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탄생
● 러시아의 탄생 과정
드넓은 동유럽 평원(남한 땅의 40배)에 살고있던
슬라브족들은
9세기 이전까지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다.
문명 세계와
철저히 등을 지고 살았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문자도 없었고
제대로 된 나라도 없었지."
"헐! 꽤 늦었네."
그러다가 9세기 후반 바이킹족들에 의해
이곳에 최초로 국가가 세워지니
▲ 키예프 루스 병사
이름하여
'키예프 루스'라 불렀다. ☞참고
▲ 키예프 루스 세력범위
"지배층은 소수의 바이킹 족들이었고
피지배층은 다수의 슬라브족들이었지."
"이런 과거 때문에 러시아 사람들은
꽤나 부정하고 싶은 역사라고 들었어."
"맞아. 러시아 사람들은
자존심이 굉장히 센 민족이거든."
"어쨌든 소수의 바이킹 족들은
시간이 흘러 슬라브족들에게 동화되었기 때문에,"
"키예프 루스는 사실상
슬라브 국가로 분류됨."
"지배층이 피지배민족에게 동화된 것은
마치 청나라와 비슷했네."
이렇게 만들어진 키예프 루스는
10세 후반, 나름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을 하게되고
비잔틴제국으로부터
그리스정교를 받아들여
유럽의 문화와 종교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게 된다.
하지만
좋은 시절도 잠시.
100년 후 아시아의 유목민이 쳐들어오자
키예프 루스는 커다란 위기를 맞이하게 되고
이후 나라는 사분오열로 쪼개져
여러 군소국가로 나뉘어지게 된다.
그러다가 또 100년 뒤에는
몽골의 침략을 받게되는데
이때 쳐들어온 몽골의 군대는
꽤나 살벌했다.
상대가 저항하면
아예 쑥대밭으로 갈아엎었고
항복하면 속국으로 삼아
정기적으로 상납금을 뜯어먹는 식으로 관리했던 것이다.
"당시 쳐들어온 몽골군은
동유럽 평원의 남쪽(우크라이나) 초원에 자리잡아,"
"'킵차크 한국'이라는 나라를 만들어서
북쪽에 있는 슬라브족 국가를 통치하게 되지."
▲ 킵차크한국
"우크라이나가
이래서 러시아랑 갈라진거임?"
"맞아. 원래 같은 나라였는데
유목민들의 침입으로 서서히 분열되다가.."
"몽골의 지배를 받으면서
언어, 문화가 북쪽과는 조금씩 다르게 변한거였지."
▲ 킵차크의 기병
그런데 이때 몽골족은
가깝게 위치한 모스크바 공국에게
군소국가들로부터 상납금을 수금하여
한데 모아 바치도록 하는 일을 맡겼기 때문에
▲ 당시의 조공 시스템
모스크바 공국은
돈을 거둬들이면서,
적당히 떼어먹는 식으로
얍삽하게 성장해 나갈 수가 있었고
그렇게 240년을 넘게 러시아의 소국들이
몽골(킵차크 한국)에게 조공을 바치며 살아가다가
▲ 몽골의 관리(다루가치)에게 조공을 바치는 러시아인들
1483년 모스크바 공국의 왕,
이반 3세의 도발로
조공관계는 마침내 깨어지게 된다.
그 사연은 이렇다.
이반 3세
"아놔, 도저히 못 참겠음.
언제까지 몽골의 호주머니로 살아가야함?"
이반 3세
"우리 슬라브족들이 뭉치면
그깟 몽골 넘들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니깐!"
그렇게
군소 국가들을 꼬드겼고
결국은 몽골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어
몽골족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반 3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아서
내친김에 여러 군소 국가들까지 접수하며
광활한 북부 동유럽 평원을 차지하게 되었고
이로써
오늘날의 러시아가 시작되게 된다.
다만 몽골의 지배를 대신하여
새롭게 주인이 된 모스크바 공국은
몽골에게
못된 것만 배운 나머지
폭력과 강압정치로
동유럽 평원을 지배하게 되어
▲ 모스크바 공국의 왕
이때부터 악명높은 '농노 제도'가
법적으로 확립되게 된다.
▲ 러시아의 농노
"당시 유럽에서도 농노는 있었잖아."
"러시아의 농노는 사실 말이 농노였지
조선의 노비와 비슷했어."
"어떻게?"
"땅에 예속되어 지배를 받았다는 점에서
유럽의 농노와 같았지만,"
"물건처럼 매매의 대상이었고
아무런 기본권이 없었다는 점에서 조선의 노비와 같았지."
"음.."
"또 러시아의 농노의 수는
전체 인구의 60% 정도로,"
"엄청난 비중이었다는 점에서도
조선의 노비와 비슷했음."
이후 모스크바 공국은
중앙집권적인 국가 체제를 확립하게 되었고
▲ 모스크바 대공 때 만들어진 성당
여느 유럽의 국가들과는 달리
'장자상속'으로 왕위를 이어가게 된다.
"은근히 동양과
비슷한게 많았네."
● 황제(차르)국가가 되기까지
1453년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하게 되는데
비잔틴이 멸망한 뒤
90 여년이 지나
이반 3세의 아들,
이반 4세는
명맥이 끊긴 로마제국을 안타까워하며
스스로 로마의 황제가 되기로 작정한다.
이반 4세
"울엄마가 원래
비잔틴 마지막 황제의 딸이셨다능."
이반 4세
"그런데 비잔틴은 이제 사라졌으니
내가 그 로마를 계승하고자 함."
이반 4세
"이의 없지?"
그리하여 이반 4세는
스스로를 로마황제라 칭하고
국가의 명칭도 '모스크바 공국'에서
'루스 차르국'으로 바꾸게 된다.
