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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미국의 역사 : '전후의 경제호황'과 '또다른 미국' (1945 ~ 1960)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220258551113
전후 달라진 미국

● 전후의 경제 호황

1945년에서 1950년 동안 미국은
정치적으로 ☞ 냉전체제가 확립되는 시기였고

경제적으로는 전시 경제에서 벗어나
평시 경제로 전환하는 과도기였다.

당시 사람들은 돈은 많았다.

전쟁 기간 중 
일자리가 풍부했기 때문에

국가에서 발행하는 전시채권 등을 사들이며
열심히 저축을 했던 탓이다.

반면에 소비재가 부족했다.

군수품을 만들던 공장이
하루아침에 소비재를 생산하기는 어려웠다.

이런 이유로 
전쟁 특수를 누르던 미국경제는

전쟁이 끝나자 
점점 성장률은 떨어지고 있었고

급기야 1949년에는 
마이너스 성장까지 기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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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놔, 이러면 
유럽을 재건하기도 힘들어지는데.."

하지만 이럴 때 
뜻하지 않은 구세주가 나타났으니,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어느 정도였을까?

마이너스 성장으로 바닥을 치던 미국경제가
단숨에 두 자릿수 성장률로 치솟았다.



▲ 한국전쟁 효과 : 전쟁 발발 전 마이너스 였던, 미국의 경제성장율은 10%를 웃돌게 된다.

놀고 있었던 군수공장이 다시 돌아갔고
실업자가 된 군인 중 상당수가 다시 복직되었다.

 브루스 커밍스
"뉴딜 정책이 미국의 1차 부흥의 계기였다면
한국전쟁은 2차 경제 부흥의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은 
미쳐 전환되지 못 했던,

불균형 상태의 미국 경제에
받침점을 옮겨준 것과도 같았다.

이후로 미국 경제는 
20년간의 장기 호황 속에서 춤을 추게 된다.

어느 정도였을까?

1950년대 초반에서 1960년대 말까지
미국은 연평균 4.5%의 높은 성장을 구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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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에서 20년 동안 평균 4.5% 성장이라면 
그야말로 경이적인 수치임!"

그리고 이런 미국의 호황이 
전세계의 호황을 견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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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당시 수출성장으로 
방향을 잡은 개발도상국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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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두 자릿수 가까운 성장율을 
기록할 수 있었다능."

대공황기 25%였던 실업률은
1950년대에는 5% 이내로 급락하고

인플레이션율은 
3% 이하를 맴돌게 된다.

경제가 안정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전례 없이 풍요로웠고

소비를 통해 
그 행복을 십분 만끽하고자 했다.

전세계에 미국인들보다
풍족하게 소비하는 국민들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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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이 남아돌아
공짜로 여기저기로 원조를 해주던 시절."

게다가 전후 베이비 붐이 
도래했기 때문에

미국은 1950년에서 1960년까지
10년 동안 연평균 2%씩 성장하게 되면서
인구가 20%나 증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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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 5천만이던 인구가
1억 8천만으로 증가.."

양적으로도 미국의 덩치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 달라진 미국의 지도 : 서부의 본격적 개발

50년대의 또 다른 특징이라면
미국의 지도가 대폭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전쟁 이전까지 미국인들은 
대부분 대서양 연안의 동쪽에서만 몰려 살고 있어서
▲ 1900년 경 미국의 인구밀도

미국의 모든 경제·문화는
동부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2차 대전을 기점으로
그 양상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 1960년 경 미국의 인구밀도

무엇보다
태평양 전쟁을 수행하면서

미국은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일대에
대규모 군수공장을 설립하게 되었고

전쟁이 끝나면서 
이들 군수공장은

민수품을 만드는 공장으로 전환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많은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여기에 자동차 수의 증가로
석유 수요가 많아지면서

텍사스와 콜라로도 주의 
유전들이 대거 개발되어
▲ 텍사스 유전

휴스턴, 댈러스, 덴버 같은 
대도시가 급속히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서부에 일자리가 많아졌으니,
자연스레 인구가 늘어났던 것이다.
▲ 1950년대 휴스턴 

또 서부로 인구 이동이 많아지자
사람들은 점점 더 서부가 가진 장점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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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동부지역보다
1년 내내 쾌적한 날씨의 서부에 사는 게 훨씬 낫다능."

