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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전통시대 유럽인들의 식탁 : 무엇을 먹고, 왜 그렇게 먹었는가?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220357498251
● 동서양의 식단은 서로 비슷했다

전통시대 서양 사람들의
식탁은 어떠했을까?

흔히 빵과 고기를 
생각하기 쉽다.

물론 틀리지 않는 얘기다.

밀가루를 면으로 만들어 먹던 
중국인들과는 달리 ☞ 참고

유럽인들은 주로 
빵으로 만들어 먹었고

아시아 사람들보다 
확실히 육류 섭취량이 더 높았다.

하지만 유럽인들 역시
곡물 위주의 식사를 하였고

염장 음식과 발효 음식 위주로 
섭취했다는 점에서

아시아의 전통 식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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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읭? 유럽사람들도 
염장 음식과 발효 음식을 주로 먹었다고?"

물론이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음식을 오랫동안 저장해서 먹으려면

발효와 염장의 기술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발효 음식은
어느 문명에서나 쉽게 발견된다.

인간이 먹는 음식의 
1/3이 발효음식이기 때문이다.
(정한진, 세상을 바꾼 맛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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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그렇게 많았어?"

흔히 발효음식이라면
김치, 된장, 요구르트 등을 생각하게 되지만

유럽인들이 즐겨 먹는 빵, 포도주, 맥주, 치즈 
모두 발효음식인 것이다.

또 100년 전까지 서양인들이 섭취했던 
동물성 단백질의 대부분은

소시지, 햄, 절인 생선 등의
염장 음식이었다.

그러니 곡물을 위주로 하고
염장과 발효 음식을 주로 섭취했던 것은

서양인이나 동양인이나
서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유럽인들의 음료수 : 포도주와 맥주

● 석회질이 많은 유럽의 물

사람은 매일 같이 2.5ℓ의 물을 
흡수하고 배출해야만 건강하게 살 수 있다. ☞ 참고

물론 음식물에 함유된 
수분 덕분에

그렇게 많은 음료수를 
따로 챙기지 않아도 되지만

그렇더라도 매일 상당한
물을 마셔야만 한다.

그런데 유럽의 물은
수질이 좋지 못하다.

공룡이 살았던 6500만 년 전,
백악기 시대까지 유럽 대륙은 
▲ 당시의 유럽대륙 : 붉은 원

대부분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에

유럽의 토양에는 어패류에서 나오는 
석회질이 많이 포함돼 있어

하천과 지하수의 물이
우리나라와 달리 뿌연 색깔을 띤다.
▲ 정수기 안의 석회질 얼룩

때문에 한국인들이 
유럽에 가면

가장 적응하기 힘든 문화적 충격이
'석회질 물'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과연 어느 정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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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끓이면 
기름처럼 석회가 둥둥 떠다니고

커피포트에 석회가 덕지덕지 
달라붙어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세수를 하면
피부가 갈라지는 느낌이 나고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쉽게 빠지거나

양치질을 하고 나면
이빨에 치석이 낀다.

세면대·싱크대·샤워실 배수구마다
주기적으로 석회를 제거해줘야만 하고

석회질 때문에 세탁기의 수명도
유럽에서는 더 짧아진다.
▲ 배수구를 청소하면 나오는 석회질

물을 끓여마셔도
찝찝한 기분은 가시지 않는다.

때문에 유럽은 예로부터 
식수에 대한 애로점이 많았고,

그래서 발달한 것이 
바로 맥주와 포도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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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술로 생각하지만
유럽인들에게는 식수 대용이었던 것임."

이는 황토 먼지와 
부족한 강수량으로

수질의 상태가 좋지 못한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중국의 하천

중국에서 물은 
반드시 끓여마셔야만 했으니

그래서 발전하게 된 것이
바로 차문화였다.
▲ 송나라 시대 차를 파는 상인


● 포도주

포도주가 언제 어디서부터
기원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애초에 포도라는 과실 자체가 
당과 효모를 동시에 가지고 있어서 

쉽게 자연발효가 일어나
알콜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와인의 기원은
좀처럼 추정하기 힘든 부분이다.

다만 고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문헌에 보면

포도주가 곧잘 등장하고 있고 
다른 지역으로 수출까지 했던 상품이었다.

이후 그리스로 포도 농사법이
전래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지중해 일대에는

일찍부터 포도나무가 재배되었고
그리스인들은 포도주를 즐겨 마실 수 있었다.
 

