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List

2017년 2월 21일 화요일

'냉전'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 일본·독일이 재건할 수 있었던 비밀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220242534946
● 냉전 (cold war)

'냉전 시대'는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소련이 붕괴한 1991년까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 진영이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며 경쟁한 시기를 말한다.

그런데 실제로 
싸우지는 않았다.

그냥 '서로 대치한 상황' 정도로 끝냈기에는 
'냉전'이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무기를 들고 직접 싸우는 전쟁이었다면,
'열전(hot war)'이라고 해야 한다.

그렇게 보자면 냉전은
미·소 간의 간접적인 전쟁이었다.

누가 더 자기 편으로 많이 끌어들이느냐,
누가 더 첨단 무기를 많이 보유하느냐,

치열한 첩보전, 
흑색 선전, 
 

결국 우주 공간에까지 이른 
기술 경쟁의 형태로 나타났다.

올림픽에서 누가 더 
많은 메달을 따는 지도,

냉전의 시대에서는 
중요한 간접 전쟁이었다.

moon_special-26 
"때문에 공산권 국가들은 엘리트 체육으로 
스포츠에 많은 투자를 했었다능."

혹은 다른 나라에 무기를 던져주며
'대리전'을 치르게도 해봤다.

한국전쟁·베트남 전쟁·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모두 이런 면에서 냉전의 산물이었다.

moon_special-40
"대리전을 통해 미소 양국은
상대방을 늪에 빠뜨리거나.."

moon_special-40
"혹은 첨단무기와 전술을 
실험해보기도 했었다능."

이런 대결 구도를 
전 세계는 40년 넘게 지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긍정적인 면이라면,
경쟁 구도 속에

인류의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leonard_special-6
"1969년에 달에 착륙한 것은
지금 생각해 봐도 너무 신기함."

moon_special-26
"그러게.."

한편 대량살상무기가 
출현하는 계기가 되어버렸다.
 
▲ 52년 11월 비키니섬, 수소폭탄 실험

moon_special-28
"3차 대전은 곧 지구의 종말이라는
말까지 나와버렸지."

덕분에 강대국 간의 
직접적인 전면전은 없던,
이례적인 평화(?)의 시기이기도 했었다.


● 미국과 소련은 왜 틀어졌나? 

2차 세계 대전 중
미국과 소련은 

공동의 적 독일을 맞이하여
서로 협력하던 사이였지만,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전쟁이 끝나고 재편될 세계 질서에 대한 
'비전'이 달랐다는 점에 있었다.

미국의 생각은 이러했다.

 루스벨트 
"이참에 케케묵은 제국주의를 청산하고
전 세계 국가들을 자유롭게 개방시켜서.."

 루스벨트 
"우리의 무역 상대국을
보다 많이 만드는 거임."

즉 미국은 30년 전 윌슨 대통령이 제창하던
'민족자결주의'를 이번에야말로 실현시켜서

유럽 강대국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강화시키겠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소련의 생각은 달랐다.

앞으로 언제 일어날지도 모를, 
서방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라도

동유럽 일대를
자신들의 보호막으로 삼고자 했고,

그러기 위해서 이들 국가들을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서, 통제하고자 했었다.

 스탈린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방파제."

이런 부분에서 
영국도 소련과 생각이 같았다.

 처칠
"또 그넘에 민족자결주의야.
우리 식민지를 다 토해내라는 소리잖아."

하지만 이런 비전의 차이점은
크게 표면화되지는 않았다.

보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폴란드에 대한 처리 문제에 있었다.

먼저 스탈린은 
폴란드의 동쪽 영토를 떼어줄 것을 요구했다.

 스탈린
"여기 예전에 우리가 먹었던 땅임요.
여길 우리가 다시 차지하고.."

 스탈린
"폴란드에게는 대신,
독일 동쪽 땅을 떼어주는 게 어떻겠음?"

독일로서는 영토의 상실이었고,
폴란드로서는 공간 이동이었다.
▲ 국토의 서쪽으로 쏠렸던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가
영토가 이동하면서, 국토의 동쪽으로 쏠리게 된다.

미국과 영국은
기꺼이 동의해 줬다.

 루스벨트 
"뭐, 그렇게 하셈."

그러나 이후 세워질 '폴란드 정부'에 대해서는
양측의 의견이 너무도 달랐다.

미국과 영국은
런던에서 1940년 이래로 활동하고 있던,
폴란드 망명 정부를 지지했다.
▲ 런던의 망명 정부

 루스벨트 
"런던 정부로 갑시다."

그러나 스탈린은 
소련에서 활동 중이던,
친공 망명 정부를 세우려고 했다.

 스탈린
"글쎄요? 
우리는 루블린 정부를 지지합니다만.."


● 얄타회담 : 폴란드와 독일의 문제

그리고 1945년 2월, 
우크라이나의 휴양지 얄타에서

미국과 소련의
두 정상은 서로 만났다.
▲ 당시 루스벨트(가운데)는 병환이 깊었고, 2달 후 사망한다.

처음에는 얘기가 술술 풀렸다.

 루스벨트 
"유럽에서의 전쟁도 다 끝나갑니다."

 스탈린
"그러게 말입니다."

 루스벨트 
"독일이 항복하면, 
태평양 전쟁에도 참전해 주삼."

 스탈린
"그럼, 러일전쟁 때 잃었던
사할린은 우리가 다시 가져도 되겠죠?"

