲ 페루의 은광산
스페인은 포르투갈보다 더한
부(富)를 창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16세기 당시 포르투갈을 통해
대서양의 삼각무역이 만들어지게 된다.
삼각무역이란
이렇다.
유럽의 제품을 아프리카로 들고 가서
현지의 노예와 맞바꾸고
노예들을 배에 태워
브라질과 카리브 해 연안으로 내려놓고
그 대가로
설탕을 배에다 싣고
그렇게 얻어진 설탕을
유럽 시장에 팔아먹는 식이었다.
이런 삼각 무역은
막대한 폭리를 보장해주던 사업이었기에
이후 삼각무역을 독점한 국가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며
당대 유럽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동시에,
장차 있을 근대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선봉에 나설 수 있게 된다.
● 영국·프랑스·네덜란드의 가로채기
하지만 포르투갈의
독점은 계속되지 못했다.
"포르투갈넘이 무슨 마법이라도 부리나?
어떻게 그 많은 설탕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는겨?"
그리고 결국
영업비밀이 새어나가고 말았으니,
"오호라! 그랬었군."
"누구 맘대로 아프리카 노예무역을
혼자서 독차지하겠다는 거임?"
유럽의 열강들은 곧장
포르투갈의 독점에 항의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포르투갈의 전략적 동반자였던 스페인이
영국에게 얻어터진 사건도 한몫했다. ☞ 참고
"누구 맘대로 신대륙을
독차지하겠다는 거임?"
결국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가
아프리카 해안으로 쳐들어가
이제는 자신들이
포르투갈 선박을 나포해서
노예무역의 독점권을
빼앗아오기 시작했다.
1500년부터 1531년까지 프랑스 함선이 납치한
포르투갈 선박만 300여 척이 넘었다.
(존 리더,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 p.473)
"하하하. 같잖은 것들이.."
그리고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는
노예무역뿐만 아니라
설탕 농사에도
군침을 흘렸기 때문에
스페인의 식민지들을
차례차례로 빼앗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아이티
영국은 자메이카
네덜란드는 수리남
그렇게 스페인의 식민지들이
차례로 주인이 바뀌게 되었고
때마침 유럽에서는 초콜릿·커피·차 같은
기호 식품이 소개되면서
설탕을 찾는 사람들이
더욱 증가하고 있었으니,
삼각무역의 이익을 독점한
영국과 프랑스는
그야말로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고,
이후 이들은 산업혁명을 주도하며
제국주의의 선봉에 설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왜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현지에서
직접 사탕수수를 재배하지 않았을까?
"오우, 노!
아프리카는 너무 위험하다능."
그것은 바로 아프리카에는
말라리아, 황열 등의
유럽인들도 버텨낼 수 없는,
풍토병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럽인들은
풍토병이 없는 신대륙까지 가서 농장을 꾸리고
그곳으로 아프리카 노예들을
실어 날아야만 했던 것이다.
참고로 17~18세기 당시
1300만 명의 노예들이 대서양을 건너게 되는데
이들의 운명이란
대략 이러했다.
카리브해의 설탕 농장으로 간 노예 : 450만 명
브라질의 설탕 농장으로 간 노예 : 500만 명
미국으로 간 노예 : 50만 명
항해 도중 사망한 노예 : 200만 명
(필립 커틴, 대서양의 노예 무역 p.131)
끔찍한 노예무역 : 과연 유럽인들만의 책임이었나?
● 아프리카 노예무역의 진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의 귀족과 상인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인'을 제공했다.
직물, 금속, 총, 화약
술, 담배 등이 그것이었다.
이런 것들을 차지하려면
아프리카 귀족들도
무엇인가를
내어줘야만 했는데,
문제는
도통 팔만한 상품이 없었다.
"뭐가 있지?"
황금은 다 떨어졌고
향신료와 같은 열대작물들은
이제는 신대륙에서
유럽인들이 직접 재배를 하고 있었으니
도대체 무엇을
팔 수 있단 말인가?
결국 노예밖에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아프리카의
노예무역은
아프리카인들 스스로가 좋아서
자발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만약 아프리카인들이
유럽인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았더라면?