▲ 로마제국을 상징하는 '쌍두 독수리'는 이후 러시아를 상징하는 문양이 된다.
여기서 '차르'는 군주를 뜻하는
라틴어 '카이사르'의 러시아어식 발음이다.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를
'황제국'이라 칭하게되자
러시아 사람들은
거하게 국뽕에 취하게 되었으니..
당시 사람들은
스스로를 이렇게 표현했다.
"인류 역사에서
3개의 로마가 있었다능."
"그런데 앞의 두 로마는
이미 멸망했으니,"
"마지막으로 남은 로마 황제국은
오직 우리 루스 차르밖에 없다능."
"맞아! 루스 차르는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존엄한 나라임!"
이렇게 전세계 사람들이
아무도 인정 안해주는 사실을 가지고
자기들끼리 가슴 벅차하며
흥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조선 후기와도 은근히 닮았다.
① 중앙집권적인 국가 체제
② 농노를 중심으로 한 농업국가
③ 비잔틴이 멸망하자
스스로 '로마'라 부르짓은 러시아판 '소중화사상'
하지만 러시아에게는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들 뜬 자신감을 맘껏 표출할 수 있는
드넓은 대지가 지척에 깔려 있었다는 점.
"반면에 조선은 북벌론이 있었다지만
워낙 청나라가 강성해서,"
"자부심을 어디로 표출해야할지,
출구가 없었지."
"아! 그러고 보니
러시아는 운이 좋았네."
때문에 자신감에 찬 러시아인들은
신속하게 허허벌판의 영토를
마구잡이로
확장하기 시작했으니..
▲ 시베리아 대평원
동쪽으로는 우랄산맥을 넘어
시베리아를 점령했고
또 서쪽으로 폴란드,
남쪽으로는 몽골족 잔당을 물리치며
오스만 투르크와
인접하게 되었다.
● 땅 덩어리만 큰, 우물 안 개구리
이후로 러시아인들의
땅따먹기 게임은 계속되어서
17세기 후반에는
무려 '태평양 연안'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 17세기 후반 영역
"우아!"
"하지만 대단한건 아니야.
당시 시베리아는 무주공산이나 다름 없었거든."
▲ 시베리아의 시비르 한국을 정벌하고 있는 러시아군
"초원의 유목민들도 냉대림으로 우거진 시베리아 땅으로는
한사코 가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든 맘만 먹으면
광할한 땅을 집어삼킬 수가 있었어."
"그래도 그런 식으로 지구상 면적의 1/5을
차지했다는건 너무도 배가 아파."
"왜 아시아 국가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그러게. 요즘은 석유, 천연가스가
시베리아 벌판에서 펑펑 터지고 있다는데."
하지만 당시 시베리아는
러시아인들에게
동물의 가죽과 목재 외에는
별다른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때문에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여전히
가난하고 낙후되어 있었다.
특히 서유럽과 비교하면
이러한 차이는 더욱 극명했다.
"당시 서유럽은 신대륙을 발견하고
삼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면서,"
"다음 세기에 있을 산업혁명을
준비하고 있었던 시기였지."
"아!"
그에비해 러시아는
오직 농업에만 의존하던 국가였다.
▲ 러시아의 농노들
전국에 수공업 공장은 수십개에 불과했고
상업은 거의 대부분 외국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교육은 오직
교회가 독점하고 있었고
일반인들은 전혀 교육을 받을 수 없어서
문맹률은 무려 97%나 됐다.
▲ 러시아의 농촌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러시아의 귀족들은 우물 안 개구리였다.
"우리가 로마의 정통 후계자 아님?"
"맞아! 러시아 민족은
최고로 위대하다능."
이렇게 자화자찬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개혁
● 표트르 대제가 경험한 신세계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러시아의 차르가 된 표트르 1세는
어릴 적부터 관습에 구애받는 걸 싫어했고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그런 성격은
청년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아,
발달된 서유럽의 실상을 목격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차게 되었는데..
표트르 1세
"서유럽이 얼마나 발달되었는지
내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오겠음."
그리하여 2m에 가까운 장신의 청년 표트르는
황제라는 신분을 숨기고
1697년 8월 직접 서유럽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네덜란드의 한 항구도시로,
당시 네덜란드는
유럽 최대의 조선소가 있었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유학생들과 함께 섞여서 생활하며
목재를 다듬고,
배를 만들고, 조정하는 법을 배웠고
손재주가 뛰어났기에
우수학생으로 뽑히기도 했다.
"올~! 키 큰 애가 제법 좀 하는데.."
이후 표트르는
네덜란드 외에도
스웨덴,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영국 등지로 건너가
견문을 넓히게 되는데,
특히 영국에서는 당대 최고의 천재과학자,
뉴턴과 만나기도 했었다.
아이작 뉴턴
"키 큰 청년은
여기 왜 왔는데?"
표트르 1세
"영국에서 건축학 좀 공부해 보려구요.
님이 쓰신 만유인력 책도 봤는데, 정말 짱이셈."
아이작 뉴턴
"하하하.."
그러면서
표트르는 다짐했다.
표트르 1세
"무슨 짓을 해서라도
가난한 러시아를 서유럽처럼 만들어 놓겠다능."
하지만 표트르 1세가
황궁을 비우고 나간 사이에
러시아에서는 예기치 않은
쿠데타가 거행되고 있었고
소식을 접한 그는,
이탈리아에서
무기공장을 견학하던 걸 중간에 멈추고
재빨리 귀국해야만 했다.
그가 러시아를 떠난지
꼬박 1년만의 귀국이었다.
● 표트르 대제의 야심찬 개혁
귀국을 한 표트르는
급하게 반란군을 진압했다.
▲ 진압 당한 반란군
표트르 1세
"이것들이
감히 황권을 노려!"