고대 로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2500년 전부터 로마인들은
일상에서 포도주를 즐겨 마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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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들은 도수를 약하게 한 포도주를
매일 2ℓ씩 마셨다고 함."

그리고 이후 
로마인들이 유럽을 제패하면서

유럽 전역으로
포도 농사법과 포도주가 전파되게 된다.

하지만 로마가 망하고
중세시대가 도래하면서

포도의 재배와 포도주 생산은
오직 교회가 독점을 하게 되는데

덕분에 중세시대 수도원마다 
양조장이 들어서게 된다.

"포도주는 예수님의 성스러운 피.
아무나 만들어서는 안된다능."

때문에 포도주는 
갑자기 귀한 음료가 되어버려

서민들이 함부로 
즐길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다만 중세 후기부터는
서민들도 포도주를 마실 수 있게 된다.

물론 세금을 내고 
마셔야만 했지만 말이다.

이때 수도원은 포도주 판매로
짭짤한 수입을 거두기도 한다.


● 맥주

포도주가 고대 로마시대의
가장 대중적인 음료였다면

중세에는 교회의 독점으로
비싼 음료로 전락하고 만다.

그렇다면 중세시대에
유럽의 서민들은 

포도주 대신
어떤 음료를 마셨던 것일까?

바로 맥주였다.

맥주는 6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에 그려질 정도로

인류의 오래된 음료이자 
일상적인 음료였다.

또 고대 이집트에서도
일찍이 맥주를 주조해서 마셨다.

그리고 이런 맥주를
중세시대 유럽인들도 즐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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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이후 추워진 지구의 날씨로
유럽의 포도 농사가 예전만 하지 못했기 때문에.." ☞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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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가 귀해지면서
맥주로 대체된 면도 있었다능."

다만 당시의 맥주는 
음료수를 위한 용도였기 때문에

지나치게 발효되어 
알콜 도수가 높아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중간에 
발효를 중단시켰기 때문에

오늘날의 맥주와는 
사뭇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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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맛을 내는 호프가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맛도 크게 달랐다능."

게다가 당시의 맥주는
보리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잡곡이나 콩, 귀리를 섞은 곡물에 
물을 넣어서 만들었고

곡물을 거르지 않고 먹었기 때문에
죽과 같이 걸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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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읭? 술이 아니고 
그냥 죽이구먼."

그리고 이런 걸쭉한 맥주를 
중세시대 유럽에서는

도시나 농촌 할 것 없이
하루 2~3ℓ씩 소비했던 것이다.
 

이렇게 과음을 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에는 소금에 절인 음식을 많이 먹어
그만큼 갈증이 심했고

맥주의 높은 칼로리가 
부족한 식사를 보충해 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포도의 생산이 증대된
19세기 이후에도

맥주의 인기는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게 되는데,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포도는 껍질이 얇아서 쉽게 터지고 
터진 부분에서 부패가 시작되기 마련이어서

와인을 만들려면 
수확한 포도를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는

현지 위주의 생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보리로 만드는 맥주는 
운반이 가능한 곡물을 원료로 하기 때문에

도시에서도 쉽게
양조가 가능했기 때문에

그만큼 유통이 
포도주에 비해 손쉬웠던 탓이다.



유럽인들의 탄수화물 : 빵

● 로마인들의 빵

인간이 '밀'을 먹는 방법은
크게 3가지가 있다.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낟알을 죽으로 끓여 먹는 방법이 있다.

이보다 진화된 방법은
낟알을 제분한 뒤에 

밀을 반죽해서 
먹는 방법으로,

불에 구워서 먹으면 
빵이 되고

물에 삶아서 먹으면 
면이 된다.

그런데 유럽인들은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밀을 먹던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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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그보다 
2천 년 먼저 (BC 2천 년 경)

중동의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빵을 만들어 먹고 있었고

BC 1천년 경, 고대 이집트에서는 
최초로 발효빵이 만들어지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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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발효빵은 귀해서
귀족 전용이었고,"

"평소 대부분의 이집트인들은
발효되지 않은 거칠고 납작한 빵을 먹었지만.."

하지만 그런 이집트가
로마 제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로마 제국으로의 
밀 공급을 담당하게 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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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는 나일강의 범람이 가져온 
기름진 땅으로 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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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부터 곡창지대가 
발달돼 있었다능."