유럽인들은 그토록이나 많은 노예들을
신대륙으로 실어 나를 수가 없었다.
아프리카인들은 꽤나 호전적이었고
무서운 풍토병도 도사리고 있었으니
아프리카를 점령한다는 것은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결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노예무역이 활발해진 배경에는
아프리카인들 스스로
노예 습격을 대신해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래 서양인들이 오기 전에도
아프리카에서는 관습적으로 노예제가 있었다.
15세기 중반 포르투갈이
처음 세네갈을 발견했을 때만 해도
세네갈인들은
유럽인들의 말을 필요로 해서
이때 지불 대금으로
말 한 필 당 노예 10~15명을 받은 바 있었다.
(존 리더,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 p.489)
그러나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자
말은 급격히 상품성이 떨어졌다.
습한 적도 환경에서
말이 제대로 적응을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 이곳에서는
직물과 금속류가 주요 교역품이 된다.
● 무엇을 교환했나?
당시 교역품을 보면, 직물이 1/3을 넘었고
나머지는 금속류가 주류를 이뤘다.
면도 용기, 구리 솥, 구리 주전자,
세수 대야, 요강 등이 그것이었다.
특히 구리와 놋쇠로 만들어진
'마닐라'라고 하는,
말굽 모양의 팔찌를
원주민들은 무척이나 좋아해서
▲ 마닐라 (Manilla)
황금해안(가나)에서는
마닐라가 화폐 대용으로 사용될 정도여서
16세기 당시 노예 1명의 값은
세숫대야 2개 혹은 마닐라 30개와 교환됐다.
하지만 물건이 흔해지면 값이 내려간다는
'희소성의 원칙' 때문인지
17세기로 가면 노예 1명의 값은
세숫대야 4개 혹은 마닐라 50개 이상으로 오르게 된다.
한편 노예해안(나이지리아, 베넹)에서는
조개껍데기가 인기가 있었는데,
▲ 카우리 조개껍데기
특히 대서양 연안에서는 볼 수 없는,
태평양과 인도양 연안의 카우리 조개는
서부 아프리카에서
희소성이 높은데다가
잘 부서지지 않고 광택이 나기 때문에
현지인들은 마치 보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전혀 경제적 가치가 없는 조개껍데기를
수 천개에 노예 한명으로
교환하기도 했고
그렇게 해서 조개껍데기 100만 개가
서아프리카로 유입되기도 했다.
▲ 카우리 조개껍데기로 만든 장식품
또 쇠막대기도 인기가 있어
쇠막대 80개면 노예 한 명과 교환이 가능했다.
다만 항해를 할 때마다
항구마다 원하는 물품이 달라서
1780년 어느 선장은
이렇게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
(존 리더,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 p.497)
"아프리카는 지역마다 풍습이 제각각인 탓에
물품에 대한 취향도 각양각색이다."
"게다가 변덕이 어찌나 심한지,
어떤 해에 열띤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물건이라도,"
"다음 해에 가지고 가면
냉대를 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변치 않고
인기가 있었던 품목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총과 화약이었다.
포르투갈인들이 15세기 후반
노예해안(베넹)에서 노예무역을 시작할 때만 해도
유럽의 교황청에서는
이방인들에게 무기를 판매하는 것을 철저히 금지했기 때문에
아프리카인들이
매우 총을 가지고 싶어했으나
포르투갈인들은 총을 파는 것을
단념한 바 있었다.
물론 당시의 화승총은
그다지 효율적이지는 못했다.
점화 시간이 길었고
비가 오거나 바람이 강하면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조선은 구한말 때까지 사용했던 총이다.)
그러던 것이 17세기 초 프랑스에서
그리고 때마침
교황이 금지를 풀었다.
그리하여 17세기부터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에 수발총을 팔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구입한 총이
노예 사냥의 주된 무기가 되었음은 너무도 당연했다.