그리고 반란이 평정되자
표트르는 곧 전면적인 개혁을 실시하게 된다.
표트르 1세
"러시아는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였어.
지금부터 모든 걸 싹 다 뜯어고치겠어."
그리고는 문자, 역법, 제도에서부터
의복 양식까지도 모두 뜯어고치고자 했다.
이때 압권은
수염이었다.
표트르 1세
"서유럽에 다녀와서 느낀건데
제발 수염 좀 깎어. 정말 보기 지저분함."
하지만 사람들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표트르 1세
"어라? 말 안들어?
앞으로 수염 안 깎으면 목을 치겠어!"
그리고는 열받은 표트르는 본보기로
한 귀족의 수염을 붙잡고 가차없이 가위질을 했는데..
귀족은 땅에 엎드려 눈물로 호소했지만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표트르 1세는 이렇게 말한다.
표트르 1세
"젠장! 맘대로 해!
수염 기르던 말던 자유."
표트르 1세
"대신 앞으로 수염 안 깎으면
세금을 물리도록 하겠어!"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인가!
신기하게도 다음날 사람들이
싹 다 면도를 하고 나온 것이 아닌가!
표트르 1세
"아! 돈의 힘이란
이렇게 무서웠구나!"
이어서 황제는
서유럽의 양복을 입도록 했고
귀족 신분인데도 외국어를
하나도 하지 못하면
신분을 박탈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었다.
또 법제질서를
확립한다는 명분으로
가혹할 정도로의 엄격한
형벌제도를 만들어 발표했다.
하지만 반발세력들의
저항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낙후되어 있다는 사실을
쉽게 받으들일 수가 없었다.
"아 글쎄, 서구 문물하고 비교해 보라니깐
러시아는 뒤쳐진게 확실함!"
그렇게 말하면
그들은 이렇게 응수했다.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전통을 잘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니깐
오히려 자랑할만한 것 아닌가!"
"맞아! 우리는 로마의 후계자임!"
한편 저항심리가
팽배하고 있을 무렵,
1700년 9월 표트르 1세는
유럽으로 통하는 문을 열기위해
스웨덴 영토를
대대적으로 침략하게 된다.
표트르 1세
"무엇보다도 발트해를 빼앗아야
유럽으로 향할 수 있는 출입구가 만들어짐."
그러면서 10만명으로
쳐들어간 것이다. (북방전쟁)
하지만
결과는 대 참패.
고작 스웨덴군 8천명에게
탈탈 털리고 만 것이다.
"헐! 그렇게 허접한 실력으로
시베리아의 광대한 영토를 쓸어 먹었다니,"
"이거 완전 공갈포였네."
게다가 당시 러시아는 군대는 물론
모든 지휘관까지 잃어야 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저항할 능력마저
상실하고 말았다.
하지만 표트르 1세는
여기서 굴하지 않았다.
군 장교들을 양성하기 위해
수천 명의 청년들을 서유럽으로 유학보냈고
군수물자를 만들기 위해
자원이 풍부한 우랄 산맥 부근에
대규모 공업단지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절치부심하고,
9년 후 다시 쳐들어 갔으니
이번에는 스웨덴을 상대로
멋지게 복수를 할 수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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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색(러시아군) vs 파란색(스웨덴군)
이때 스웨덴 국왕은 정신없이 털려
급기야 오스만으로 망명을 하기에 이른다.
▲ 스웨덴 군
그것은 러시아가 유럽의 강국으로
새롭게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러시아? 뭐 그런 나라도 있었나?"
"몰라. 어쨌든 스웨덴을 이겼다니
한가닥은 하는 넘들인가 본데."
● 표트르 대제의 빛과 그림자
1712년 표트르 1세는 수도를 아예
모스크바에서 발트해 인근으로 옮기고
이곳을 '상트 페테르부르크'
라고 명명한다.
그곳은 조금 더 서구화 되고 싶었던
그의 바람이 나타난 결과물이었으니,
새롭게 조성된
제국의 새 수도에는
곧 유럽식 복장을 입고 유럽의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로 넘쳐나게 된다.
한편 표트르는 스스로가
국민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 나머지
황제였음에도 불구하고
하사관 신분으로 군대에 복무하는가 하면,
철강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벌어들인 봉급으로
직접 자신의 신발을 사서 신을 정도로
근면 검약을 실천하게 되는데,
특히 해외에서 돌아온 유학생들을 접견할 때면
표트르는 손을 내밀며 이렇게 자랑하곤 했다.
표트르 1세
"봤지? 이 굳은 살.
너희들도 나처럼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능."
하지만 그의 치명적인 단점은
지나치게 독단적이고 독선적이었다는 데 있었다.
그리고 마음에 안들면
강압과 폭력도 서슴치 않았다.
"나만 잘났다는,
독불장군 스타일이었지."
정치·사상은 사사건건 통제받았고
황제만이 절대권력을 쥐고 있었다.
또 전체 국민 중 2/3에 가까웠던 농노는
여전히 비참한 생활을 강요받았고
전국민이 '인두세'라는 형식으로
과중한 세금을 헌납해야만 했다.
때문에 당시에
이런 말도 있었다.
"지금 러시아에서 자유인이란
황제 말고는 아무도 없다."
애초에 표트르의 개혁 목적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것이었지
민생을 위한 것은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그의 아들 알렉세이조차
개혁에 반대하고자 반역을 꾀했으니
▲ 알렉세이(좌), 표트르(우)
알렉세이는 고문으로 죽기 전에
표트르에게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알렉세이
"아버지, 지금 모든 러시아 국민들이.."
알렉세이
"아버지의 개혁을 욕하고
저의 역모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결국 표트르는 너무 급하게 개혁만을 생각하다가
전통문화를 헌신짝처럼 버리려고 했기에
낙후된 러시아를 구원한
개혁 군주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민중들은
그의 개혁에 한사코 등을 돌리려 했던 것이다.
