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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미국의 입맛에 맞는 세계질서 : 베트남 전쟁, 쿠바 사태, 중동전쟁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220316840464
미국은 지구촌 분쟁의 씨앗

● 미국의 입맛에 맞는 세계질서

2차대전 이후 세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다고 자평한 미국은

전 세계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돌아가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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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쭈? 말 안 들어?"

당시 미국은
시장경제 질서에 반하는

공산주의, 민족주의적 기질을 가진 나라들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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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년 장면 정권의 몰락 이면에는
61년 초의 통일 시위와 반미 시위가 있었다능."

▲ 61년 초 한미경제협정 반대 시위

그리고 싫어하는 데만 
그치는 게 아니라

미국은 직간접적으로 개입해서 
손을 봐줘야만 적성이 풀렸던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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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미국의 전매특허는
쿠데타 사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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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쿠데타가 
과연 미국의 도움 없이 가능했을까?" ☞ 참고

그리고 쿠데타가 성공하여 
친미반공 정권이 들어서게 되면

미국은 원조 자금이라는 
당근을 제공하게 된다.

이런 공식은 50~70년대 냉전시대에
수도 없이 보게 된다.

한국은 물론 이란, 베트남, 칠레, 쿠바, 
아프가니스탄, 인도네시아, 과테말라 등등

제3세계라면 어디서나
등장할 수 있는 틀에 박힌 공식이었다. 

때문에 지난 한국현대사를 
좀 더 의미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50~70년대에 미국의 개입으로 나타난
일련의 사건들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60년대에 발발했던
대표적인 냉전의 산물이었던

베트남 전쟁, 쿠바 사태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 베트남의 분단과 전쟁의 씨앗

1945년 이후 프랑스는
2차 대전 중 일본에게 빼앗겼던
▲ 2차 대전 중 일본의 영역

옛 식민지 베트남을
되찾고자 했다.

그러나 베트남은 콧방귀를 뀌었다.

 호치민
"흥! 누구 맘대로?"

그들은 미국이 자신들을 
도와주리라 생각했다.

 호치민
"2차대전 중에 항일운동을 했을 때
미국이 우리를 많이 도와줬잖아."

 호치민
"이번에도 프랑스가 침략하면
미국이 우리를 도와주게 될 듯."

하지만 착각이었다.
미국은 호치민을 경계하고 있었다.

 트루먼
"2차 대전 중에야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우리가 호치민을 도와줬을 뿐."

 트루먼
"호치민은 민족주의자에 공산주의자임.
그런 자가 베트남을 차지하게 되면 안된다능!" 

때문에 미국은 
오히려 프랑스를 도왔다.

 트루먼
"우리가 군사적 지원을 해줄 테니
꼭 호치민 일당을 소탕하라능."

그러자 호치민은
중국과 소련에게 손을 벌렸으니,

 호치민
"프랑스가 다시 우리를 먹으려 해요."

 스탈린
"알겠삼. 도와줄테니 꼭 물리치삼."

그리하여 1946년부터 북베트남과 프랑스군과의
전쟁이 발발하게 되는 것이다. (인도차이나 전쟁)

그리고 이것이 앞으로 30년 동안 치러질
베트남 전쟁의 서막이었다.


● 프랑스의 패퇴

초반 프랑스군은 북베트남군을
압도하고 있었지만,
 
▲ 프랑스군

1953년부터 전쟁의 양상은
급격히 변하게 된다.

미국에서는 20년간 집권했던
민주당 정권(루스벨트→트루먼)이 무너지고

공화당 정권(아이젠하워)이 들어서면서
전쟁 비용을 급격히 줄이고자 했으니,
 
▲ 공화당 후보, 아이젠하워의 선거유세

그리하여 한국전쟁은 
휴전을 맞이하게 되었고
(물론 트루먼 정권부터 휴전협상을 했었지만 ☞ 참고)

미국은 베트남에서의
프랑스군에 대한 지원도 전면 중단하고 만다.

 아이젠하워
"우리가 도와주지 않는다고
설마 프랑스가 베트남한테 지겠어?"

그런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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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끝나자
여유가 생긴 중국이

곧바로 호치민을
도와줬던 것이다.

 마오쩌둥
"이제 우리가 도와주겠다해."

그런 까닭에 1954년 초 
디엔비엔푸 전쟁에서

프랑스군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고 만다.
▲ 베트남에서 패퇴하고 있는 프랑스군 (1954년)

"뜨아! 역부족이다.
그냥 전면 철수하자능!"