17세기 후반 총은 두 정에
남자 노예 한 명에 거래될 만큼 비쌌지만,
18세기 초가 되면 총이 흔해져
남자 노예 한 명당 30정의 총이 교환되곤 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총이
아프리카로 흘러들어갔겠는가!
총 2천만 정의 총이
아프리카로 들어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폴 러브조이, 아프리카 노예제도의 역사 p.106)
● 400년을 거듭한 공포
노예무역이 절정에 달했던
18세기에는,
매년 6만여 명의 노예들이
대서양을 건넜지만
아프리카 전체 인구(당시 5천만 명으로 추정)로 따지면
사실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예컨대 서아프리카에서 노예로 잡혀가는 수는
매년 인구 1000명당 6명 정도였는데,
노예로 잡혔다 하더라도
대서양 너머로 가지 않고
다른 아프리카 지역에
내려진 사람들의 수도 많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수백 명이 사는 촌락에서
청년 남자 한 명을 잃는 정도의 손실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에 당시 질병이나 자연재해로 죽는 사람만도
매년 1000명당 50명에 달했으니,
노예로 6명이 납치되는 것쯤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통계로 보면
18세기 아프리카 서부의 촌락 주민이 노예로 잡힐 확률은
미국 시민이 고속도로에서
피살될 확률보다 낮았다고 한다.
(존 리더,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 p.509)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노예무역의 피해는 크게 과장된 것이 아닌가!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노예로 붙잡힐 수 있다는 공포는
생활 곳곳에서 불안감을 가중시켰고
그런 불확실성과 공포가
무려 400년 동안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승되어 왔다고 생각해보면
결코 무시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늘날 아프리카인들에게
'숙명론'이 만연한 것도
당시 노예무역의 유산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니 말이다.
특히 서아프리카 주민들은
무려 20세대에 걸쳐
이웃과 친지들이 납치되고
노예상에게 팔려가는 것을 봐야만 했다.
게다가 노예무역의 여파는 시간이 흐를수록
아프리카 대륙의 구석구석까지 미쳤으니,
그 결과가
어떠했겠는가?
처음에는 소문으로만 듣던 것이
어느날 덜컥 현실로 전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공포가 상당했을 것이다.
당시 흑인 사회에서는
백인들이 노예를 잡아먹기 위해
납치한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는데,
노예선의 앞 갑판에 걸려있는
커다란 구리 솥을 보고
백인들이 흑인의 고기를 소금에
절여 먹는다는 소문이 나돌았는가 하면
붉은 포도주는
흑인의 피,
치즈는 흑인의 뇌수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었다.
노예로 붙잡힌 한 흑인은
백인의 구두를 보고 이렇게 묻기도 했었다.
"내 피부와 같은 색인데
혹시 흑인의 가죽으로 만든 신발인가요?"
● 노예사냥
18세기에 자유민이 된
올라우다 에퀴아노(olaudah equiano)의 자서전에는
당시 노예사냥의 모습이
생생히 묘사되고 있다.
에퀴아노
"동네 어른들이 밭으로 일하러 간 동안
아이들끼리 한 집에 모여 있을 때였다."
에퀴아노
"한 아이가 나무에 올라가
노예사냥꾼들이 오는지 감시하고 있었는데,"
에퀴아노
"사냥꾼들이 어찌나 빨리 들어닥치는지
순식간에 아이들은 모두 사로잡히고 말았다."
에퀴아노
"아이들은 살려달라고 소리쳤지만 소용없었고."
사냥꾼들은 아이들을 커다란 자루에 집어넣었다."
에퀴아노
"나는 누이와 서로 팔을 부둥켜 잡았지만
그들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에퀴아노
"누이는 곧장 다른 데로 갔고
나는 그저 슬픔에 겨워 매일 울기만 했다."
(존 리더,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 p.512)
그렇게 끌려온 노예들은
유럽인들의 배에 태워지기 전에
조그만 움막에
집단 수용되어 있어야만 했는데,
당시의 수용소는
보통 높이 3m의 벽으로 둘러싸여
5평 공간에 200명, 심지어 400명까지
빼곡히 채워넣었던 곳이었다. ☞ 참고
음식은 말린 생선이
주류를 이뤘고
노예들은 이곳에 머물며
먹고 자고 싸는 모든 일들을 다 해치워야만 했다.