● 또 다른 계몽군주, 예카테리나 2세
표트르 대제가 죽은 후
37년 동안 6명의 차르가 바뀐다.
이들 중에서 표트르 1세가
시작한 개혁 사업을 지속할만한
용기와 능력이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도는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왔고
표트르 1세가 만든 법령들은
대부분 폐지되었다.
▲ 18세기 모스크바
러시아는 다시
개혁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1762년 예카테리나 2세라는
33살의 여황제가 차르에 등극한다.
여제는 러시아 사람이 아니었다.
실은 독일 사람이었다.
남편 표트르 3세와 결혼해서
러시아의 여제까지 된 것이었다.
▲ 표트르 3세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프랑스 가정교사에게 교육받았고
당시 전유럽을 강타하고 있었던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의 책을 애독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느꼈다.
예카테리나 2세
"아! 법치주의 국가에서 살고싶다."
때문에 그녀는 무능력한 남편 표트르 3세가
전혀 맘에 들지 않았지만
정치를 해보고 싶다는 포부만으로
남편과 결혼을 하게 되었고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믿었던 신앙을 포기하고
그리스 정교회로
귀의하게 된다.
그리고 잠을 줄여가며 러시아어를 공부하며
스스로 러시아인이 되고자 무척이나 노력을 했다.
결국 이런 그녀의 노력과 행동은
러시아인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사실 그녀의 남편 표트르 3세는.."
"어려서부터 독일에서 자라서
러시아어를 전혀 하지 못했거든."
"헐!"
오히려 표트르 3세는
낙후된 러시아와 러시아인들을 멸시하고 있었다.
표트르 3세
"러시아 사람들은
무능력하고 지저분해."
하지만 여제가 된 예카테리나 2세는
평소 꿈에 그리던 개혁들을 하나씩 추진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추진한 것은
교육 개혁이었다.
예카테리나 2세
"자고로 인생의 첫 선생님은
어머니라고 했는데,"
예카테리나 2세
"어머니가 똑똑해야만
자식도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는거임."
예카테리나 2세
"그런데 지금 러시아에서
글을 읽을 수 있는 여자들은 거의 없잖아."
그리하여 러시아 전역에
여학교를 만들도록 했고,
교육비가 부족하다고 하면
과감히 자신의 재산을 떼어줄 정도였다.
"여왕 폐하,
지금 교육비가 부족한데요."
예카테리나 2세
"앞으로 황실 경비 모두 다 포기할테니
그걸로 교육비를 충당하도록."
또 꿈에 그리던
법치국가를 만들기 위해
1767년에 직접 2년을 투자해서
법전 초안을 스스로 집필하게 되니,
장장 600 페이지에 달하는
법전에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계몽사상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예카테리나 2세
"자유, 평등, 박애
얼마나 멋있음?"
예카테리나 2세
"러시아도 앞으로 이렇게 달려보는 거야."
● 예카테리나 2세의 한계와 타협
하지만 그녀 또한
표트르 1세와 같이 지나치게 독선적이었다.
법제의 실행을 위해 관료들과 1년동안
무려 200차례의 회의를 거쳤지만
결국 새 법전은
발행되지 못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너무 현실을 몰랐지."
"어떻게?"
"당시 러시아는 철저히 농노를 기반으로
운영되어지고 있었던 농업국가인데,"
"하루 아침에 농노들에게도
귀족과 똑같은 법률적 지위를 부여하겠다고 했으니.."
▲ 러시아의 농노
"기득권층의 거센 반발을
도저히 이겨낼 수가 없었던 것이지."
오히려 당시 귀족들은
이렇게 압박했다.
"여왕폐하, 농노제를 폐지하겠다면
그 전에 폐하의 기반부터 흔들리게 될겁니다."
예카테리나 2세
"..."
일종의
협박이었고,
결국 예카테리나 2세는
현실의 한계를 절감하고
이후로는 철저히 귀족의 이익을 위해
정책을 수립하게 되어
오히려 그녀의 집권 시기, 러시아의 농노제는
더욱 강화되고 말았고
그러면서 귀족들에게는
보다 많은 자유와 권리를 부여했다.
때문에 여제는 귀족들에게는
많은 인기를 얻게 되었다.
"여왕 폐하 만쉐이~!"
또 프랑스 혁명 소식을 듣고는
오히려 이렇게 비판하기도 했다.
예카테리나 2세
"계몽사상은 프랑스의 전염병이야."
예카테리나 2세
"국가질서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발상이라능."
그랬다.
그녀는 변했다.
하지만 귀족들과 타협하면서
예카테리나 여제는
내부적으로는
전제정치를 강화하고
밖으로는 대외확장을 채택하면서
꾸준히 러시아를 강하게 만들고 있어서
예카테리나 2세가 통치하던
34년동안
러시아는 오스만이 가지고있던
흑해의 출입구를 빼앗았으며
그동안 성가시게 굴던
폴란드의 영토를 독일과 나눠먹을 수 있었다.
또 영토는 태평양을 건너
북아메리카의 알라스카까지 이르게 된다.
때문에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 역사상
두번째로
'대제'의 칭호를 얻는 군주가 된다.
러시아의 공산화
● 종이 호랑이, 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가
서거한 지 얼마 후
유럽 대륙은 나폴레옹이
싹쓸이를 하게 되는데
러시아는 이때 '동(冬)장군'의 힘으로
기적처럼 나폴레옹의 군대를 물리치게 된다.
"동장군은
나폴레옹의 변명이었고.."
"실은 보급 탓이었지만.."
어쨌거나 이후로 러시아는
유럽의 강대국으로 취급받게 되는 것이 아닌가!
"헐, 러시아 넘들
생각 이상이었어!"