그런 장점을 찾아, 많은 사람들이 
남부 캘리포니아, 네바다, 애리조나 주로 몰렸다.

그중에서도 LA의 성장은 
특히 더 대단했다.

1945년부터 1950년 사이 
미국에서 새로운 사업의 10% 이상이 
바로 LA에서 시작되었고,

1940년에서 1960년 사이
LA의 인구는 50% 이상 증가했던 것이다.
▲ 1950년대 LA

고로 2차 대전을 계기로
미국은 국토를 보다 균형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 의학의 진보 : 항생제, 백신, DDT

20세기의 의학 발전은
지난 수천 년의 
모든 성과들을 합한 것보다 더 대단했다.

그러한 발전은 대부분 
2차 세계 대전과 그 직후에 발생한 것이었다.

특히 중요한 발견은 
항생제였다.

항생제를 발견하기 전
인류의 평균수명은 30~40세에 불과했지만

항생제가 발견된 이후
인류는 그 두 배를 살게 되었으니

그 중요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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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생제가 없던 시절에는 영유아 사망률이 높아
태어난 아이 중 절반만이 10살을 넘길 수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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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생제가 발명되면서 인류는 
수많은 미생물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게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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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력이 약한 영유아 사망률이
혁신적으로 줄어들게 되었다능."

이러한 항생제는 1928년 플레밍의 실험에 의해 
처음 페니실린이 발견되면서 그 빛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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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푸른 곰팡이!"

▲ 세균을 죽이고 있는 푸른곰팡이

하지만 효능 있는 페니실린을
대량생산하는 데에는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했고

2차 세계 대전 중인, 1941년에 가서야
비로소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여기에 설파제라는 
새로운 항균제도 발명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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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실린으로 효과 없으면, 
이 약 한번 먹어보라능."

세균보다 훨씬 치료하기 어려운
바이러스에 대해서도, 여러 백신들이 개발되었다.

인플루엔자(독감) 백신, 
소아마비 백신이 대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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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마비 백신이 발명되면서, 
미국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빠른 속도로 소아마비가 사라지게 되었지."

이런 혁신은 모두, 
전쟁 기간과 전후 수년 동안에 일어났던 일이다. ☞ 참고
▲ 소아마비 백신을 만든 미국의 조너스 소크

살충제도 혁신적인 발명이 있었으니,
바로 DDT였다.

 파울 뮐러
"DDT야말로 
인간과 다른 포유류에게는 해가 없고.."

 파울 뮐러
"오직 곤충들만 몰살 시킨다능."

전쟁 중 미군은,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이(louse)로,
태평양 전선에서는 모기로 씨름하고 있었다.

그러데 이는 티푸스라는 병을 옮기고
모기는 말라리아를 옮겼다.

때문에 이들 성가신 
벌레들을 퇴치하는 게 시급했는데

때마침 DDT가 
구세주처럼 등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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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T로 인해 미군은, 티푸스와 말라리아의 피해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능."

하지만 후일에 와서야 
밝혀지는 얘기지만

DDT 역시 동물과 인간에게 
장기적인 독성 효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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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기의 진보 : 수소폭탄, 대륙간 탄도 미사일, 우주개발

1952년 미국은 
최초로 수소 폭탄 실험에 성공한다.
 
▲ 52년 11월 비키니섬, 수소폭탄 실험

수소 폭탄은 그 위력이 
원자의 분열이 아닌, 

융합에서 나오기 때문에
원자 폭탄보다 훨씬 더 위력적인 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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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소련은 보았능가?"

하지만 소련도 1년 후에
수소 폭탄 실험에 성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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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읭?"

그렇게 수폭이 개발되자, 
다음엔 경쟁적으로 미사일 개발에 나섰다.