그러니 그 더러움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썩은 생선 냄새, 노예들의 설사,
시체 썩는 냄새까지 더해졌다.
게다가 벌거벗은 몸으로 화톳불 하나 없이
맨땅에서 냉기를 참아내야 했으니,
그렇게 배설물 속에서 웅크린 채
며칠, 몇 주씩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 유럽 선박이 오면 카누를 이용해서 노예들을 실어 날랐다.
한편 노예무역이 도입된 이후
아프리카의 왕국들에서는
모든 형벌이
'노예형'으로 바뀌고 있었는데
덕분에 사형이 사라졌지만
온갖 사소한 경범죄에도
노예형이 내려지는
모순이 만연하고 있었다.
당시 권력자들에게는
치안 유지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많은 노예를 팔아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는 것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 아프리카의 귀족
다만 역사가들은
노예무역의 공급자를
아프리카의 부유하고 힘센 귀족으로만
한정하지는 않는다.
소규모 상인과 개인 사업자들이
노예를 공급하는 경우도 많았고
심지어 일반인도 개인적으로
노예를 한두 명씩 사냥해서 거래하곤 했기 때문이다.
노예를 획득할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기회만 되면,
노예를 사냥하던 때라고 봐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노예가 된 사유 : 존 리더,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 p.514>
▲ 기타 : 친척이나 가족에 의해 팔리거나, 빚을 갚기 위해 팔리거나, 유죄판결로 노예가 된 경우
● 노예선의 모습
그렇다면 노예들은
어떻게 수송했을까?
당시 노예 운반선의
갑판 밑에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노예를 싣기 위해
선창 바닥에 노예를 눕히고
그 위에 여러 겹의 선반을 놓아
노예를 얹어 싣는 방법을 채택하고 있었다.
때문에 노예들에게는
1인당 길이 152cm, 넓이 28cm,
높이 58cm의
공간만이 허용될 뿐이었다.
소형선박의 경우는
더욱 처참해서
겨우 1m 밖에 안되는 공간에
꾸역꾸역 집어넣기까지 했었다.
그러니 노예들은 하루종일
웅크리고 앉아 있어야만 했고
잠 잘 때는 옆 사람과의 간격이 좁아
모로 누워 있어야 할 지경이었다.
선창의 구조는 조금이라도 공간의 낭비가 없도록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선수에서 선미까지
빈 공간은 단 1미터도 없었고
보통 한 배에
600명 씩을 싣곤 했었다.
(존 리더,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 p.484)
노예들은 6명씩 긴 체인으로 묶이고
다시 2명씩 족쇄가 채워졌는데,
이때 한 사람의 오른손과 오른발이
다른 사람의 왼손과 왼발에 묶이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어떤 노예들의 경우는
두사람이 오른쪽이나 왼쪽이
함께 묶이기도 했으니,
이런 경우에 노예들은
마치 앞뒤로 묶이는 것과 같아
그 고통이 훨씬 컸다고 한다.
또 좁은 공간에
수백 명의 사람들로 채워지다 보니
열기, 땀, 씻지 않은 몸에서 풍기는 악취로
공기는 구토가 날 정도로 심각했고
어찌나 공기 오염이 심했던지
산소 부족으로
촛불을 켜면
곧바로 불이 꺼질 정도였다고 한다.
또 노예를 많이 태우려다 보니
물과 식량을 실을 공간이 부족해서
노예들에게는
하루 한 끼 식사만 제공되었고
제공하는 식사라고 해봤자
옥수수나 조로 만든 죽과 물 한 잔이 전부였다.
● 아비규환의 노예선
노예선의 끔찍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인간의 생리현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설계로
생각지도 않은 참혹한 결과가
여기저기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노예들은 난생처음 하는 항해라
멀미 때문에 구토하기 일쑤였고
배에서 용변 보는 장소가
정해져 있다 하더라도
사슬에 묶여 있기 때문에
이동하기가 쉽지 않아
누운 상태에서 용변을 싸서
뭉게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당시 노예들은 이질에 걸려 설사에 시달리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에
위층에 누운 노예가
만약 이질에 걸리면
설사가 아래층 노예들에게
그대로 떨어지곤 했다.