프랑스의 패배는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기에
미국의 충격은 상당했다.

 아이젠하워
"만약 베트남이 공산화된다면?" 

 아이젠하워
"주변의 다른 국가들도 
도미노처럼 차례로 공산화될 게 뻔하다능."

이른바 도미노 이론이었다.

때문에 프랑스가 떠난 자리를
미국은 바통을 이어받아

베트남의 일부만이라도
친미정권을 세우려고 했다.

그리하여 54년 미국은
프랑스와 북베트남 사이의 협정을 주선하고 (제네바협정)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베트남을 남북으로 분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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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이렇게 휴전을 맺고
2년 후에 총선거를 실시해서 통일정부를 만들자능."

 호치민
"오케 오케."

하지만 막상 2년이 지나고 보니,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총선을 하면 
친미정권의 패배가 불 보듯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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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놔! 민심이 전부 호치민을 원하니.."

결국 총선거는 
이뤄지지 않았고

미국은 반공을 명분으로 
남베트남에 더욱 깊숙이 개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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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없었던 일!"

그러했으니
호치민의 분노는 어떠했겠는가?

 호치민
"약속을 지키지 않는 미국에게
이제는 싸워서 이기는 것밖에는 없겠다능!"


● 중동전쟁의 발발

1948년 5월, UN의 결정과
서방의 입김으로

이스라엘은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이스라엘 독립 만쉐!
앞으로 가나안 땅은 우리 땅!"

미국을 위시로한 서구 세계는
즉시 이스라엘을 정식 국가로 인정했다.

"히틀러에게 집단 학살을 당한 
불쌍한 유태인들에게.."

"이젠 그들만의 국가를 
가질 수 있게 만들어야합니다."

하지만 하나의 갈등 해소는
또 다른 갈등을 탄생시켰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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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열강의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2천년 넘게 팔레스타인에 살던 아랍인들은

졸지에 살던 땅에서 추방되어 
난민의 신세가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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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아랍 전역은
이스라엘과 서구세계를 대대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유태인들만 사람이고
아랍인들은 사람도 아님?"

그리고 그런 감정이 격화되어 발발한 것이
아랍-이스라엘의 전쟁이었다.

미국 정부는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의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편애할 수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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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가 풍부한 중동 지역에
미국의 석유 회사들이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미국은 불만의 목소리가 큰
국가들을 몇 개 골라 손을 봐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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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로 목소리 제일 큰 넘만
골라서 손 봐주면 된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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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보면 민족주의가 문제야.
이란, 이집트를 손 봐주면 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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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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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이집트에 쿠데타를 사주해서
친미국가로 만들어버리면 문제 해결!"


● 친미국가가 된 이란, 반미국가가 된 이집트

미국의 이러한 계획은
이란에서는 성공했다.

1953년 미국의 CIA는 
이란에 쿠데타를 사주해서

그동안 입헌군주제를 통해 
명목상 왕을 하고 있던 팔레비 2세를

절대적 지배자로 
앉히게 된 것이다.

 팔레비
"어익후 감솨!"

이후 25년간 이란은 
미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어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경제원조를 받게 되었고
오일달러까지 가세하게 되었으니,

63년부터 78년까지 
연평균 12%라는 놀라운 고도성장을 구가하게 된다.
(같은 기간 우리나라는 평균 8%를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집트에서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집트의 나세르는 미국의 위협을 눈치채고
재빨리 소련과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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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놔! 이거 골치 아파졌네."

미국은 괘씸한 나머지, 

이집트에 투자하기로 했던 
아스완댐 건설 협력을 철회했다.

그러자 나세르는 
보란 듯이 영국이 장악하고 있던 

수에즈 운하를 
1956년 무력으로 탈환해버렸다.

 나세르
"이제부터 우리 땅의 운하는 
우리가 관리하겠다능."

 나세르
"아스완댐 건설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는데, 잘 됐네."

 나세르
"앞으로 수에즈 운하 통행료로
댐 건설 자금에 충당하겠다능."

그러자 1956년 10월, 서방 측의 사주를 받고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선제공격했다.
 
▲ 이스라엘 군

잇달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도
이집트를 쳤다.
▲ 이스라엘군의 진격로

다만 미국은 
겉으로 지켜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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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직접 나서게 되면
아랍 전역이 반발해서 소련 편으로 돌아설 수 있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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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그저 난 모른 척.."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랍권의 반발이 거셌기 때문에

"당장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앞으로 서방 세계를 배척하고
소련과 손을 잡겠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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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아!"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에게 물러나도록 종용하고
이스라엘과 이집트를 서로 휴전시켜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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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싸우지들 말어."