가공할 무기를 개발했으니,
이제는 목표 지점까지 

안정적으로 실어 나를 수 있는
운반체를 개발하는 수순이었다.

미국은 로켓 개발을 위해
나치의 독일 과학자들을 적극적으로 스카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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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문제 삼지 않겠음.
미국을 위해 일해준다면, 부귀영화를 보장하겠다능."

이런 식으로 미국은, 
731 부대의 마루타 실험을 했던

이시이 시로를
스카웃 했던 전력이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만들어지는 게
바로, 대륙간 탄도 미사일이었다.

이제는 버튼 하나만 누르면 
핵폭탄이 수천 km를 상공을 날아 
적진으로 빠르게 투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소련이 먼저 성공했다. 
미국은 2년 뒤에야 겨우 성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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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놔.."

그러자 다음 경쟁은, 대기권 밖을 항해하는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터트릴 수 있는

우주공간으로 
그 초점이 맞춰졌고

우주공간을 누가 먼저 개척하는가를 놓고
미소 양국이 첨예하게 경쟁하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도 
선방을 지른 것은 소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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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스푸트니크라는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면서
가장 먼저 우주를 개척했던 것이다.

미국은 1년이 지나서야
최초의 인공위성인 익스플로러 1호를 
외계로 쏘아 올리게 된다.

어쨌든 이것으로,
본격적인 우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풍요로운 50년대

● 폭발적인 소비문화 

전쟁 이후로 
미국은 부쩍 중산층이 많아지게 된다.

전시채권과 퇴직군인에 대한 연금으로
미국인들의 소득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시류에 맞춰
산업계에서는 

포드식 대량생산의
획일화된 제품에서 벗어나

소비자 기호에 맞춘, 차별화된 제품으로
소비자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 1950년대 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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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형차, 소형차, 세단, 오픈카, 지프차,
빨간색, 파란색, 흰색, 검은색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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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층 다양해진 기능과 디자인으로 
소비자들을 유혹했다능." 

여기에 신용카드가 
새로운 지불수단으로,

할부판매가 새로운 판매 기법으로 
등장하며 더욱더 소비를 부추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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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돈이 부족해도
물건을 구입할 수 있게 됐음."

그리고 TV, 스테리오, 식기세척기, 
식기건조기 따위의 가전제품들이

새롭게 소비자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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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우리나라는 라디오를 가진 가구도
전체의 5%가 안됐는데, 미국은 벌써.."

특히 TV의 대중화로, 광고계는 더욱 노골적으로 
시청자들을 유인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중적인 유행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50년대 말에 
훌라 후프가 인기를 끌자

곧 전국민적인 
놀이로 확산되었는데,

이런 유행의 속도는 
예전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TV 속 월트 디즈니 만화의 인기로
시중에서는 

미키 마우스가 그려진 시계와 모자가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었고, 

이런 인기에 편승해서
LA 부근에는 디즈니랜드가 만들어진다.

맥도널드 햄버거 또한, 이런 유행의 속도에 편승해서
빠르게 미국 전역을 휩쓸고 있었다.

빠른 서비스와 저렴한 가격, 
맛 좋은 음식, 그리고 맛의 일관성으로

일리노이주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던 맥도널드는,
▲ TV 광고

TV 광고 등을 통해 빠르게 
전국적인 메이커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 


● 한적한 교외 생활

2차 대전이 끝나자
집으로 돌아온 군인들은 

가정의 소중함을 느끼게 됐고,
보다 조용하고 안락한 곳에서 생활하고 싶었다.

때문에 이 시기 결혼이 늘어나게 됐고
비례적으로 주택 수요가 늘어났다.

당시 미국에서는 
주택을 마치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대량생산방식이 
도입되고 있었다.

이런 주택들은 설계비가 절약되었고
대부분 땅값이 저렴한 교외에 지어졌기 때문에

한적한 곳에서 살고 싶은 
퇴역 군인들의 수요와도 잘 맞았다.