때문에 토사물과 용변, 땀으로
뒤범벅되어
여행이 끝날 즘에는
그 냄새는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잠시도
노예들을 돌보기가 힘들어서
한 의사는
이렇게 절규를 하기도 했다.
"노예들의 선창에 들어가면
지옥이 따로 없었다."
"이질 환자들의 몸에서 나온
피와 점액으로 바닥이 흥건했고."
"끔찍하고 역겨운 냄새는
상상하기도 쉽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냄새 때문에
멀리서도
노예선이 항구에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처럼 열악하고
가혹한 환경 속에서
2달 동안이나 선창에서
갇혀 있어야 했던 노예들이기에
노예들은 평균 20% 가까이가
운송 도중에 사망을 했다.
배가 폭풍우를 만나
침몰하는 경우도 있었다.
1737년 네덜란드의 노예선은
716명의 노예를 태우고 수리남으로 향했는데,
도착을 며칠 앞두고
폭풍우에 배가 기울자
선원들은 노예들이 올라오지 못하게
문을 닫아 버리고
자신들만 구명정을 타고
살아남았던 사건이 있었다.
1781년 영국의 노예선은
항해 중 물이 부족해지자
흑인 노예 132명을
바다에 던져 버리기도 했었다. ☞ 참고
하지만 선장들이
과밀 수송의 위험성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시에는 노예가 죽더라도
회사의 손실일 뿐,
선장 자신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저 선장은 노예를 수송해주고
수수료를 챙기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선장들은
최대한의 이익을 누리고자
가급적 배에
많은 노예를 태우려 했던 것이다.
● 끌려간 노예들의 일상
신대륙에 도착한 노예들 가운데
절반 이상은 3년을 못 넘기고 죽음을 맞았다.
하루 20시간에 달하는 고된 노동을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4m가 넘는 사탕수수를
커다란 벌채용 칼로 베다 보면
찔리고 감염되어
생명을 잃는 일이 다반사였고,
공장에서도 피곤에 지치거나
졸음을 이기지 못해
압착 롤러에 손가락이 끼는
일들이 빈번했다.
그래서 롤러 가까이에
손도끼를 준비해 두고
팔이 롤러에 딸려 들어가기 전에
손을 절단하곤 했다.
사탕수수 액을 끓여
설탕을 결정화하는 일 또한 고통스러웠는데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뜨거운 고열 속에서
하루 종일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또 하루 종일 맨발로 서서
일해야 했던 노예들은
대부분 다리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하지만 병에 걸린 노예들을
돌보는 것보다
새로운 노예를 구입하는 편이
더 싸게 먹혔기 때문에
병에 걸린 노예들은 그대로 방치되어
끊임없이 죽어 나갔고
새로운 노예들이
노동현장으로 투입되곤 했었다.
그렇게 수많은 노예들이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이들을 구원한 것은
뜻밖에도 18세 후반의 산업혁명이었다.
산업혁명으로 서구 사회는
노동집약적이던 생산체제에서
서서히 자본집약적인 형태로
전환하게 되어
예전처럼 많은 노예들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상공업이 발전했던
미국의 북부지방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그렇다면 일손이 필요없게 된 흑인들을
당시 백인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노예에서 해방시켜주고
더불어 살고자 했을까?
미국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기도 했던
미국의 3대 대통령,
▲ 워싱턴, 제퍼슨, T 루즈벨트, 링컨
토머스 제퍼슨의
흑인에 대한 견해를 빌려보면 이렇다.
(존 리더,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 p.535)
제퍼슨
"흑인은 콩팥의 분비 활동이 미약해서
피부로 땀을 활발히 분비한다."
제퍼슨
"그래서 그들은 몸이 아주 튼튼한 대신에
심한 악취가 난다."