하지만 이것은 앞으로 증폭될
중동전쟁의 서막일 뿐이었다.



쿠바 사태

● 쿠바의 공산화, 미국의 대응책

1952년 미국은 
쿠바에 쿠데타를 사주해서

쿠바를 중남미를 대표하는
친미국가로 만드는데 성공했고

이후 미국은 쿠바 경제에 깊숙이 침투하여 
각종 이권을 잠식하고 있었다.

50년대 중반, 미국 기업들은
쿠바의 대부분 자원을 통제하고 있었고

쿠바의 대표적인 산업인
사탕수수 농장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었다.

또 미국의 마피아들은
쿠바의 호텔과 향락산업을 지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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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때문에 쿠바에서는
반미 감정이 싹트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넘들은 물러가라!"

그리고 그런 민심에 등을 업고
1958년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반군이 집권하게 된다.

카스트로는 처음에는 
미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다.

 카스트로
"걱정 말라고. 
우리는 미국하고 좋은 관계를 원한다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카스트로는 과격한 토지 정책을 시행하여

외국인 소유의 기업들과 자원을 
빼앗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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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뭐 하는 시츄에이션?"

 카스트로
"우리꺼 우리가 갖겠다는 데 뭐가 잘못?"

그리고 1959년, 급기야 카스트로는 
쿠바의 공산화를 선포하게 된다.
▲ 쿠바혁명을 성공한 카스트로(좌), 체게바라(우)

 카스트로
"앞으로 사유재산 철폐!"

미국으로서는 깜짝 놀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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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그도 그럴 것이, 쿠바는 
플로리다 주 남단에서 

겨우 140km 떨어진 곳에 있는 
섬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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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아! 우리나라 앞마당에 
공산국가가 나타나다니.."

게다가 카스트로는
소련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이 더 이상은
지켜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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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쿠바로부터의
수입은 전면 금지!"

이렇게 경제제제를 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무력으로 
쿠바섬을 점령할 계획까지 세우게 된다.

다만 이럴 때면 
미국은 늘 쿠데타를 사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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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직접 나서면
남에 나라 내정간섭한다고 비아냥 소리 듣잖아."

때문에 CIA는
미국으로 망명 온 쿠바인들을 상대로

무장 게릴라 활동을 
집중 훈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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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았어! 조만간 쿠바로 쳐들어 가서
현지 주민들을 선동하는 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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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다음에 주민들과 협력하여
카스트로 정권을 무력 정복하는 거임."


● 피그스만 침공

1961년 4월, 1500명의 쿠바 출신 게릴라군이 
쿠바의 피그스만에 상륙했다.

하지만 침투 계획은
이미 사전에 모두 뽀록이 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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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타임즈가 쿠바침공이 있을 것이란
기사를 특종으로 내보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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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 국장이 공공연히
쿠바 침공 계획을 흘리고 다니질 않나."

때문에 쿠바는 전 병력을 동원해
해안선을 철통같이 감시하고 있던 중이었다.

게다가 상륙한 곳도
하필 늪지대.-_-

"아놔, 왜 하필 이런 곳에 떨궈줬냐능."

미국은 침공군을 돕기 위해
공중 폭격까지 지원해줬지만

그다지 큰 효과는 없었고

게다가 쿠바 국내에서 동조 반란은 
전혀 일어나지도 않았으니,

침공군은 소련군에게 훈련을 받은 쿠바군에게
3일 만에 모두 격퇴당하고 만다.

결국 침공군 중 100명 이상이 사살되었고
1,100명 이상이 포로로 붙잡혔고

붙잡힌 포로들은, 
미국이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고 나서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결국 피그스만 침공으로
미국은 완전히 체면을 구기고 말았고

오히려 이후 쿠바의 혁명의식은 
더욱 고조되었으니,

카스트로는 신이 나서
라디오 연설에서 이렇게 떠벌였고

 카스트로
"다시는 쿠바를 얕보지 말라능."

체게바라는 케네디에게
이런 편지까지 보냈을 정도였다.

 체게바라
"덕분에 쿠바혁명은 더욱 굳건해졌습니다. 
고맙습니다."