"그러게, 완전 의외!!"
유럽인들의
그러한 인식은
1814년, 나폴레옹 전쟁의 사후 수습을 위해
모인 빈 회의에서도 나타났다.
당시 러시아는
유럽 연합군의 맹주로 추대되었고
장차 유럽 세력의 새로운 중재자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영광은 어디까지나
껍데기에 불과했다.
당시 러시아는 농노제도의 모순을
끝내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고
다른 선진 유럽들과 달리
산업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던 상태에서
▲ 러시아의 농노
그저 '동장군'이라는 행운으로
잠시나마 강대국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종이 호랑이'의 실체는
1856년에 발발한 '크림전쟁'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크림전쟁이
발생한 배경은 이렇다.
러시아는 나폴레옹 군대를 물리친 이후
자심감으로 충만했고
오랜 숙원인 지중해로 나아가고자
흑해를 완전 장악하려고 했다.
니콜라이 1세
"지중해는 원래 로마제국의 바다였어.
이슬람 넘들한테서 뺏어와야 함."
"맞습니다."
"지금 오스만은 더 이상 유럽의 왕자가 아닙니다.
유럽의 환자입니다. ㅋㅋ"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의 도발을 가만히 지켜 볼 수가 없었고
오스만을 도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고자 했다.
나폴레옹 3세
"러시아 넘들이 유럽의 평화와 질서를
깨뜨리려고 하고 있음요."
빅토리아 여왕
"맞아요. 더 이상 두고만 볼 수 없삼."
이렇게 해서 러시아 vs 영국+프랑스의 전쟁이
흑해와 크림반도에서 시작되었는데
막상 뚜겅을 열어보니
러시아는 도저히 게임이 안됐다.
"당시 러시아 군대는 역부족이었어."
"무기의 성능에서 도저히
공업국가인 영국과 프랑스를 따라올 수 없었지."
"어떻게?"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철갑으로 된 군함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러시아가 사용한 것은
대부분 목선이었지."
"소총의 사거리도
영불 연합군은 러시아의 3배였어."
"아!"
"결국 자본주의 vs 농노제도 국가 간의
전쟁이었는데, 결과야 뻔했지."
그렇게 러시아는 크림전쟁에서
50만명의 인명을 희생하며 GG를 선언하게 된다.
● 지식인들의 고뇌
크림전쟁의 결과는 러시아인들에게
한마디로 멘붕이었다.
"아! 유럽 강국을 따라잡으려면
아직도 한참은 멀었어."
그러면서 전쟁의 패인을 놓고
이구동성 '농노제도'를 지적했다.
지식계와 상공업계는 물론
요직에 있던 관료들까지도 모두
산업화에 방해가 되는
농노제도를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다.
때문에 거대한 압력 속에
1861년 러시아는 마침내 농노제도를 폐지하게 된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또 다시 서유럽의 실체를 느끼기 위해
유학의 길에
나서게 된다.
여기에는 러시아 문학의 대부,
톨스토이도 있었다.
톨스토이
"넓은 세상에서 배우자."
하지만 그들이 간 서유럽은
예상 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빛나는 업적과 함께
그 폐해까지도 여실히 들어내고 있었던 것.
당시 유럽의 산업화는
자본주의의 초기단계에서 발생한
각종 사회적 모순을
낳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열악한 작업환경, 임금착취,
매연과 오염, 심각한 빈부격차 등등.
▲ 영국의 석탄 광부
"유럽에서 배워 오겠다던 유학생들은
하필 자본주의의 과도기 시점에 가서,"
"안 좋은 모습들만
실컷 보고 오게된 것이었지."
때문에 당시 유학생들과 지식인들은
엄청난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
톨스토이
"자본주의가 진리가 아니었음."
톨스토이
"그보다 사유재산이라는 불평등을 없애는 것이
보다 국가 발전의 옳은 길이라고 봄."
물론 서유럽을 맹목적으로
본받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서유럽처럼 러시아도
입헌군주제를 추진해야 함."
"유럽을 모델로 삼아서
하루 빨리 러시아를 근대화 시켜야 함."
하지만 사회주의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근대화는 여러가지
사회적 모순을 낳게함."
"맞아. 그보다 농촌으로 돌아가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하자능."
이런 주장들이
오가고 있었다.
● 추락하는 차르의 권위
1905년 러시아는, 차르의 권위를 실추시킨
커다란 사건이 연거푸 발생하게 된다.
먼저
1월달에 있었던 일이다.
이제 막 근대화 작업에 들어간 러시아에서는
자본주 vs 노동자 간의 갈등이 대두되고 있었다.
노동자
"최소한 최저생계비는
보장해야 할 것 아닌가!"
공장주
"쳇, 싫으면 관둬!
너희들 아니어도 일할 사람들은 넘쳐남."
그랬다. 당시 러시아는 농노 해방으로
도시와 농촌에는 실업자들이 바글바글한데
이들을 제대로 수용할만한
공장의 수는 충분하지 못했고
이를 악용해서 고용주들은
과중한 업무와 가혹한 저임금을 강요했던 것이다.
때문에 전국적으로 억울한 노동자들이
무려 14만명이나 운집하여
황제가 거처하는 궁궐로 달려와
가두시위를 하고 있었다.
"자애로우신 차르여,
우리 불쌍한 노동자를 지켜주소서"
노동자들은 한 손에는 성상을 들고
찬송가를 부르며 황제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황실의 무장한 군대가
다짜고짜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하는게 아닌가!
이게 바로 유명한
'피의 일요일' 사건이었다.
이후 러시아 민중들 사이에서
차르의 인기는 급추락하고
항간에서는 러시아를 구원하는 길은
차르부터 죽여야 한다는 말까지 서슴없이 나오게 됐다.