무엇보다 주택의 값은 
고작 1만 달러 안팎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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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로 환산하면 10만 달러 수준."
(약 1억원)

때문에 교외로 빠지는 인구가 급증했고
이런 현상은 유행처럼 번져

1960년 경에는 미국 전체 인구의 
1/3이 교외 지역에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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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디가 우리집이더라?"

그렇게 사람들이 교외로 빠지자
즉각적으로 호황을 누렸던 곳은, 단연 자동차 업계였다.

전쟁 이전까지 1가구 당 
차량 1대 꼴이었던 미국은

이제는 평균 2대가 필요했다.

남편이 출근하는 사이, 부인도 마켓에 다녀오기 위해 
차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도로에는 
더욱더 자동차로 넘쳐났고

자동차를 이용하는 인구가 많이 늘어나자,
드라이브인 극장과 식당이 생겨나게 됐다.

하지만 이런 혜택에서
흑인들은 철저히 배제됐다.

교외의 백인들은 흑인과 섞여 사는 것을 
극도로 꺼렸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아예 흑인이 싫어서
교외로 탈출하기도 했다.

때문에 도시 중심가에서는
오히려 흑인들이 몰려 살기 시작했고

그런 곳은 공공투자가 취약했기 때문에,
쉽게 슬럼가로 변했다.
뉴욕의 할렘가가 대표적이다. 
▲ 50년대 뉴욕 할렘가


● TV의 탄생

1939년에 TV가 세상에 첫 공개될 때만 해도
이 물건이 인기를 끌거란 기대를 크게 하지 않았다.

당시 뉴욕 타임스는 이렇게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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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보려면, 
모두가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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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가정에서는
너무 바빠서 그럴 여유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TV는 곧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한다.

1946년에 미국에서 TV는 
겨우 1만 7천 대가 있었을 뿐이지만,

1957년이 되자 미국에서는
각 가정마다 TV 1대씩을 구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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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우리나라에서 TV가 
1가구 당 1대가 되는 시기는 80년대 초반의 일이었음."

심지어 당시 미국에서는
냉장고보다 TV를 소유한 가정이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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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는 30년 먼저 미국 가정에서
인기를 차지하던 가전제품이었는데도.."

어쨌든 TV가 대중화되면서
미국은 사회적으로 급속도로 변하게 된다.

먼저 가족 간의 대화가 줄어들고, 
TV을 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TV는 곧 모든 언론매체들을 물리치고
가장 중요한 정보 수단이 되었고,

TV 광고로 인해 미국인들은 
생각지도 않았던 상품을 사게 되었다.

스포츠 중계를 통해
미식축구와 야구, 농구의 인기는 
폭발적으로 상승하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미국인들 사이에 공통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전국의 모든 사람이 똑같은 예능 프로와 
광고, 드라마를 시청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프로그램은
철저하게 '백인 + 중산층 + 교외 생활자'의
모습만을 담아냈다.
▲ 당시 대표적인 시트콤 Father knows best

때문에 TV는 의도하지 않게
사회적 갈등의 소재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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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넘들은 저렇게 살고 있단 말이지?
우리는 뭐야?"

TV를 통해 그 세계에서 배제된 집단들은 
소외감과 무력감을 느껴야만 했기 때문이다.


● 비트족과 로큰롤

50년대의 풍요로 
미국은 중산층이 넓어져서

고질적인 빈부격차가 
어느 정도 해소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인구의 1/5은 최소생계비 상태에서 살아갔고,
유색인종의 대부분이 여기에 속했다.
(앨런 브랭클리,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3권 p.354)
▲ 50년대 흑인 가정

이런 사회적 풍토 속에서
냉소적인 '비트족'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술과 마약에 찌들어 있었고

차를 거칠게 몰거나
오토바이로 폭주를 즐겼다.

하지만 이런 비트족들이 
멋있게 보인다고

철모르는 청소년들이, 무턱대고 따라 하면서
사회적인 문제로 불거졌다.
▲ 청소년들의 비행을 다룬 영화 '칠판 정글'(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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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멋있어!"

또 이런 유행을 타고 
젊은이들의 우상이 된 인물이 있으니,

바로 제임스 딘이었다.

