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변화로 보는 인류의 역사
● 1만 년 전 신석기 시대가 시작된 이유
1만 년 전의 지구는
오늘날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해수면의 높이는
지금보다 120m 더 낮았고
▲ 북미 대륙에 살았던 낙타
평균 기온은 현재보다
5도 정도 더 낮았으며
지구의 30%가
얼음덩어리로 이루어졌었다. ☞ 참고
▲ 1만년 전 빙하의 분포 (하얀색)
"한반도에 매머드가 살았고.."
"한중일 3국이 모두
육지로 연결됐던 시절이었음."
하지만 이때부터 갑자기
지구의 기온이 오르기 시작한다.
기온이 올라가면
어떤 변화가 나타날까?
지구의 평균 기온이 1~2도 정도 변하는 게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지 몰라도
기온이 상승하면
빙하가 녹기 시작하고
바닷물의 증발이
증가하게 되어
비구름이 많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곳곳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눈으로 뒤덮였던 곳이
곧 숲과 초원으로 바뀌게 된다.
하지만 환경이 변하게 되면
적응하지 못한 생물들이 도태하기 마련인데,
이때 들소, 매머드 같은
대형동물들은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대부분 사라지고 만다.
때문에 이들을 주로
사냥해먹고 살던 구석기인들은
이제는 작은 짐승이나 물고기를
사냥하지 않으면 안 됐고
▲ 이때부터 활이 등장하게 된다
사냥감이
부족해진 만큼
뿌리, 열매, 곡식 등의
식물을 채집하지 않으면 안 됐다.
▲ 열매와 덩이줄기
또 작은 동물을 잡기 위해
석기를 보다 정교하게 만들어야 했으니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광산이 개발되어
인류 최초로
광업이 나타나게 되었고,
곡식을 익혀 먹기 위해
그릇이 필요했으니
이때부터 흙을 구워만든
토기가 제작되게 된다.
또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동굴의 시대도 끝이 나고
사람들은 강가나 바닷가로 모여
움막을 짓고 살게 된다.
"이때부터 라스코 동굴벽화와 같은 그림은
더 이상 그려지지 않게 된다능."
사람들은 점차
안정적인 먹거리를 원하게 되었고
채집과 사냥보다는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정착생활'이라는
신석기 시대가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왜 하필 1만 년 전부터
신석기 시대가 시작됐냐고?"
"그때부터 지구의 온도가
따뜻해졌기 때문임."
신석기 시대가 시작된 이후
농업 생산량이 늘면서 인구가 폭증하기 시작했다.
구석기 시대까지 인류의 전체 인구는
600만 명 정도였지만,
농업이 궤도에 오르면서
전 세계 인구는 1억 명을 넘어서게 된 것이다.
"대신 인류는
잃어버린 것도 있음."
"그게 뭔데?"
"사냥을 포기하고 곡물 위주의 식사를 하면서
인류의 평균 신장은 크게 줄어들게 된다능." ☞ 참고
● 5천 년 전 문명이 시작된 이유
인류가 정착 생활을 하게 되면서
마을이 생겨나고
마을과 마을을 사이에는
교역이 발생하게 되었다.
또 기술의 발전으로
마을에서는 1~2명 정도는
일을 안 해도 부양할 수 있을 만큼
'잉여생산물'이 발생했기 때문에
차츰 무위도식을 노리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었고
합법적으로 공짜 이익을 취하기 위해
마을에서는 권력자가 나타나게 된다.
"내가 제일 힘이 세니
이제부터 모두 내 말을 따르라!"
그렇게 권력자가 나타나자
곧 탐욕이 생겨나게 되었고
마을과 마을의 관계는
점차 전쟁과 약탈로 점화되게 되었으니,
그런 과정을 거쳐
강한 마을이 약한 마을을 집어삼키면서
마을의 규모는 점점 커져
도시국가로 발전하게 되었고
도시국가에서는 제사장·정치인·농민·노예라는
계급질서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런데 도시국가가
출현하던 시기와 발맞추어
기원전 3000년 무렵부터
지구의 기온은 다시 추워지기 시작했다.
기온이 내려가면
바다에서 증발량이 줄어
강수량이 줄어들게 되니,
자연스레 기후가 건조하게 된다.
이 시기 아프리카 북부에서는
숲과 나무가 사라져
거대한 사하라 사막이
북아프리카 대부분을 뒤덮게 되었고
동아시아에서는
몽골 초원과 고비사막이 만들어졌다.
때문에 이들 지역에 살던
농부와 목동들은
자신들의 재산과 가축을 싸 들고
큰 강 유역으로 피신해 와야만 했다.