그리고 몇달 후 러시아는
또 다시 커다란 좌절을 맛보게 되었으니
바로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만 것이다.
그러자 무능한 차르 정권에 대한
불만은 절정에 올랐다.
"아놔, 이젠 아시아의 조그만 국가한테도
얻어터지는 수준이 된건가?"
"안에서는 무고한 백성들을 학살하고
밖으로는 동네북으로 얻어터지고.."
"대체 나라꼴이
어쩌다가 이렇게 된건지."
● 러시아 혁명 (1917)
이런 위급한 상황 속에서
니콜라이 2세는 급한 불부터 끄고자 했다.
니콜라이 2세
"알았삼. 앞으로 정치구조를 민주적으로 개혁하고
시민들에게는 기본권을 보장하겠음."
하지만
이는 말 뿐이었고,
그러던 중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전쟁이 터지자 러시아는
수백만 명의 젊은이들을 강제 징집했고
전쟁 비용을 마련하겠다며
엄청난 양의 루블화를 팡팡 찍어댔다.
"돈이란 자고로 찍어내는 만큼
정부의 공짜 이익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의 몫이지."
그러자 물가는 살인적인 수준으로 올라갔고
빵을 비롯한 생필품의 가격은이 미친듯이 뛰어올랐다.
러시아 민중들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고
이제는 모든 화살이
'차르'에게로 돌아갔다.
"모든 고통은 다 차르 때문이다!"
그렇게 민심이 틀어지자,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1917년 2월, 대대적인
시민들의 혁명이 일어나자
다급해진 니콜라이 2세는
차르 자리에서 퇴위할 수 밖에 없었다.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는 순간이었고
이어서 혁명의 세력들은
임시정부를 설립하게 된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미덥지가 못했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은
이렇게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레닌
"새 정권을 만들겠다고 모인 무리들의
꼬락성이들을 보니, 하나 같이 부르주아 출신들임."
레닌
"이들이 만약
정권을 차지하게 된다면.."
레닌
"러시아는 또 다시 차르 시대의 악습을
그대로 계승하게 될 뿐임."
그렇게 레닌은 노동자들에게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주의로 가야 한다고 선동했고
결국 이런 설득이 먹혀들어
10월달에 또 다시 혁명이 일어났으니
이들은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새롭게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른다.
다만 소비에트가
완성되기 까지는 조금 더 진통이 있었다.
공산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이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의 원조를 받으며
극력 저항을 하고 있었으니
이때 발생한 전쟁이 바로 ☞적백내전(1917~1922)이었다.
"적백이라니 무슨 뜻이야?"
"쉽게말해
적군(소비에트) vs 백군(반 공산주의, 황제파)의 내전."
하지만 이 전쟁에서
서구의 국가들은 제대로 도와주질 못했다.
"아놔, 이젠 전쟁이라면
지긋지긋해."
또 러시아 민중들은
소비에트 정권을 적극 지지했기 때문에
결국 러시아는 공산화에 성공하게 되어
소련을 건국하기에 이른다. (1922년)
이로써 한낱
이상과도 같았던,
'맑스주의'를 몸소 실천하려는 나라가
인류 최초로 생겨나게 된 것이었다.
초 강대국으로의 발전
● 레닌의 타협책 : 신경제정책
한 러시아의 여성 공산주의자는
맑스에게 편지로 이런 질문을 했다.
"당신이 제시한 공산주의라는 것이
러시아에서도 실현될 수 있을까염요?"
이에 맑스는
이렇게 답했다.
칼 맑스
"그건 좀 어렵삼.
공산주의는 우선 서유럽에서 실현되어야 함돠."
하지만 자본주의가 팽배한 서유럽에서는
끝내 공산주의는 실현되지 않았고
아이러니하게도, 가난한 농업국가
러시아에서는 공산주의가 실현됐다.
"이건 마치 이성친구를 사귀면
데이트 비용이 깨지고, 개인시간이 없어지니.."
"솔로로 사는게 좋다고
누군가 주장했더니,"
"평생 이성친구 한번 사귀지 못한
친구가 그 말에 훅해서.."
"스스로 솔로부대를
자청하는 꼴과도 같았지."
그랬다. 러시아의 공산주의는
태생적으로 모순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련을 건국하고
초대 서기장이 된 레닌은
소련을 이상적인 공산국가로 만들기 위해
과감한 실험을 감행한다.
레닌
"모든 토지와 산업단지는
앞으로 국유화!"
레닌
"먹고 남은 잉여 생산물은
모두 정부에 납부하도록!"
그러나 농민들은
크게 불만을 터뜨렸고
"뭐야? 공산주의라는게 원래 이런거였어?
왜 남의 물건을 함부로 빼앗아가려고 함?"
구미 선진국들은
공산 혁명이 전세계로 퍼질까 두려워
소련의 경제를
철저히 봉쇄하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자연재해까지 발생했으니
1921년에만 무려 3천만명이나 되는 국민들이
기아에 허덕이게 된다.
레닌
"아놔.."
결국 1921년 3월 레닌은
경제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이른바 '신경제정책'을
발표해야만 했다.
레닌
"시장 인정해줄게.
상업도 인정해주고, 소기업 정도는 인정해줄게."
레닌
"은행도 만들어줄게."
공산혁명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부적 모순을 깨달은 레닌은
시장경제의 일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스탈린의 집권과 산업화의 당면 과제
1922년
레닌의 뒤를 이어
소련의 2대 서기장으로 임명된 인물은
바로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집권과 동시에
강력한 정책으로 산업화에 박차를 가했다.
스탈린
"우리는 서유럽에 비해
무려 50년이나 뒤쳐져 있음."
스탈린
"이 엄청난 격차를
10년 내로 모두 따라잡아야 한다능!"