이때 이집트의 빵이
로마로 전수되어

로마인들은 죽을 던져버리고
빵을 먹기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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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빵의 인기는 대단해서
로마의 황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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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을 무료로 배급하면서
자신의 인기를 높이기도 했었다능."

▲ 로마시대의 무료배급 빵 

이후 로마인들의 빵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덕분에 유럽인들은
빵을 주식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중세시대의 빵 : 빵의 색깔이 계급을 나타내다

다만 중세시대까지 밀가루 빵은 
결코 흔한 음식이 아니었다.

밀로 만든 속 살이 흰 빵은 
부자들의 전유물이었다.
 

호밀을 비롯한 잡곡으로 만든 검은 빵을 
농민과 하층민들은 즐겼고

이보다 여유가 있는 
상인이나 수공업자 같은 중간계층이

밀과 잡곡을 섞어 만든 
'도시의 빵'을 먹었다.

왜 그랬을까?

가장 큰 이유는 밀의 생산성이 
극히 나빴다는 데 있었다.

밀은 단위면적 당 수확량이 
낮은 까다로운 곡물이었으나

반면에 호밀·보리·귀리·기장 등은 생명력이 강해
어떤 땅이든지 잘 자랐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의 기록을 보면 
흉년기의 밀은 

1개 낟알에서 
고작 3~4알을 생산했지만

쌀은 낟알 1개를 가지고
100알의 곡식을 생산해낼 수 있었다.
(이시 히로유키, 환경은 세계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p.15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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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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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기록에 있는 내용이니깐 
무시할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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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흉년기라는 특수성을 
감안해야 한다능.."

결국 유럽에서의 밀은 
상류층이나 부유층을 위해 재배하는

고급 작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서민들의 빵은
검은빛을 띠고 딱딱했던 걸까?

잡곡으로 만든 빵은 
발효가 잘 되지 않아

굽게 되면 검은빛을 띠고 
과자처럼 딱딱해졌던 것이다.

때문에 빵 색깔은 수백 년 동안 
사회 계급을 구별하는 기준이기도 했다.

즉 당시 유럽 사회는 
빵의 위계가 곧 사회의 위계였던 것이다.
▲ 벽돌처럼 딱딱한 빵

하지만 검은 빵이라도 먹을 수 있었으면 
그나마 형편이 좋은 편이었다.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곡물을 빻고 구워야만 하는데 

중세 시대에 화덕과 
물레방아는
▲ 중세시대 제분소

영주와 수도원의 
소유였기 때문에

서민들은 검은 빵이라도 먹기 위해서는 
'사용료'를 지불해야만 했다.

때문에 중세시대 서민들은
빵보다는 죽을 먹는 경우가 더 흔했다.
▲ 귀리죽

불 위에 쇠줄로 걸어 놓은 무쇠냄비는 
중세 농가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물과 잡곡을 붓고
채소와 소금에 절인 고기 몇 점을 넣고

수프나 죽을 끓여 먹었던 것이
중세시대의 가장 전형적인 서민 식단이었던 것이다.


● 감자와 옥수수

근대 시기의 유럽은 
농업혁명으로 수확량이 폭증한다.

"이것이 바퀴 달린 쟁기라능!"

하지만 수확량이 증대되면서
유럽인들의 식단은

역설적으로
더욱 열악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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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읭?"

인구가 증가하고 농지가 확장되면서
초지와 숲이 줄어들고

그만큼 가축을 기르는 비용이 
부담되었기 때문에
 

가축의 수가
대폭 줄어들게 된 탓이다.

"사람 먹기도 힘든 곡물을
가축들에게 나눠줄 일 있어?"

따라서 근대 유럽인들의 육류소비는
크게 감소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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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귀족이나 부유층에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얘기지만.."

대신 곡물의 소비는 
더욱 늘어나게 되었고

빵 소비가 증가하자 
빵의 질은 크게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중세시대까지 밀빵을 
주로 먹었던 도시의 부유층도

근대시대로 오면
호밀을 섞은 빵을 먹어야만 했고

빈민들이 먹거나
기근 때에나 찾던 검은 빵은

농촌에서는 
일상적인 음식이 되어버렸다.
▲ 콩 수프를 먹는 농민

부유한 농민이라 하더라도
밀과 호밀 같은 고급 곡물은 내다 팔고

보리, 귀리, 기장 같은 
잡곡 가루로 만든 빵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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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농민들도 
쌀을 수확하게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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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싼 쌀을 팔아서 
값싼 보리로 바꿔 먹곤 했었다능.." ☞참고

하지만 이런 열악한 상황을
반전시켰던 사건은 

15세기 후반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작물이
대중적으로 보급되려면 
▲ 콜럼버스가 가져왔던 작물들 : 호박, 고추, 토마토, 감자, 카카오, 강낭콩, 땅콩, 해바라기, 옥수수

수 세기 동안의 
과도기가 필요했으니

16세기 처음 옥수수가 들어왔을 때만 해도
이교도의 곡물로 여겨졌고

또 옥수수에는 글루텐 성분이 적어
반죽이 쉽지 않아

빵을 만들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크게 각광을 받지는 못 했다.