"그렇게 사람들이 몰린 곳이
바로 오늘날 4대 문명이 발생한 곳이었음."
하지만 세상에 공짜란 없다.
물이 귀해진 시절에는 더욱 그러했으니,
이때 4대강 유역의 도시국가들은
텃새를 부리며
이주한 사람들을
노예로 삼아
집약적인 관개농업과
대규모 건축공사를 하게 된 것이다.
고로 5천 년 전의
4대강 유역은,
물이 넘치는 곳이 아니라
사람이 넘쳐나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왕권을 강화하여
중앙집권 체제가 탄생하게 되었고,
세금을 거두기 시작했고
형벌을 내리기 시작했으며
통치 활동을 기록하기 위해
새롭게 문자가 만들어졌다.
또 석기만으로는
늘어난 인구를 부양하기 어려워
대량 생산이 가능하고
다양한 형태를 만들 수 있는
'금속'이 만들어져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인류는
문명 단계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고로 지구의 날씨가 따뜻해져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다면
다시 지구의 날씨가 추워져서
문명(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 3천 년 전 철기시대가 시작된 이유
문명이 시작된 이후
차츰 지구의 기온은 다시 온난 습윤해졌다.
덕분에 유럽 문명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미케네 문명이
그리스에서 크게 흥하게 된다.
당시 그리스 본토에서는
'폴리스'라는 도시 국가들이 등장하였는데,
폴리스들은 저마다
거대한 궁전과 신전을 축성했고
▲ 당시 궁전의 벽화
견고한 성벽과 성문으로
자신들의 문명을 방어했는가 하면
황금 가면과 청동기,
기하학적인 도자기 등을 만드는 등
찬란한 문명을
꽃피워 나갔다.
하지만 기원전 1400년 무렵
지구의 기후는 다시 추워지기 시작했다.
이때 이집트와 중동의 문명은
흉년으로 몸살을 앓기 시작했고,
그리스의 폴리스 역시
큰 가뭄에 시달리게 된다.
곡식이 바닥나고
혹독한 기근이 찾아왔기 때문에
굶주린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키게 되었고
결국 미케네 문명은
멸망하고 만다.
반면에 이러한 격변기에
오히려 크게 세력을 떨치던 민족이 있었다.
바로 오늘날 터키 지방에서
발원한 히타이트족이 그러했다.
이들에게는 바로
'철기'라는 신무기가 있었기 때문에
강력한 철제 무기를 통해
이웃 국가들을 약탈할 수 있었던 탓이다.
"싹 다 내놓으라능!"
그렇게 시작된 철기시대는
곧 정복의 시대와도 같았다.
흉년으로 인한
생산의 감소쯤은
정복으로 인한 약탈의 이득으로
충분히 메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 히타이트의 전차
게다가 철제 농기구를 통해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농업 생산량이 급격히 증가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철기시대 이후,
기후가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성은 더욱 증대되기 시작했다.
"왜 철제 농기구로 농사를 지으면
생산성이 증가하는 건데?"
"철제 농기구는
땅을 깊게 팔 수 있었기 때문에.."
"지력이 소모된 땅을
새로운 흙으로 보다 쉽게 덮어줄 수 있거든."
때문에 철기시대가 시작된 이후
세계 곳곳에서는
새로운 왕국들이
속속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리스에서도 그랬다.
미케네인들 물러간 곳을
기원전 800년 무렵부터
철기를 사용하는
도리아인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아테네, 스파르타 등의
도시국가들이 출현하게 되는 거임."
● 2천 년 전 로마와 한나라가 번영했던 이유
로마 문명이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된 것은
기원전 200년 무렵
지중해의 패권국이었던,
오리엔트 문명의 카르타고를 물리친
포에니 전쟁에서였다.
때마침 지구의 기후는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 코끼리를 타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로 쳐들어왔던 카르타고 군
"오! 타이밍이 지대로!"
이후 로마제국의 번영기는
지구가 따뜻했던,
BC 200년부터 AD 200년까지의
약 400년 기간 동안과 정확히 일치한다.
▲ 로마제국의 최대 영역 : 추정 인구 5,700만 명 ☞ 참고
이 시기 온난하고
습윤한 기후로 인해
로마의 식민지였던
그리스와 이집트의 토양이 비옥해졌기 때문에
이들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헐값으로 로마로 대거 수입되어
로마시는
시민들에게
무료로 빵을 배급할 정도로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 무료 빵 배급
또 포도 농사가 급속히 확산되어
독일과 영국까지 포도가 재배되어
당시 로마인들은
석회질이 많은 유럽의 물대신
도수를 약하게 한 포도주를
매일 2리터씩 섭취했을 정도로 호사를 누리게 된다.