하지만 이유 없이 반항하던 
이미지의 그는,

영화 속처럼, 
과속으로 차를 몰다 사망하고 만다.
▲ 사고 난 제임스 딘의 차량

그런가 하면 대중음악에서는
또 하나의 스타가 탄생했다.

바로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그 역시 건들건들 거리는 반항적 스타일로
청소년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인기는, 
로큰롤 특유의 음악이 주효했는데

로큰롤이란, 흑인의 알앤비에 
백인의 컨트리 음악을 합친 독특한 음악이었다.

하지만 당시 어른들은 이런 엘비스를
노골적으로 폄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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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들건들 거리기만 하는, 
저런 양아치가 뭐가 좋다고."

하지만 반항적인 젊은이들은
오히려 그런 이유로 그를 더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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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좋기만 한데.."



또다른 미국

● 분절된 국가

그러나 교외의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은 
오직 백인들의 전유물이었다.

전쟁 때 흑인 병사들도
똑같이 미국을 위해 피를 흘렸지만

막상 집에 돌아와 보니 
변한 게 전혀 없었다.

당시 미국 빈민들의 대부분은
흑인, 히스패닉, 인디언, 아시아 이민자의 몫이었다.

여전히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유색인종들은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교육의 기회, 주거의 기회, 
직업의 기회, 소유의 기회가 없었다.

농촌에서 유색인종들은
대부분 소작농으로 살아갔고

도시에서는 
공장의 근로자로 살아갔지만

이마저 인건비가 오른다며
공장을 해외로 옮기거나,
자동화 시스템으로 전환했기 때문에

유색인종에 대한
일자리는 더욱더 줄어들고 있었다.

때문에 초기 백인 이민 집단들이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았던 혜택들이

전후의 유색인종 이주자들에게는 
거의 돌아오지 못 했다.

그렇다 보니, 
그 풍요로운 나라에서도

영양실조에 시달리거나
심지어 굶어 죽는 이들까지 발생하고 있었다.


● 흑인 분리정책과 저항

'분리하되 평등하다'는 개념은 
당시까지 미국 사회를 지배하던 인종정책이었다.
▲ 유색인종 전용 대기실

특히 노예제도가 있었던 남부지역에서
제도적인 차별정책은 두드러졌는데,

이곳에서는 학교와 호텔, 
식당, 식수대, 휴게실을 비롯해

많은 시설들에서
흑인과 백인은 따로 쓰게 분리돼 있었다.
▲ 백인 전용 레스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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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평등한데 왜 분리를 해!"

하지만 50년대 들어, 
이런 분리 정책에 반발하는 사건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었다. 

① 리틀록 나인 사건 (1957)

당시 백인들이 다니는 학교들은
좋은 시설에, 교사도 우수했지만
▲ 백인 학교

흑인들이 다니던 학교는 
교실이 하나밖에 없는 허름한 건물에

수도 시설도 없는 데다,
교사도 한 명이 모든 걸 책임지고 있었다.
▲ 흑인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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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같은 나라 맞아?"

때문에 당시 흑인들은 
자녀들에게 좋은 교육을 받게 해달라고
끊임없이 항의를 하고 있었고

수년간의 투쟁으로
겨우 대법원에서 허락을 하게 되는데,

하지만 백인 학교에 들어간
흑인 학생들은 오히려 더 큰 고통을 받게된다.

흑인 학생들은 백인 학생들에게 
조롱과 험담, 발 걸기, 걷어차기 등 

온갖 핍박과 
학대에 시달려야만 했고,

식당에서는 흑인 학생의 머리 위에 
음식물을 쏟아붓는가 하면,

매점에서는 흑인에게는 
물건을 팔 수 없다며 판매 거부까지 하고 있었다.
 

② 몽고메리 시내버스 보이콧 사건 (1955)

당시 시내버스 안에서도 
흑백 분리는 실시되고 있었다.

앞 좌석은 백인 전용이었고
흑인은 뒤쪽에 앉아야 했다.