그러나 곧 옥수수가 
어떤 기후에서나 잘 자라고 

단위생산량이 
엄청나다는 것이 알려지자

유용한 곡식으로 인식되어
전 세계로 빠르게 전파되게 되었으니
 
▲ 옥수수 산지 : 추운 만주지역에서, 열대지역까지 기후를 가리지 않는다

16~17세기 동안에만 
아프리카, 중국, 일본까지 전파되었고

이때 조선에도 청나라를 통해 
은근슬쩍 전래되게 된다.

반면에 감자의 운명은 
좀 달랐다.

16세기에 감자가 처음 소개될 때만 해도
유럽인들은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악마가 농간을 부린 식물이다.
노예나 먹는 비천한 음식!"

심지어 감자의 모습이
나병 환자의 피부와 비슷하다고 해서

먹으면 나병에 걸린다는 
괴소문까지 퍼지고 있었다.

때문에 감자의 전파는 
옥수수만큼 빠르게 이뤄지지 못하다가

척박한 기후와 토양에서도
엄청난 생산을 할 수 있는 작물이라는 게 알려지고

▲ 1헥타르 당 수확량 비교 (단위 : 톤)

감자만 먹고도 멀쩡한 
아일랜드 사람을 보게 되면서 ☞ 참고

점차 유럽인들의 인식은 
달라지게 되었고

18세기 후반 전쟁으로 
군인들의 식량이 부족해지고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노동자의 최저생계비를 낮추기 위한 묘안이 강구되면서

정치가와 자본가가 전략적으로 
'감자 먹기 캠페인'을 벌여

유럽에서 감자는
대중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유럽인들의 단백질 : 고기와 생선, 치즈

● 왜 서양인들은 동양인들보다 고기를 더 많이 먹었나?

단위 면적당 인구부양력에서
쌀은 밀보다 3배 높고, 
(비료가 없었던 전통시대 기준)

밀은 목축업보다 
6배 이상 높다.

쉽게 말해, 
고기를 섭취하기 위해

유럽인들은 6배의 땅을 
희생하면 됐지만

아시아인들은 
18배의 땅을 희생해야만 했다. 
 

쌀 문화권에서 목축업이 발달하기 힘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마, 이래 많은 사람들을 묵고 살리려면
농사 말고는 답이 없다 앙카나."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유럽 국가들은 
북위 40~55도쯤에 위치하고 있어서

북위 25~40도 정도에 위치한 
동아시아보다

평균 위도가 15도 정도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태양광선이 희박해서
토지의 칼로리 생산량이 충분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전통시대
유럽의 농가들은

가구당 평균 20헥타르의 
땅이 필요했다.

반면에 동아시아의 농가들은
평균 2헥타르의 땅이면 충분했다.
(이시 히로유키, 환경은 세계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p.151)

때문에 유럽에서는 
넓은 농장을 경영하기 위해서는

가축이 필수적이어서 
목축과 농업을 혼합할 수밖에 없었지만

쌀 문화권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결국 쌀 문화권은 풍족한 기후 덕분에
인구가 크게 늘어나

인구부양력을 높이는 쪽으로
땅을 집약적으로 사용해야만 했지만

유럽의 밀 문화권은 척박한 기후 덕분에
목축을 병행하게 된 것이다.

다만 유럽도 인구밀도가 높아지면서
점차 육류 소비가 줄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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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초기만 하더라도 유럽인들은
칼로리의 절반을 육류에서 섭취했지만.."

▲ 중세 초기의 농가 : 게르만 전통이 남아있어, 집 안에서 가축을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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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가 증가할수록 
고기에 대한 기회비용이 높아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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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세기 무렵 유럽의 서민들은 
평소엔 고기 구경도 못하고 살아가게 된다능."