중국에서도
이런 풍요는 마찬가지여서
지구가 따뜻해질 무렵,
중국 최초로 통일 제국이 세워지더니
▲ 진시황의 병마용갱
이후의 한나라는
로마제국에 버금가는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고
그 기간도 로마와 똑같은
BC 200년에서 AD 200년까지였다.
▲ AD 1세기 추정인구 : 5,800만 명 ☞ 참고
습윤했던 기후로
중앙아시아까지 초원이 대거 형성되었던 탓에
당시 중국은 서역까지
영역을 확대하고 있었다.
"고로 기후가 따뜻해지면
농경국가들이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능."
그리고 초원의 길(비단길)을 따라
도시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덕분에 낙타 대상을 이용한
로마-인도-중국로 이어지는 국제 교역로가 생겨
국제적 교류가 활발하게 발생해서
문명은 더욱 빠르게 번영할 수 있었다.
"이것은 로마의 유리!"
"이것은 중국의 비단!"
AD 200년 이후 지구가 추워지자
초원길이 메말라
교역로가 폐쇄되었던 점을
상기하자면
당시 로마와 한나라는
참으로 운이 좋았던 것이다.
어쨌든 유라시아 대륙에 양 끝에서
한나라와 로마가
동시에 전성기를 맞이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 1500년 전 이민족이 습격한 이유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AD 300년 이후 지구의 기후는
급격히 추워지기 시작했다.
추운 날씨로 인해
작물의 생장 기간이 짧아져 수확량이 줄어들고
강우량도 줄어들고,
작물 재배 한계선이 내려가게 되어
농경 민족들의 영토는
추운 북부지방을 필두로
대거 황무지로
바뀌게 되었다.
당시 로마 제국에서는 더 이상 영국과 독일에서
포도를 수확할 수 없었고
제국의 식량 창고와도 같았던
이집트가 가뭄에 시달렸던 바람에
로마에서는 식량난이 불거져
굶주린 사람들이 봉기를 하는가 하면,
이방인을 추방하여 입을 줄임으로써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었다.
한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파의 영향으로 중원 대륙은
가뭄과 냉해로 큰 피해를 입었고
양쯔강이 얼어붙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고
황건적이 난립하는가 하면
여기저기서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럴 때 더욱 힘들었던 것은
농경민족의 북방에 거주하고 있던 이민족이었다.
▲ 게르만과 흉노 : 농경민족이 북쪽의 야만인들을 통칭하여 불렀던 명칭이다.
이들은 기후변화로
목초지를 잃고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유목민들은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이런 시기에 유목민들은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며
이판사판으로
농경민족 마을을 약탈하게 된다.
평소 말을 타고 사냥을 하던
유목민들의 전투력은
쟁기질에 낫질이나 하던
농경민족과는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뜨아!"
결국 중국에서는
화북지방 전체가
유목민족에게 점령당해
이른바 '정복왕조'가 세워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5호 16국 시대의 시작이었다.
"5호라는 것은 5개의 오랑캐 부족을 뜻하는데,
3개의 몽골 부족과 2개의 티벳 부족이 있었다능."
유럽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비슷한 시기에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이던
훈족이 동유럽을 침략하게 되었으니, ☞ 참고
동유럽에 살고 있던 게르만족들은
졸지에 유럽의 서쪽으로 쫓겨나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로마 국경선
내부로 들어온 게르만족들은
한강에서 뺨 맞고
명동에서 화풀이하듯이
이왕에 쳐들어온 것,
로마제국을 신나게 약탈하기 시작했다.
▲ 게르만족의 침입
때마침 로마는 기후 변화로 인한
극심한 경제침체로 힘들어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약한 서로마는
훈족에게 쫓겨난 게르만족들에게 멸망하고 만다.
'문명충돌론'의 저자
헌팅턴은 이렇게 말한다.
헌팅턴
"아시아 유목민들이 살던
중앙아시아의 목초지가 말라 버린 것이.."
헌팅턴
"훈족의 이동과 게르만족의 이동을 가져왔고
결국 로마가 멸망하게 된 것이다."
● 혼합문화와 국가종교의 탄생
농경민족의 외곽에 살던 이민족들은
평소 농경민족의 선진문화와 경제적 풍요를 동경해왔다.
때문에 로마를 무너뜨린 게르만족들은
스스로 '워너비 로마인'이 되어
빠르게 자신들의 문화를
로마화시키고자 했었다.
"이제부터
우리도 로마인이라고!"