하지만 산업화를 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한데
당시 서방 세계는 소련의 경제를
원천 봉쇄하고 있어서
마땅히 자금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국내 자본에서 긁어올 수 밖에 없었고
그 중에서도 만만한건 농업 소득이었다.
▲ 1920년대 러시아 농촌 : 특이하게 낙타로 쟁기질을 하고있다.
"쉽게 말해 스탈린은 산업화 자본을
농촌에서 긁어오려고 했던거야."
"어떻게?"
"공산품의 가격을
적정가격보다 높게 잡는거야."
"그러면?"
"농민들이 물건을 살 때
높은 가격으로 사야하니깐,"
"이런 방법을 통해
어느 정도 자금을 축적할 수가 있게 되지."
"결국 농민을 수탈해서
자금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네."
하지만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더욱이 당시 영국의 외무장관 체임벌린은
세계 외무장관이 모인 가운데서
소련을 국제적인 왕따로 만들려고
대대적으로 선동하고 있었다.
"순진한 노동자들이 공산주의에 세뇌되면
자본주의 경제는 와르르~ 무너지고 맙니다."
때문에 스탈린의 정책은
생존의 자구책이었고,
농민들은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경제 성장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비록 대대적인
산업화 작업이 착수됐지만
1928년 소련의 공업생산 총액은
독일의 절반, 미국의 1/8에도 못미쳤던 것이다.
특히 전국적으로 트렉터가
3만대도 되지 않아서
경작의 99%를
가축과 인력에 의지해야만 했다.
때문에 스탈린은
좀 더 과감한 정책이 필요했다.
스탈린
"아놔, 이래 가지고는 안 되겠어."
스탈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모든 아이디어를 짜내라능."
● 스탈린의 계획경제
오늘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정부주도형 계획경제'의 아이콘으로 불릴 정도다.
그런데 이걸 최초로 도입한 인물은
바로 스탈린이었다.
그는 1929년 5월,
최초로 경제개발 1차 계획를 선포하게 된다.
계획 달성을 위해 러시아인들은
모든 능력을 쥐어짜냈고, 창의력을 동원했다.
스탈린
"앞으로 모든 경제 활동은
국가에서 면밀히 통제하겠음."
스탈린
"생산, 운송, 소비, 가격까지도
모두 다 면밀히 통제하겠음."
그러더니 '집단 생산 체제' 형태로
소련을 마치 거대한 하나의 공장처럼 조직했다.
예전에는 단순하게만 생각했던 일도
이제는 조직 전체를 위한 유의미한 일로 재해석됐다.
그러자 사람들은 새로운 체제에
흥미를 느끼고, 의욕이 생기고, 보람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하하. 집단동원이라는 게
원래 처음에는 다 그래."
그런데 그때 마침 서방의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경제위기가 닥치게 된다.
바로 '경제 대공황'이었다.
사태는 심각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 구미 선진국이 입은 손실은
1,700억 달러였지만.."
"1929년부터 1933년까지 대공황을 통해서
입은 손실은 2,500억 달러에 달했다지."
"헐!"
이런 위기는
전세계인들을 경악시켰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폐단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독자노선을 걷고 있던 소련만은
전혀 예외였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하에
뜻밖에도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때부터 서방의 선진국들은
소련의 성장을 예의주시하게 되었다.
"헐! 남들은 다 지쳐서 쓰러져 버렸는데
저넘들만 신나게 달리고 있어."
"맑스가 말했잖아.
자본주의가 크게 흔들리면 공산주의로 가게 된다고.
"어쩌면 그런 단계를
쟤네들이 먼저 밟고있는게 아닌가 몰라."
심지어 당시에는
미국을 떠나 소련에서 살겠다며
10만명의 미국인들이
소련으로 이주를 신청하기도 했고
▲ 1930년대 미국의 비자 발급처
이에 대해서
스탈린도 개방적이었다.
스탈린
"소련의 발전을 위해
해외 자본과 기술자들이 오는 것은 완전 환영이야!"
이때 유명한 인물이
미국인 아먼드 해머였다.
그는 대규모 의료설비를 들고
소련을 방문했고
이후 미국과 소련의 경제교류에 있어
중추적인 가교 역할을 맡게된다.
그는 자동차 왕 헨리포드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아먼드 해머
"왜 소련에는 자동차를 팔지 않음?"
헨리 포드
"빨갱이 돈은 필요없어.
나사 한 개도 주기 싫거든."
아먼드 해머
"아놔, 포드 선생.
소련은 아주 거대한 시장임."
아먼드 해머
"그런 꽉 막힌 사고로 있다가는
그 큰 시장을 다른 사람한테 빼앗길 수도 있다고."
결국 포드는 이 말에 흔들려서,
소련에 자동차 합자기업을 설치하게 되었고
▲ 가즈 자동차
1932년부터 가즈(Gaz) 브랜드를 단 승용차와 트럭이
매년 10만대가 출고되어 소련의 도로를 질주하게 되었다.
그렇게 소련은 세계 도처의
자본과 기술자들을 끌어들이면서
전세계가 경제공황으로 힘들어 하는 시기에
나홀로 급속하게 발전하게 된 것이었다.
심지어 스탈린은 미국의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스탈린
"지금 소련 공장의 1/3은
바로 미국의 기술을 이용해 만든 것임요."
이렇게 해서 1930년대 소련은
한해 평균 12%라는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룩하게 되었고
1937년에는 GDP와 공업생산 총액에 있어서
유럽 1위, 세계 2위로 도약하게 된다.
"헐, 보통 스탈린하면
악명높은 독재자로만 인식되는데, 의외로 굉장하잖아!"
"양면성을 가진 독재자였지."
● 스탈린 경제의 모순
1930년대가 되면 전세계는 모두
소련의 폭발적인 경제성장에 주목하게 된다.