● 햄과 소시지

19세기까지 유럽인들은
대부분의 육류를

소금에 저장해서 
햄과 소시지로 만들어 먹었다.

신선한 고기는 
하루 이틀 안에 소비하도록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기를 오래 보관하려면 
소금에 절이는 염장법이 가장 좋았다.

그런데 유럽의 중북부는
추운 겨울 동안 가축을 키우기가 여의치 않았다.

동물에게 먹일 곡물은커녕 
인간이 먹을 곡물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겨울이 시작되는 
12월 초가 되면 유럽의 농부들은

새끼를 낳을 암퇘지, 암소 한 마리, 
양 한 마리만 살려두고

나머지 가축들은 모두 도살해서
소금에 절여 소시지와 햄을 만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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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왠지 잔인해."

이때 돼지는 버릴 것이 
전혀 없어서

피는 창자에 넣어 
소시지(순대)로 만들거나

가마솥에 넣어 
선짓국을 끓여 먹었다.
▲ 선지로 만든 스웨덴의 소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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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선짓국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게 아니었네?"

사실 소시지는 '소금으로 맛을 낸다'라는 뜻의
라틴어 'salsus'에서 유래되었다.

소시지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프랑크푸르트 소시지처럼 
곱게 간 고기를 창자에 넣어 익혀서

금방 먹어야 하는 
소시지가 있는가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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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순대도 
이와 같은 형태의 소시지임."

오래 보관하기 위해, 
창자에 생고기를 넣어 발효시킨 '건조 소시지'도 있다.

이런 건조 소시지는
보통 1~2년 동안 보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장기간 항해를 하는 선원이나 
군인들의 전투식량으로

요긴한 단백질원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햄은 
또 어떻게 다른가?

사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가공육은
진짜 햄이 아니다.

진짜 햄은 돼지 엉덩이 살이 붙은 뒷다리를
통째로 소금에 절인 것이다.

혹은 생 삼겹살 덩어리를
소금물에 절인 베이컨도 있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 후기,
몽골에 의해 

소시지 만드는 법이 알려졌겠지만
관련된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 몽골 전통 소시지

1670년에 쓰인 '음식디미방'에 나오는 '개장'이 
소시지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정한진, 세상을 바꾼 맛 p.65)

여기서 '개장'이란, 삶은 개고기를 
여러 가지 음식 재료에 섞어

개창자에 다진 고기를 
쑤셔넣어 만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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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반면에 우리가 흔히 먹는 순대는
구한말 이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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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돼지고기를 
잘 먹지 않았기 때문에 (돼지)순대가 없었지만.."

▲ 돼지고기를 잘 안 먹던 시절에는 
육종에 신경 쓰지 않아, 돼지의 크기도 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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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이후 외래종 돼지가 들어오면서
돼지고기를 먹기 시작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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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순대가 만들어졌던 것임."


● 청어와 대구

냉동 시설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생선이나 고기를 
오랫동안 보관하여 먹기 위해서는

소금에 절이거나 
말리거나, 훈제를 해야만 했다.
▲ 훈제 생선

이 중에서 유럽인들은
주로 소금에 절여 먹는 방법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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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여 먹는 방법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니.."

당시 유럽에서는 청어와 대구가
대표적인 생선이었는데,

차가운 바다를 좋아하는 청어는 
깊은 바다에서 살다가

알을 낳기 위해 
수천 km를 헤엄쳐 

이른 봄, 해안가에 
대거 출몰하는 어종이다.

중세시대에는 주로 
발트해 연안에서 많이 잡혔다.

때문에 청어잡이 어업은
독일 북부의 한자동맹 도시들에게 커다란 부를 가져다주었다.
▲ 중세 한자동맹의 도시

하지만 14세기부터
지구의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면서

발트해의 청어는 대거
북해로 산란지를 옮기게 된다.

그러면서 새롭게 부상하게 되는 국가가
바로 네덜란드와 영국이었다.
▲ 네덜란드의 청어잡이 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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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이
해상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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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14세기 경부터 시작된
청어잡이 특수에서 비롯됐다능."


반면에 청어가 사라진 북부 독일의 상업도시들은 
침체 일로에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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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기후변화가 가져다준
역사의 흥망성쇠였다능."