이는 중국의 화북지방을 점령한
유목민들도 마찬가지여서
스스로 중국인이 되고자 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유목민이었다는 흔적도 없이
거대한 한족 속으로
완벽히 동화되어버리고 말았다.
▲ 화북지방의 지배층이었던 선비족(몽골계) 귀족들 : 6세기 회화
"수·당나라를 세운 이들은
원래는 북방 유목민의 후손이었지만,"
"이들에게서 유목민의 흔적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능."
그렇더라도 두 개의 문명이 결합되어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게 되었으니,
유럽에서는 지중해를 배경으로
노예제를 기본으로 하던 고대시대가 막을 내리고
서유럽을 배경으로
봉건제도를 기본으로 한
중세시대가
새롭게 시작되게 된다.
중국에서도 유목민족의 문화가 대거 유입되어
호한(胡漢)문화로 거듭나게 되어
중국의 문화는 한층 더
풍요롭고 다채롭게 변모하게 된다.
"중국인들이 긴 바지를 입기 시작하고
의자에 앉는 입식 문화가 생겨나고.."
▲ 6세기 화북지방의 귀족 모습과 '호상'이라는 접이식 의자
"물레방아를 사용하고.."
"만두와 국수를 먹고
치즈를 흉내 낸 두부를 만들어 먹는 것은,"
"모두 유목민족의 문화가
침투한 결과라능."
이 무렵 유럽과 중국에서
말을 탈 때 '등자'를 이용하게 된 것도
유목민(흉노족, 훈족 등)에 의해
전파된 문화적 산물이었다.
▲ 6세기경 등자
한편 이 시기 유럽과 중국에서는
'국가 종교'가 크게 득세하게 되는데,
춥고 건조한 날씨로
흉작과 기근이 가속화되었던 시기인 만큼
대중들에게 내세 지향적인 가치관을 심어줘서
현실 비판을 완화시키게 되면
그만큼 지배층이 통치하기가
수월했기 때문이다.
"현실이 시궁창이라도 참고 인내하라능!
그래야 천당에 갈 수 있고 극락왕생할 수 있다능!"
그로 인해 유럽에서는
기독교가 막강한 힘을 얻게 되었고
중국에서도 이민족 왕조를 중심으로
불교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급되게 된다.
▲ 당시 만들어진 운강석굴
한국과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후 변화로 민중들의 삶이 어려워지고
사회적 불만이 커졌던 시기이기에
5세기~7세기 경 한반도와 일본에서는
사회불안을 조절하는 기능으로
불교가 국가적인 노력으로
민중들에게 널리 보급되었던 것이다.
"결국 1500년 전 동서양에서 종교가
국가적인 정책으로 보급되었던 배경에는.."
"기후 변화로 경제가 침체하고,
사회적으로 불만이 팽배했기 때문에.."
"이를 조절하는 차원에서
종교가 이용되었던 점도 있음."
중세 온난기와 근대 소빙기
● 팍스 로마나·팍스 시니카의 부활
게르만족이 차지한 서유럽의 상황은
한동안 좋지 못했다. ☞ 참고
추운 날씨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초원에 남아있던 유목민족이
또다시 동유럽의 영토를 침략했다.
AD 500년 경 아바르족과
AD 600년 경 마자르족이 침략하자
이번에는 슬라브족이
고향으로 버리고
유럽의 영토로
야금야금 기어들어오기 시작했다. ☞ 참고
"덕분에 원래 러시아·우크라이나 평원에 살던
슬라브 족들이.."
"오늘날 폴란드, 체코, 발칸반도 등지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능."
하지만 중부 유럽으로 유입된 슬라브족들은
크게 위협적인 세력은 되지 못했고,
슬라브(slavs)란 말처럼
노예(slave)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까닭에 노예의 어원이
슬라브족에서 나왔다는 주장도 있음."
이후 지구의 날씨가
다시 따뜻해지기 시작한 것은 AD 700년 경의 일이었다.
이때부터 유목민족의 침입은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고
다시 농경민족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였으니
게르만족이 세운 프랑크 왕국은
전성기를 구가하여
이베리아 반도에서 침입한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며
기독교와 서유럽 세계를
수호하게 되었고
그에대한 보답으로
로마의 교황이 직접,
프랑크왕국의 왕에게
서로마 제국의 황제관을 씌워주었으니
따뜻해진 날씨와 궤를 같이하여
로마제국의 영광이 부활되게 된 것이다.
"팍스 로마나의 부활!"