중간에 있는 좌석은 
아무나 앉을 수 있었지만,

백인이 앉을 자리가 없으면 
흑인은 양보해야만 했다.
▲ 자리가 있어도 앞좌석은 흑인이 앉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재봉사로 일하던
40대 흑인 여성이 

중간 좌석에 앉았음에도
백인에게 양보를 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로사 파크스
"미안해요. 전 너무 피곤해서
비켜드릴 수가 없어요."

그러자 버스 안은 난리가 났다.
운전사는 소리쳤다.

moon_and_james-78스 운전사
"당장 자리를 양보하라고, 이 검둥이야!"

그러나 흑인 여성은
억울해서라도 끝까지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고

그런 이유로 경찰이 와서 
흑인 여성을 강제로 체포해갔다.

하지만 사건은 일대의 흑인 사회로 퍼져
대대적인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화가 난 흑인들은
시내버스 보이콧 운동을 벌이며

1년이 넘도록 온갖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보이콧 운동을 감행했다.
▲ 시내버스 타지 않기 운동

하지만 그런 와중에 일부 흑인들은 
감옥에 갇히거나 집이 불탔고,

흑인 교회에서는 
폭탄이 폭발하기까지 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고
이 운동을 주도했던 이가

바로 26세의 젊은 목사
마틴 루터 킹이었다.

그는 1947년에 독립을 이끌어낸
인도의 간디를 롤모델로 삼았다.

 마틴 루터 킹
"여러분들 화가 나더라도, 절대로 참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조건 비폭력 비협조입니다!"


● 흑백 통합의 시도 : 군대와 스포츠

그런 와중에, 미국에서 가장 먼저
흑백 통합이 이루어졌던 영역은 군대였다.

2차 대전 때 전쟁터에서
백인들과 똑같이 피를 흘리며 싸우는 통에

전장에서 흑인에 대한 차별은
상당 부분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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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들도 비행기를 몰 수 있고
흑인들도 탱크를 몰 수 있다고."

하지만 돌아온 흑인 병사들에게
고국은 전혀 변한 게 없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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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쟤들도 나라를 위해서 싸웠다고?
그럼 뭐 해 흑인인데.."

여전히 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아야 했고, 
거부 당해야만 했었다.

다만 군대에서만큼은 
흑백통합의 지시가 내려진다.

1948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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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군대에서
인종 차별 정책을 철폐하라능."

비슷한 시기, 흑백 통합이 
일어난 곳은 스포츠 분야였다.

1947년 메이저 리그 야구에서
최초로 흑인 출신의 1루수를 스카웃 했던 것이다.

주인공은 브루클른 다저스 팀(LA 다저스의 전신)의 
재키 로빈슨이었다.

하지만 그의 메이저 입성은 
결코 순탄치가 않았다.

타석에 들어서면 

여기저기서 원숭이 울음 소리가 들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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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끼끼끼.."

인종 차별적인 야유가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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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라 검둥이 자식! 
병살타나 쳐라!"

심지어 살해 위협까지 감수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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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버리겠어!"

하지만 스포츠계에서는
실력만 좋으면 장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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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쳤습니다! 홈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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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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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했어! 로빈슨!"

워낙 천부적인 실력을 가졌던 지라
그는 입단 첫해 신인상을 수상했고
또 팀을 내셔널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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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다! 로빈슨!"

이런 그의 활약에 힘입어,
이후로 흑인들의 프로 스포츠 진출은 
봇물처럼 터지게 된다.

하지만 흑인에 대한 동등한 대우는
오직 스포츠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가능했을 뿐이다.

50년대 미국에서의 흑인은, 
나아가서 유색인종은

함부로 백인의 영역으로 들어와서는 안되는
소위 '열등한 인종'으로 인식되고 있었고,

그렇게 때문에 백인과 같은 동등한 권리는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이들은 인권을 박탈당하고
기회를 거부당하며 살아가야만 했었다.
▲ 검둥이들을 (아프리카로) 돌려보내자

고로 50년대의 
번영하고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는,

백인들은 교외에서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지만,

도시 내부의 슬럼가에서는
가난한 유색인종들끼리 모여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그들만의 '게토'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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