● 쿠바 미사일 기지 건설

1953년 스탈린 이후 
소련의 정권을 잡게 된 흐루쇼프는 

1956년 ☞스탈린 격하 발언 덕분에
내부 경쟁자를 숙청시킬 수 있었지만,

 흐루쇼프
"개인숭배나 일삼는 스탈린과 같은 독재자는 
천하의 악당임돠!"

 흐루쇼프
"그러니 스탈린을 추종하던 무리들은
숙청하는 게 답!"

스탈린식 공포정치를 버렸기 때문에
뜻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으니,

동유럽은 공산권에서 
떨어져 나가려고 했고

"스탈린식 독재는 실패했다.
공산당 독재체제는 물러가라!"

"우리는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탈퇴하고  
중립노선으로 가겠다!"

반면에 동아시아에서는
소련을 거부하고 나섰다.

이미 스탈린을 모델로 
독재 권력을 구축하고

개인 우상화 작업까지 들어갔던
중국과 북한이었기에

흐루쇼프의 발언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
"개인숭배가 어쩌구 저쩌구 뭐냐해?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냐해?"

 김일성
"매라구? 독재자가 어카고 어째?"

때문에 자유주의가 불거진 
동유럽과는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오히려 독재권력이 강화되고

우상화 작업이 심화되는 
반동적인 상황이 나타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흐루쇼프는
반대파들에게 큰 불만을 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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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권의 결집이 예전같지 않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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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 가지고는
미국과 맞짱 뜨는 게 어렵게 됐어."

때문에 흐루쇼프는 스스로 강경한 정책으로 
실추된 입지를 만회하고자 했으니,

1961년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탈출할 수 없도록

베를린에 거대한 공구리 장벽을
둘러치는가 하면,

쿠바가 공산화가 됐다는 소식에
카스트로를 초빙하기도 했다.

 흐루쇼프
"미국넘들이 요즘
해안가를 침략해왔다면서요."

 카스트로
"말도 마세요. 여전히 미국넘들은 
호시탐탐 쿠바를 노리고 있어요."

 카스트로
"그러니 이참에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해주셨으면.."

 흐루쇼프
"하하. 좋은 생각임돠. 
미국넘들 제대로 똥줄이 타겠군요."

그렇게 소련은 쿠바에
탄도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려고 했던 것이다.

다만 상대방 앞마당에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려던 것은

소련보다 미국이 먼저 
도발을 했던 일이니,

1961년 초 미국은 친미국가 터키에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려 했던 것이다.

 케네디
"좋아. 여기에 핵탄두 기지를 만들면
모스크바까지 기냥 사정권이라능."

때문에 소련도 복수 차원에서라도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려 했던 것이다.


● 쿠바 위기 : 3차 대전의 일촉즉발

그런데 미국 정찰기가 
쿠바의 미사일 기지 건설 현장을 발견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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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럴 수가.."

미국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소련에 강력히 항의한다.

 케네디
"당장 쿠바에 건설 중인
미사일 기지를 해체하라능!"

 흐루쇼프
"쿠바에 설치되는 미사일 기지는 
공격용이 아닌, 방어용이라능."

 흐루쇼프
"미국이 쿠바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아무 일 없어."
 
케네디
"그걸 어떻게 믿어.
당장 철수해!"

 흐루쇼프
"그럼, 미국도 터키에
미사일을 배치하려던 계획을 철회하라능."

이때부터 미국은 골치가 아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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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쿠바 해안가를 
철저히 봉쇄하여

건설자재와 핵탄두를 싣고 올
소련 선박의 출입을 전면 막고자 했고,

그와 동시에 
쿠바 침공 계획도 세웠다.

때문에 1962년 10월, 
일촉즉발의 긴장 속에서

전세계는 숨을 죽이고 
13일 동안 사태를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케네디
"미사일기지 건설자재 싣고 오는 배들은 
모두 강제 수색하겠다능."

 케네디
"만약 거부할 시에는 격침!"

 흐루쇼프
"명백한 해적행위다! 
우리는 이대로 강행하겠다능!"

이런 발언들이 오고 갔기 때문에
전세계인들은 핵전쟁의 공포를 느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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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하루라도 더 버틸 수 있을까?"

이럴 때 먼저 꼬리를 내린 것은
소련이었다.

 흐루쇼프
"좋아. 앞으로 니들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철수하겠뜸."

 케네디
"오케, 그렇게 하자능."

이렇게 해서 아찔했던 순간이 
무사히 지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진짜로 핵전쟁이 일어날 뻔했었다.