이는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8세기 무렵 당나라는
다시 예전 한나라의 위용을 되찾으며
서역을 넘어 중앙아시아로까지
영역을 확대했고
수도 장안에는
동로마·이슬람·인도 상인이 왕래를 할 정도로
▲ 각국의 공양 사신단
국제적이고 개방적인 면모로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 8세기 당나라 여인들
"팍스 시니카의 부활!"
● 풍요로운 중세
중세시대의 절정은
AD 1000년부터 1300년까지의 300년 동안으로
이때를 특히
'중세 온난기'라고도 부른다.
오늘날보다 평균 2도 정도
더 따뜻했던 당시에는
유럽의 알프스 산맥에는
수목 한계가 오늘날에 비해 150m 상승하여
산지의 농사 한계선이
200m 가까이 더 높아졌고
빙하가 녹고 강수량이 많아져
하천 수량이 크게 늘어나,
당시 만들어진 하천 다리는 생뚱맞게도
오늘날보다 훨씬 높은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반면에 늘어난 물로 영국의 저지대는
섬이 되어 장기간 고립되기도 했고
네덜란드의 저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해수면의 상승으로
제방을 쌓고
풍차를 설치해야만 했었다.
또 사하라 사막에서는
다시 소가 사육되기 시작했고
중간에 많은
우물들이 만들어져
사막 한가운데 '말리왕국'이라는
전설의 나라가 세워지기도 했었다.
▲ 말리왕국의 젠느 대사원
또 온난 습윤해진 기후로
유럽에서는 농업혁명이 일어나게 되어
영국과 독일에서는
다시 포도농사가 가능해졌고
가축을 이용한
바퀴 달린 쟁기가 도입됨으로써
땅을 깊게 파 지력을 회복시켜
생산력을 늘려 주게 되었으니,
로마시대의 2포제가
3포제로 발전되어
매년 휴경지로 1/2을 놀리던 것을
1/3로 줄이게 되었다.
또 수력이나 풍력을 이용하여
곡물을 도정함으로써
노동력을 크게
절감시킬 수도 있었다.
덕분에 이 시기
유럽의 인구는
3천만 명에서 7천 300만 명으로
약 2~3배 가까이 증가하게 된다.
이러한 농업 생산력의 성장은
중국에서는 더욱 극적이었다.
유럽에서 3포제를 자랑하고 있을 때
중국에서는 무려 1년 이모작을 할 수 있는
모내기법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송나라의 경제력은
전 세계 GDP의 40%를 차지할 정도로
막대해지는 것이다. ☞ 참고
▲ 항저우
당시 중국은
수력이나 풍력은 물론
▲ 물레방아를 이용한 풀무질
석탄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게 되었고
도시 곳곳으로 인공 운하가 뚫려
효율적인 교통망을 구축하게 된다.
또 세계 최초로
지폐가 사용되었고
▲ 송나라 지폐
오늘날 주식회사의
전단계라 할 수 있는
익명조합이 탄생하는 등
상업경제가 크게 발전하게 된다.
▲ 차를 파는 송대 상인
흔히 중세시대를
암흑기라고 칭하는데,
경제적인 성과로 볼 때
결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유럽의 중세시대에, 하늘을 찌를 듯한
고딕 성당이 많이 지어졌던 이유도
따지고 보면 교회나 영주가
납세자로부터 세금이나 십일조를 많이 거둘 수 있어
재정적으로 풍요로웠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 바이킹의 전성기
온난기에 유럽은
영토 확장에 열을 올렸다.
생산의 증가와 인구의 증가로
자신감이 커지자
십자군 원정에 나서
예루살렘을 탈환하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인구 과밀을 해소하기 위해
십자군 원정에 뛰어들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이는 유럽의 북쪽에 살고 있던
바이킹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본래
농경과 목축을 하던 민족으로
온난화로 수확이 증가하고
인구가 증가했기 때문에
인구 과밀을 해소하고자 하는 욕구가
이 시기 강하게 일어나게 된다.
▲ 바이킹의 촌락
때마침 북쪽의 바다에서는
유빙이 사라지게 되면서
새롭게 바닷길이
열리게 되어
바이킹들은 아이슬란드(874년)와
그린란드(999년)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고
일부는 북미 대륙까지
건너가게 되었다.
당시 바이킹이 그린란드를 거쳐
북미 대륙까지 갔던 일화는 이렇다.
아이슬란드의 농부 에리크는 살인 혐의로
3년간 국외로 추방 당하게 되는데,
이때 그는
새로운 땅을 찾아
북극해류에 운명을 맡기며
서쪽으로 항해를 하게 되었고
다행히도 육지를
발견하게 되어
그곳에서 집을 짓고 가축을 기르면서
3년간을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3년 뒤 본국으로 돌아온 에리크는
자신이 살았던 땅을 '그린란드'라고 명명하면서
나무와 숲이 우거진
풍요로운 땅이라고 구라를 쳤다.