당시 유럽 사람들은
청어를 잡으면

내장을 제거하고 소금에 절여 
1년 가까이 저장하며, 청어를 발효시켜 먹곤 했는데
▲ 청어를 손질하는 여인들

발효된 청어의 냄새는 지독했지만,
그 맛은 일품이어서

유럽 사람들은 야채와 곁들여 먹거나
빵에 끼워 먹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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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트뢰밍 한번 먹어보라능.
냄새만 맡아도 막힌 코가 뻥 뚫린다능."

그런가 하면 유럽인들의 식탁을 채운 
또 하나의 생선은 대구였다.

대구는 크기도 크고
살코기도 많아

청어에 비해 저장이 쉽고 
맛도 좋았기 때문에, 값이 비싼 생선이었다.
▲ 염장되어 보관 중인 대구

다만 대구를 잡을 수 있는 곳은 
한정되어서

플랑크톤이 풍부한 북해 인근이 아니면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15세기 경부터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의 어민들은

어디서 잡아왔는지
항상 대구로 만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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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참 희한하네.
그 많은 대구를 어디서 잡아온겨?"

"비밀이라능."

과연 어디서 잡아온 걸까?

사실 당시
바스크 지방 사람들은
▲ 노란색 부근 : 바스크 지방

고래를 쫓던 중, 
우연히도 

캐나다 동쪽의 뉴펀들랜드 어장을 
발견하게 되었고
▲ 붉은색 : 뉴펀들랜드 지방

이곳에서 잡은 대구로
엄청난 수익을 올렸던 것이다.
▲ 인디언과 조우한 바스크 어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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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보다
더 이른 시기였다는 주장도 있고.."

하지만 바스크 어민들은
이런 사실을 오랫동안 비밀로 했기 때문에

이 황금 어장은 100년도 훨씬 넘게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16세기 말 영국이
뉴펀들랜드 대구잡이에 뛰어들면서

이곳은 유럽 각국 어선들의
어업 경쟁장이 되어버렸으니,

18세기 경 뉴펀들랜드 해역으로 몰려든 
어부들의 수만 매년 1만 5천 명에 달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황금 어장을 독차지한 것은

강력한 해군을 가진 
영국과 프랑스였다.
▲ 17세기 영국 해군


● 치즈

치즈는 쌀 문화권에서는
낯선 식품이지만

목축을 하는 문화권에서는 
어디서나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발효 식품이다.
 

5000년 전 중동에서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치즈는

그 유래와 관련해서 
이러한 전설을 가지고 있다.
▲ 4천년 전 이집트 상형문자 중에서 발견된 '치즈'

고대 아라비아의 상인이
사막을 지나 먼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이때 상인은
양의 위로 만든 주머니에 
▲ 양의 위주머니

염소젖을 
넣어 가지고 갔었는데,

하루 여행을 마치고 
염소젖을 마시려고 보니, 이게 웬일인가?

염소젖이 그만 투명한 액체와 
흰 덩어리로 나뉘어진 것이 아닌가!

"아놔.."

하지만 상인은 
어쨌든 목을 축여야 했기에 

눈 딱 감고 
먹어봤는데,

"어라? 이거 시큼하고 고소한 게
맛이 꽤 괜찮은데.."

그리하여 치즈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때 염소젖이 덩어리진 이유는 
동물의 위에 남아있던 

소화 효소(rennin)의 작용으로 
염소젖이 맑은 액체와 덩어리로 분해되었기 때문이다.

"아하!"

그렇게 알게 된 치즈 제조법은
곧 세계 각지로 전파되었고

고대 로마인들 역시
일찍이 치즈를 즐겨 먹게 된다.

특히 로마 병사들에게 
단단한 치즈는

저장과 운반이 편리하고
칼로리와 영양가가 높아

훌륭한 전투식량으로
사용될 수 있는 요긴한 식품이었다.

때문에 로마 병사들이 
하루치 식량으로 배급받았던 물품에는
▲ 식량을 배급받고 있는 로마 병사

반드시 빵과 포도주
그리고 소금과 치즈가 있었다.
▲ 치즈를 먹고 있는 중세 영국 농민

참고로 치즈는 
같은 무게의 우유와 비교했을 때 

단백질은 7배,
칼슘은 5배나 함유하고 있어

다른 영양소를 무시하고 
오로지 단백질 섭취가 주 목적이라면 

닭 가슴살, 달걀 흰자보다도
값이 싼 고효율 음식이라고 한다.


참고문헌 : 세상을 바꾼 맛 (정한진), 환경은 세계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이시 히로유키), 유럽의 음식문화 (맛시모 몬타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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