이미 양측 전투기는 핵탄두를 탑재하고 
날아올라 발사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심지어 미국은 소련 영공까지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양측 수뇌부들은  
이런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으니..
 
"왜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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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수칙에 따랐을 뿐인데.."

한편 미국 역시 터키에 건설하려던
미사일 기지 계획을 전면 철회했다.


 
베트남 전쟁

● 혼란한 남베트남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단된 이후

미국은 남베트남에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의 정세는 불안했다.

'베트남판 남로당'이라 할 수 있는 '베트콩'이 
북베트남(월맹)으로부터 인적, 물적 지원을 받으며

남베트남의 세포조직 깊숙이
침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60년대가 되자
베트콩의 세력은 

남베트남의 여러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여기에 남베트남의 디엠 정권은
카톨릭을 남베트남의 지배적 종교로 만들기 위해
 디엠

불교를 탄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 집단으로부터 심각한 반발을 사고 있었다.

이때 승려들이 
휘발유를 몸에 뿌리고

사이공 중심가에서 가부좌를 하고 앉아
분신자살을 했는데, ☞ 참고

이 모습이 해외토픽으로 실려
지구촌을 경악케 했기 때문에

디엠 정권에 대한
내외적 불만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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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꼬락서니가 이게 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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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이 들끓고 있는데,
엉뚱한 종교탄압을 하고 있으니.."

때문에 미국은 디엠에게 압력을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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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휘청거리는 정권을 개혁하라능!"

 디엠
"내정 간섭하지 마셈."

때문에 미국은 디엠을 제거하기 위해
쿠데타를 사주했고

63년 11월,
디엠은 암살되게 된다.


● 통킹만 사건

하지만 새롭게 들어앉은 군사정권도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때문에 미국은 베트남 정책을
'원조'에서 '간섭'으로 전략을 바꾸게 되었으니,

무엇보다 남베트남 혼란의 원인인
월맹(북베트남)을 손을 봐주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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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 가지고는 방법이 없겠어.
우리가 직접 나서든지 해야지."

이때 미국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바로 전쟁이었다.
moon_and_james-83미국

그리고 전쟁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

1964년 8월 베트남의 통킹만에서
한편의 사기극을 조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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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언론은 이렇게 보도했다.

"북베트남 어뢰정 3척이.."
 
"통킹만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미 구축함을 선제공격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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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국은 베트남 사람들을 무장 훈련시켜
북베트남에 간첩으로 파견하곤 했는데,

이때도 간첩을 떨궈주는 일을 하려고 
통킹만에서 기웃거리다가

월맹군 어뢰정 3척이 
미 구축함으로 접근해 오는 것을 포착하게 되었고

미 구축함은 어뢰정에 발사를 하여
1척을 격침시키고, 2척에 타격을 입히게 된다.

반면에 미 구축함은 
월맹군 어뢰정의 반격으로 

총탄이 선체 일부에 박힌 정도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미국은 '옳다구나'라면서
전쟁의 구실로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 군함이 북베트남의 어뢰정에 
선제공격을 당했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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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방귀 뀐 건 미국인데,
월맹한테 누명을 씌우다니.."

어쨌든 미 의회는
북베트남 군사공격안을 가결했고

"베트남 문제에 
미국이 직접 개입하는 거 완전 찬성!"

곧바로 미군은 
베트남에 파병되게 된다.


● 북베트남 폭격

1965년 3월부터 
미군의 베트남 주둔이 이뤄졌다.

무려 50만 명이
주둔하게 되었으니,

목표는 남베트남의
베트콩을 소탕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북베트남으로는 
엄청난 공습이 가해졌다.

당시 미국은 폭격을 하면
북베트남이 쉽게 GG를 칠 것이라 생각했다.

 존슨
"월맹이 더 이상 베트콩을 원조하지 못하도록
북베트남을 초토화로 만드는 거임."

하지만 폭격의 효과는 크지 않았다.

무엇보다 북베트남은 
현대적 산업사회가 아니어서
(앨런 브랭클리,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3권 p.409)

폭격의 효과가 나타날 
목표물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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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잣집, 초가집들은 부셔봤자라능."

게다가 북베트남 사람들은
지하 터널을 만들어, 

그 속에 학교, 상점, 공장의 연결망을
구축하고 있었고

폭격을 피하기 위해
라오스, 캄보디아를 우회해서 

베트콩에게 물자를 보급하는
'호치민 루트'를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 호치민 루트

또 미국의 무차별 폭격은
월맹의 결의를 분쇄하기는커녕,

오히려 전쟁에 대한
민중의 참여만 강화시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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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놔.."