에리크
"완전히 그린란드였다니깐."
"정말이야?"
에리크
"정말이라니깐.
어때? 나를 따라서 그린란드로 가볼 생각 없음?"
"와! 대박!"
그렇더라도 당시
그린란드의 남쪽 해안에는
농사를 지을 수도 있었고
목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초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 당시의 교회 흔적
어쨌든 에리크에 말에 속아
바이킹들은 새 땅을 찾아 이주하게 되고
그린란드에 정착한 바이킹들은
마을을 건설하고 교회와 성당을 짓고
농작물을 재배하고
가축도 키우면서
노르웨이 본토와는 꾸준히 무역을 하면서
성장을 하게 되었으니,
한때 이곳의 주민은
최대 5천 명에 이르렀다.
물론 에리크의 말처럼
'풍부한 숲과 풀'이 있는 땅은 아니었지만,
인구 과밀에 시달렸던 바이킹들에게는
나름 기회의 땅이었던 것이다.
다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걱정거리는 목재의 수급이었다.
풀이 자라기는 하지만
나무까지는 자랄 수 없는 땅이라서
이들은 목재를 구하기 위해서
멀리 북미 대륙까지 찾아가야 했었다.
당시 그들이 제작했던 지도를 보면
노력한 흔적을 역력히 읽을 수 있는데,
그린란드의 모습이
거의 실제 모습과 닮아있어 놀랍다.
섬의 북쪽 해안까지 바이킹들은
모두 탐사를 마쳤던 것이다.
지도에서 빈란드는
캐나다 동부 해안으로 추정되고 있다.
실제로 오늘날
캐나다 뉴펀들랜드 섬에는
이들이 정착했던
유적지가 발굴되고 있다.
▲ 캐나다의 바이킹 유적지
하지만 북미 대륙에서의
이들의 운명은 좋지 못했다.
현지의 인디언들은 매우 사나웠기 때문에
이들에 의해서 바이킹들은 쫓겨나야만 했던 것이다.
숲이 우거지고 야생포도가 열리는
풍요로운 땅이었지만 말이다.
● 그린란드의 비극
하지만 풍요로운 시기는 14세기 무렵부터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1315년부터 유럽에서는
이상 저온이 시작되더니
흉작이 들고
밀 값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식량난으로 스코틀랜드에서는
나무껍질로 빵을 만들어 먹는가 하면
영국에서는 무덤을 파서
시체를 도려내 먹는 일이 횡행하기도 했다.
또 굶주린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켜
죄 없는 유태인과 문둥병 환자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유럽 전역은 해마다 기근으로
수백만 명이 굶주려 죽거나,
굶주림으로 인한 면역 약화로
떼죽음을 겪게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소빙하기(소빙기)의 서막이었다.
이후 발트해 전역이
얼기 시작하더니
그린란드 해안에는
유빙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당시 그린란드는
추운 기후 때문에 농사짓기가 곤란해졌고
바다표범, 해마 등의
사냥감도 줄어들어
바이킹들의 생활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게다가 유빙은 점차 세력을 확장해
유럽과 그린란드를 오가는 정기 교통마저 단절되었기 때문에
그린란드는 그야말로
내부 생산은 없고
외부 지원도 받을 수 없는
고립무원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뜨아! 이렇게 꼼짝달싹 못하고
죽게되는겅미?"
그런데 이때 섬의 북쪽에서
낯선 무리 일파가 내려오게 되는데,
이들은 짐승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바다표범과 생선을 날 것으로 잡아먹는,
바이킹들이 보기엔
그저 '야만인'에 불과했던 이누이트인들이었다.
때문에 당시 바이킹들은
이누이트인과는
교역을 하지도 않았고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단추를 삶아먹고
가축의 발굽까지 우려먹을 정도로
처참했던 순간에서도
그들은 기독교인이자 문명인이기 때문에
유럽인들의 생활양식을
버리려 하지 않았고
▲ 새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바이킹들
심지어 지천에 널려있는
물고기에는 손조차 대지도 않았던 것이다.
"생선의 가시뼈 같은 흔적이
전혀 발굴되지 않고 있다능."
때문에 수천 명의 그린란드의 바이킹들은
모두 전멸을 당해야만 했었다.
"일부는 배를 타고
탈출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최근 영구 동토층에서 발굴된
그린란드 바이킹들의 유골을 보면
영양실조와 구루병에 시달린 나머지
팔다리가 부자연스럽고
난쟁이 같은 키에
몸이 비틀려져 있다.