제퍼슨
"흑인 남자는 여자를 몹시도 밝히지만
그것은 사랑의 감정이 아닌 그저 열렬한 욕망에 가깝다."
제퍼슨
"그들에게는 슬픔도 일시적이다.
잠을 덜 자도 상관없는 듯 하다."
제퍼슨
"게다가 흑인들은
지적으로도 백인보다 열등하다."
이런 주장이 당시 백인들의
편견을 대변하고 있다.
● 노예해방의 이면
어쨌든 19세기 초 미국의 북부를 중심으로
많은 노예들이 해방되었다.
"농업이 발전했던 남부에서는
여전히 노예의 노동력이 중요했지만.."
▲ 남부의 노예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당시 백인들은 인류애적인 차원에서
대부분 '노예제'가 옳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 1852년 발간된 '톰아저씨의 오두막집'으로
노예제의 반감이 대중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그런 동시에 백인들은
자신들의 거주지에서
흑인들이 자유롭게 활보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흑인들을 아프리카로 돌려보내려는
계획을 꾸미기까지 했으니,
실제로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
해방 노예들을 위한 식민지를 건설하여
이곳으로 미국의 흑인들을
대거 돌려보내게 되는데,
▲ 라이베리아로 돌려보내진 미국의 흑인들
그렇게 만들어진 식민지의 이름은
자유를 뜻하는 '라이베리아'였고
수도의 이름은 당시 미국 대통령,
제임스 먼로에서 따 '먼로비아'로 명칭했다.
▲ 라이베리아의 국기도 성조기를 본 따 만들어졌다.
이때 식민지 건설을 위해 미국정부는
원주민 추장들에게 뇌물공세를 했지만,
그렇더라도 땅을 빼앗긴
원주민들의 반발은 어쩔 수 없었다.
더욱이 노예 출신의 이주민,
즉 아메리코-라이베리아인들은
자신들이 원주민들보다
더 우월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 아메리코-라이베리안(좌), 원주민(우)
기독교를 믿고,
글을 아는 사람들도 많았고,
또 백인과의 혼혈로
피부색이 원주민들보다는 다소 밝다라는 이유에서였다.
게다가 미국 정부도
전체 인구의 5% 밖에 안되는 이들에게
지배력을 넘겨줬으니
오늘날 라이베리아 내전의 근원은
▲ 라이베리아의 초대 대통령 로버츠
바로 이러한 얼룩진 역사에서
기원한 것이기도 했다.
▲ 라이베리아 내전
어쨌거나 19세기 무렵,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는
노예무역이 전면 폐지된다.
그렇다면 이후 아프리카는
어떤 모습으로 변모했을까?
해방의 자유를
듬뿍 느꼈을까?
아니다.
결코 그렇지가 않았다.
노예무역 자체가
원주민 지배층들의 욕심 때문에 활성화된 것인데
이미 노예사냥으로 맛을 들인 지배층들이
노예무역이 사라졌다고
노예사냥의 달콤함을
포기할 리 없었다!
그러니 아프리카의 지배자들은
직접 플랜테이션을 만들어서 노예들을 부리고
유럽인들이 원하는 상품을
수출하는 방식을 택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지배자들의 결정으로
아프리카는 유럽과 미국 경제에 예속되게 되고
아프리카의 노예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어
19세기 말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서만
총인구의 30~50%가 노예가 되었고,
특히 도시 주변은 그 비율이 더욱 높아져
인구의 80%가 노예가 됐다.
(존 리더, 아프리카 대륙의 일기 p.540)
오죽했으면
19세기 중엽 이집트에서는
사하라 이남에서 유입된
노예들로 흘러넘쳐서
병사들의 급료를
노예로 지불하고
정부의 조세도
노예로 받았을 정도였다.
(존 리더,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 p.541)
결국 노예무역이 폐지되자
아프리카에서는
이전보다 노예의 수가
10배나 더 증가하게 된다.
(존 리더,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 p.543)
참고 문헌 :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 (존 리더), 세상을 바꾼 맛 (정한진), 강대국의 조건 (중국 CCTV), 대항해시대 (주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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