한편 베트남 전쟁은 
국제적으로 정당성이 없는 전쟁이었기 때문에 

UN이 참여했던 한국전쟁과는 달리
미군을 주축으로 

우방국 몇 나라만
미국 편에서 전쟁에 참가하게 됐는데,

이때 한국은 가장 많은 병력을 파견하며
미국을 도왔기 때문에

그 대가로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챙겨

한국의 GDP는 파병을 전후해서
5배가량 성장하는 놀라운 성과를 이루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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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축적한 자본으로
한국은 중화학공업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능."


● 반전의 여론 : 구정공세, 미라이 학살, 마약

베트남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명분도 승산도 없는 전쟁이 되고 말았다.

그러면서 미국내 여론도 점점 악화되어갔고
미국 사람들은 차츰 반전을 외치고 있었다.

그 정점은 1968년 1월에 있었던
베트남인의 새해 첫날에 단행된, 이른바 '구정공세'였다.
▲ 구정공세가 일어난 지역

월맹군과 베트콩은 이날을 기해
대대적으로 아껴둔 힘을 퍼부었으니,

베트남 주요 도시들이
단숨에 공산세력에 장악되는가 하면

미국인들은 TV 보도를 통해
사이공 한복판에서 폭탄이 터지고

베트콩이 사이공 거리에서 
머리에 총을 맞는 장면을 여과 없이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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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아!"

이후 미군은 베트콩이 장악했던
대부분의 지역을 다시 회복했지만

미국인들이 목격했던 충격은
쉽게 가시질 않았다.

여기에 68년 3월에는
미군의 잔악무도했던 ☞ 미라이학살

미국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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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있었어.
여성과 아이 할 거 없이.."

반전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불거지고 있었다.

게다가 68년 한 해에만
미군의 사망자 수는 1만 7천여 명에 이르고 있었고

참전 3년 동안에만 미군의 사망자 수는
3만7천 명을 넘고 있었다.

▲연도별 미군 사망자 수

이 즈음 문란한 군기와 
마약에 빠진 병사들의 모습도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되었으니,

미국 내 반전 여론과 시위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르게 됐다.

"당장 무의미한 전쟁에서 빠져나와라!"


● 미국의 철수와 적화통일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서면 
강대국 미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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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미국은 
명예로운 퇴진을 하고자 했고

북베트남에 협상을 제의해서
방심을 하게 만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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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 싸우자능."

동시에 북베트남에 엄청난 폭격을 가해
정신적 승리를 거두는 과정을 거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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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기 전에 
남은 폭탄 좀 정리하고.."


73년 1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휴전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이때 미국은 
월맹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닉슨
"우리는 철수하지만,
만약 휴전 협정을 파기할 경우.."

 닉슨
"즉각 해군과 공군의 공격으로
벌집이 된다는 거 잊지 마쇼들."

그리고는 미국은 남베트남에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각종 최신 무기들을
던져주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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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당시 남베트남은
세계 군사력 3위였다지."


하지만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 철수하는 미군

베트남 전쟁은 한국전쟁처럼
남과 북이 싸웠던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남쪽 내부에서
남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싸웠던 전쟁인데
▲ 베트콩

남북이 휴전협정을 한들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때문에 휴전협정 이후에도
남베트남에서는 지속적으로 충돌이 일어났고
▲ 베트콩의 공격

한편으로 부패한 남베트남 지도부는 
국민의 지지를 잃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72년 미국에서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나라 전체가 큰 혼란에 빠지게 됐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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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라는 작자가
함부로 야당 당사를 도청해도 되는 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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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그런 일이 있었어?"
"웅성웅성 시끌벅쩍.."

하늘이 월맹을 도운 격이었다.

"하하하"

결국 75년 3월 월맹군은 
총공격에 나섰고

사기가 떨어진 남베트남군은 
변변히 싸우지도 못하고 패주를 거듭했고,
▲ 당시 남베트남의 포스터

미국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사태를 바라만 봤고,

75년 4월 월맹군이 사이공을 점령하면서
기나긴 전쟁은 끝이 나게 된다.
▲ 사이공을 함락한 베트콩 탱크


참고 문헌 :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앨런 브랭클리), 미국사 이야기(케네스 C. 데이비스), 미국의 베트남 전쟁(조너선 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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