하지만 똑같은 조건에서도
대대손손 살아남은 이누이트족은 뭐란 말인가?
▲ 붉은색 : 바이킹 영역, 파란색 : 이누이트 영역
이들은 이글루를
짓고 생활했고,
신선한 날생선을 즐겼기 때문에
비타민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었고
고래와 바다표범의 가죽으로
따뜻한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었다.
"대체 누가 누굴보고
야만인이래?"
● 원나라와 고려의 멸망
기후와 관련된 역사에 예외가 있다면
아마도 송나라일 것이다.
온난기에 농경국가는
경제성장에 힘입어
영역을 확장하는 게
일반적인 일이지만,
▲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경계선 : 중국의 만리장성(좌), 고려의 천리장성(우)
엉뚱하게도 송나라는
문치주의에 사로잡힌 나머지
스스로 군사력을 약화시켜
유목민족에게 오히려 땅을 잃고 만다. ☞ 참고
10세기부터 시작해서
무려 400년에 걸쳐
송나라의 영토는 유목민에 의해
야금야금 잠식당하게 되고
13세기 후반 몽골족에 의해서
그 땅을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
물론 당시 몽골족은
중국은 물론,
중동을 넘어
동유럽까지 영역을 확대하며
전대미문의 대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 몽골의 세계 정복
"오늘날 우리나라 면적의 330배!"
하지만 몽골의 영화로운 시기는
1세기에 불과했다.
하필이면 1세기 만에
지구가 다시 추워졌기 때문이다.
"아놔, 운 없네.."
중국에서는 양쯔강이 얼어붙게 되면
반드시 나라의 우환이 발생하곤 했는데,
1329년 겨울에도
양쯔강이 얼어붙었고,
감귤나무가 동사하는 등
희귀한 일이 줄을 잇고 있었다.
이후 추위와 가뭄이
해마다 엄습하게 되었고
각지에서 굶주린 농민들이
반란을 도모하게 되었으니,
▲ 기근이 들면 식인도 횡행했다
결국 주원장이 이끄는 도적 무리에게
몽골족의 나라는 망하고 만다.
그 무렵 고려 또한
비슷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한여름에도 바람이 차가워
겨울옷을 입었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농가 모습
가뭄으로 도처에서
기근과 전염병이 창궐하였고
북쪽에서는 굶주린 홍건적이,
남쪽에서는 굶주린 왜구가 쳐들어왔으니
나라 망하기 딱 좋은 조건이었고,
결국 고려왕조는 망하고 말았다.
중세 유럽의 몰락과
원나라의 몰락,
고려의 몰락이 때를 같이 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당시의 평균기온을 보면
오늘날과 큰 차이는 없던데?"
"한겨울보다
환절기 감기가 더 무섭듯이.."
"기후 변화도 변화의 서막에서
그 피해가 가장 심각해지기 마련임."
● 소빙기 (소빙하기)
15세기부터 시작된 소빙기의 겨울은
오늘날보다 평균 2도 가까이 더 추웠다.
▲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브뢰헬의 그림
때문에 유럽의 겨울은
오늘날보다 1달 이상은 더 길어서
3월까지는 겨울이었고
4월이 돼야 꽃이 피고 풀이 돋았다.
오늘날 런던은 편서풍의 영향으로
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는 경우가 드물지만,
▲ 겨울철 런던의 기온은 부산보다 따뜻하다.
당시에는 템즈강이
툭하면 얼어서
17세기 후반 템즈강에서는
얼음판 위에서 시장이 열리기도 했었다.
1684년에 그려진
'템즈강의 겨울축제'라는 그림을 보면,
얼어붙은 강 위에서
천막시장이 들어서
스케이트장, 마차 경기장, 연극 공연장,
식당, 주점, 매음굴 등이 문을 열고 있었다.
당시 얼음 위의 천막시장은
꽤나 인기가 높았기 때문에
왕실 가족들까지 나와
구경을 하는가 하면
도심에서 정기적으로 운행하는
마차가 등장할 정도였다.
이 무렵 아시아의 겨울도
혹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양쯔강은
걸핏하면 얼어붙었고,
상하이에서 눈이 1미터 이상 내려
한 달 동안 녹지 않았던 일도 있었다.
심지어 아열대 지방인 광둥성까지
눈이 내리기도 했었다.
그러했으니, 당시 조선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음력 9월, 10월부터
강이 얼어붙는가 하면
난류가 흘러 결빙하기 쉽지 않은,
동해안까지 꽁꽁 얼어붙을 정도였다.