'계획(plan)'이라는 단어는
순식간에 최첨단을 뜻하는 명사가 되어버렸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공황을 물리쳐낸 것도,"
"실은 뉴딜정책이라는
계획경제에 있었으니깐."
"아!"
하지만 성공의 영광 뒤에는
여러 문제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스탈린은 중공업과
군수공업 위주로만 발전시켜서,"
"경공업이나 농업 분야는
발달이 상대적으로 미진했지."
"그러고 보니, 공산국가들은
대부분 생필품이 발달하지 못했더군."
"또 국민생활은
여전히 궁핍해서.."
"1인당 평균 곡물·육류 소비량은
차르시대보다도 낮았다고 하지."
"헐! 완전히 기형적인 성장이었네."
하지만 당시 소련은
엄격한 통제 사회였기 때문에
행여 불만을 표현했다가는
어느날 쥐도 새도 모르게
저 멀리, 시베리아의 수용소로
끌려가는 수가 있었다.
▲ 시베리아 수용소 (굴락)
그보다 당시 소련은
새로운 전쟁의 위험 속에 직면해 있었다.
1930년대 독일, 일본, 이탈리아 같은 나라들은
경제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파시즘이라는
전체주의 정권을 수립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언제든지 소련의 강력한 적대세력이
될 수 있는 상대들이었기 때문이다.
● 2차 세계대전의 승리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이 소련을 공격했다.
당시 소련군은 1주일 동안
무려 100만명 이상의 손실을 입었고
서부의 공업지역을 몽땅 다 잃게 된다.
히틀러는 크게 흡족했다.
히틀러
"우크라이나의 밀밭, 카프카스의 석유는
이제 곧 우리들 차지."
하지만 히틀러의 미소는 곧 사라지고 만다.
소련의 반격이 곧 시작된 것이다.
"우라~~"
인민 웨이브가 물결쳤다.
독일은 막고 또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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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끝이 없었다.
히틀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히틀러
"아놔, 어떻게 소련넘들은
갈수록 강해질 수 있는거지? 이게 말이 됨?"
히틀러
"혹시 치트키라도 쳤나?"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스탈린이 그간 경제개발을 통해
만들어 놓았던 공장들이, 영토 곳곳에 즐비했거든."
"어떻게?"
"우랄산맥에서는 철강 콤비나트가 있었고
스탈린그라드 같은 곳에서는 트랙터 공장이 있었지."
"참고로 트랙터 공장은
전시에는 바로 탱크 공장으로 변환됨."
"아!"
실제로 소련은 도처에 널린 공장에서
24시간 교대 근무를 하면서 기계를 돌렸다.
가장 힘든 시기였던
1942년에도
소련의 비행기 생산량은 2만대를 넘어서
독일군의 2배에 달할 정도였다.
심지어 격렬한 전투가 이뤄질 때는
트랙터 공장의 노동자들이
막 제조된 탱크를
직접 몰고나와 싸울 정도였다.
결국 엄청난 생산 능력과 물량빨에서
독일군은 상대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45년 5월 1일 소련은
세계대전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된다.
비록 스탈린의 경제성장이 민생을 생각하지 않는
반쪽짜리 성장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라도 성장을 했으니
2차 대전 중 소련은,
전무후무한
물량 공세를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초강대국으로의 성장, 그리고 몰락
2차대전으로 소련은 2,700만명이라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감수해야 했지만
그런 희생이 있었기에,
전후 미국과 더불어 양강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또 어마어마한 공업생산력과
군사력에 힘입어
동유럽 일대를
자신들의 위성국가들로 만들어 버렸고
핵개발, 우주개발에 있어
연거푸 미국과 치열한 대결을 펼치게 됐다.
그러면서 곧잘
미국에 앞서 나가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1957년
최초의 인공위성을 띄우게 되고
1961년에는
최초로 우주비행에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소련의 영광은 길지 않았다.
내부적으로 수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었고
시간이 갈수록
모순은 증폭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라는 자체가 인위적인데
문제가 없었으면 이상한거지."
"어떤게 있었는데?"
"정치권은 관료주의와 부정부패에 물들었고
국민들은 타성에 빠져서 극도로 게을러졌지."
"당시 서방 국가들은 소련을 두고,"
"최고로 비효율적이며 썩어빠진 정권이라고
조롱할 정도였어."
▲ 진창길에서 차를 버리고 마차를 타고다니던 소련 시민들
"아!"
게다가 소련은 중화학공업과
군수공업에만 치중할 뿐이어서
일반 국민들은 빈곤한 생활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쌓인
모순들로 인해
1985년 소련은 스스로,
국제 사회에 개방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고르바초프
"소련 체제가 그동안 문제가 많았음."
고르바초프
"우리도 슬슬
서구의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려고 함."
하지만 그런 와중에
1986년 체르노빌 원전이 폭발하자
소련의 경제는 거의
회생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고 말았고
결국 1991년
소련은 붕괴되고 만다.
74년간의 인류의 실험이
막을 내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해체되는 순간까지
소련은 대단한 나라였어."
"어느 정도였는데?"
"그때까지도 GDP에 있어서는
미국에 이어 2위였고.." ☞ 참고
"1990년 1인당 소득도
거의 우리나라의 2배는 됐거든." ☞ 참고
"의외네. 1990년이라면
우리나라도 어느 정도 살았을 때인데."
"심지어 아직까지도 러시아는
소련시절의 경제력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말까지도 있음."
"아!"
"특히 평균 수명은 여전히 소련시절
수준에도 못미치고 있지."
▲ 평균수명 : 1960년대 러시아는 우리나라보다 평균수명이 17세 더 많았지만
현재는 우리나라가 13세 더 많다.
참고 문헌 : 러시아 역사 다이제스트 (이무열), 강대국의 조건 (중국 CC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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