이 시기 우리나라는
끔찍한 대기근을 두차례나 겪어야 했는데
하나는 17세기 중반의
경신대기근이었고
다른 하나는 17세기 후반의
을병대기근이었다.
두 기근으로 모두
▲ 자료 출처 : 권태환·신용하 인구대사전
100만 명 가까운 아사자를 발생시킨
엄청난 재앙이었다.
하지만 기근의 피해는
조선만 입었던 게 아니었으니
북방의 만주족 역시
참혹한 기근으로 식량난을 겪게 되는데,
사실 호란은 조선과 명의 관계를 끊으려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지만
조선으로부터 식량과
농사 인력을 확보하려는
경제적인 목적도
크게 작용했던 전쟁이었다.
당시 혹한과 기근으로 인해
조선 내부에서는 인구 이동이 대거 발생하게 되는데,
(김덕진, 세상을 바꾼기후 p.147)
15세기만 하더라도 인구가
경상도·평안도·충청도·전라도 순이었지만,
17세기를 거치면서
경상도·전라도·충청도·평안도 순으로 바뀌게 된다.
● 종교전쟁과 마녀사냥
소빙기가 절정에 있었던
16세기 말부터 17세기까지
유럽에서는 무려 100년 동안이나
종교전쟁이 발생했다.
당시 종교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된 데에는
종교적인 신념이나
정치적 야망도 있었지만
그보다 대기근으로 인한
민심 이반이 크게 작용했다.
"국민들의 불만이 커지면
정권이 위태롭기 때문에.."
"군주들은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능."
그리고 종교전쟁과 때를 같이 해서
유럽에서는 마녀사냥이 극성을 부렸다.
15세기에 시작된 마녀사냥은
원래 이교도를 박해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대기근이 발생하던
당시의 교회는
연속된 불행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을 찾기 위해
마녀사냥을
이용하고자 하여
멀쩡한 여자들을
마녀로 낙인을 찍어
고문을 하고 사형에 처하는 등
즉흥적 재판이 자행되게 되었다.
▲ 극적인 효과를 위해 온갖 잔인한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마녀사냥은
극적인 효과 덕분에 유행처럼 번져서,
독일의 한 마을에서는
마을 여자가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수십 명 씩의 여자들을
한꺼번에 화형시키기도 했었다.
다만 당시 마녀사냥으로 희생된 자들은
대부분 하류층이었다.
남자한테 버림받은 여자·창녀·떠돌이·
유랑 악사 그리고 유태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기후 문화사'의 저자 볼프강 베링거는
이렇게 말했다.
베링거
"마녀사냥은
소빙하기가 낳은 범죄였다."
● 대기근과 시민혁명
1783년 아이슬란드 남부에서
큰 화산이 폭발했다.
같은 시기 일본에서도
거대한 화산 폭발이 발생했다.
이때부터 전 지구의 기후 상태는
비정상적으로 돌아갔다.
가뜩이나 한랭한 소빙기에
화산재까지 지구촌을 덮었으니,
설상가상이
따로 없었다.
이후의 상황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일본·북아프리카·유럽·인도·
중국·인도네시아·조선 등등
세계 도처에서 기근이 발생하였고
600만 명 이상이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특히 100만 명이 죽은
일본의 '텐메이 대기근'은 참혹함 그 자체였다. ☞ 참고
온갖 식물의 뿌리는 다 캐 먹고
짚을 갈아 가루로 먹는가 하면
독초도 마다않고 뽑아서
삶아먹을 정도였고
종이도 가리지 않아
절의 경전까지 남아나지 않았고
심지어 진흙이나 배설물을
익혀 먹는 방법까지 나돌고 있었으며
끔찍한 식인이 여기저기서
횡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인육을 뜯고 있는 센다이의 주민들
같은 시기 프랑스에서도
전국적으로 대기근이 발생했으니,
농가에서는 건초가 부족해
멀쩡한 소들이 대량 도살되었는가 하면
흉작으로
밀값이 치솟아,
서민들은 월급의 대부분을
빵을 사는 데 지출해야만 했었고
빵 한 조각을 훔치다 붙잡혀 감옥에 갔던
장발장 같은 이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1789년 결국,
곪을 대로 곪은 민심이 폭발하고 말았으니
그리하여 발발했던 게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었다.
"그렇다면 소빙기가
인류의 근대화를 앞당겼단 말인가?"
참고 문헌 : 세상을 바꾼 기후 (김덕진), 기후, 문명의 지도를 바꾸다 (브라이언 페이건), 문명의 붕괴 (재레드 다이아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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