 루스벨트 
"물론입니다."

 루스벨트 
"대신 UN을 만드는 데 동의를 해주세요."

 스탈린
"UN이요?"

 루스벨트 
"앞으로 또다시 전쟁이 없으려면
강력한 국제기구가 조직되어,
국제 분쟁을 조정해야만 합니다."

미국은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미국은 UN을 통해 
합법적으로 세계 패권국의 지위를 누리고 싶었다.

소련은 못마땅했지만 수락했다.

 스탈린
"그럽시다. 뭐."

그러나 다른 문제들은
좀처럼 합의를 이끌어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폴란드에 대한
전후 처리 문제가 그랬다.

 루스벨트 
"좋습니다. 폴란드에 민주적인 선거를 실시해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게 합시다."

하지만 스탈린은 
그렇게 되면,

폴란드에 친 서방 정권이 
들어서게 될 것이라는 걸 뻔히 알고 있었다.

때문에 애매하게만 답했다.

 스탈린
"뭐 그럽시다."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날짜에 대해서는
언급도 하지 않았다.

 스탈린
'어차피 우리가 점령하고 있는데 뭘.'

독일의 장래에 대해서도 
쉽사리 합의점을 찾기 힘들었다.

미국은 유럽의 다른 강대국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독일이 무너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루스벨트 
"독일은 다시 재건시켰으면 하는데요."

 루스벨트 
"또 독일을 불행하게 만들면, 
앙갚음을 하려고 3차 대전을 일으킬 겁니다."

 스탈린
"독일을 재건시키겠다니, 
말도 안 됩니다."

 스탈린
"독일은 영원히 일어서지 못하게
과중한 부담을 지게 해야만 합니다."

결국 독일은,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이
각각 점령지역을 지배하기로 결정된다.
▲ 독일 영토의 분할 점령

다만 수도 베를린은 
상징적으로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이곳도 역시 4개의 구역으로 나눠서, 
각 국이 점령하도록 했다.
▲ 베를린의 분할

하지만 독일 재통일 날짜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 트루먼의 등장 : 태평양 전쟁을 서둘러 끝내라

얄타 회담이 끝나기 무섭게,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차례로 친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폴란드마저 친공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루스벨트
"어익후! 이건 약속과 다르잖아."

루스벨트는 
뒷목을 잡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뇌졸중으로 사망하고 만다.

루스벨트가 급사하자, 
부통령인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대신했다.

그는 대통령에 오르자마자 
소련에 강경하게 대처하기로 결심했다.

 트루먼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공산주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능!"

다만 동유럽 전체를 소련군이 
차지한 시점에서, 

더 이상 폴란드를 가지고 
운운할 수는 없었다.

당시 미국은 여전히 태평양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아시아에서 
전쟁을 빨리 끝내버려,

소련이 태평양 전쟁 참전 대가로 요구하게 될 
전리품을 막는 것이 시급했다.

 트루먼
"자칫하면, 아시아 지역도
동유럽처럼 될지 모른다능."

때문에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라도
미국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려고 했었고

그래서 꺼내 든 카드가
바로 '원자폭탄'이었다.

"쾅!"

하지만 소련은 생각보다 약삭빨랐다.

8월 초, 동아시아 전쟁에 개입한 소련은
8월 11일, 이미 한반도 지역까지 내려왔었다.
▲ 소련군의 고속 진격

moon_and_james-11
"오마이 갓! 한반도 결국 뺏기게 생겼네."

한번 소련군이 
발을 들여놓은 이상, 

무조건 공산화를 시키고 만다는 건 
이미 유럽 전선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던 미국이었다.

그리하여 미국은 한반도의 
반쪽만이라도 살려보고자 급히 제안했다.

moon_and_james-75
"일본군 무장해제 시키는 건 좋은데, 
혼자서 너무 수고가 많네.
38도 선 이남은 우리가 할게, 좀 쉬는건.."

이렇게 미국은 
한반도 분할 점령을 제안했던 것이다.
moon_and_james-32

당시 미군은 태평양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제안을 소련이 거부하면 그만이었다.

때문에 당시 미국은
소련이 반대할 것으로 생각했다.

moon_and_james-76
"38도 선은 아무래도 무리한 요구 같은데, 
소련이 먼저 발을 들여놨는데...
좀 더 남쪽으로 합의되지 않을까?"


그런데 의외로 소련은 
더 남쪽 선을 고집하지 않고, 그냥 38도 선을 수락한다.

 스탈린
OK"

 트루먼 
"읭?"

때문에 미국도 놀랬다.

소련은 사실 한반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스탈린
"애초에 우리의 관심사는 
만주에서 이권을 확보하는 것임."

 스탈린
"비록 당초 목표였던 홋카이도는 차지하지 못했지만.
사할린 남쪽이랑 쿠릴열도 먹은 걸로 만족."

어쩌면 한반도가 
듣보잡이었던 게,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막을 수 있었던 
결정적 원인일 수도 있었다.
moon_special-40


● 장제스의 패퇴 : 일본이 빨리 회복할 수 있었던 이유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강대국들에 의해 치안이 유지되는

개방적이고도 평화적인 세계라는,
미국의 희망이 이루어지려면 

UN 상임국 중 하나인 중국이
어느 정도는 강력하게 성장해줘야만 했다.

그러나 중국의 장제스 정부는 
제대로 역할을 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은 장제스 정부를 
밀어주고는 있었지만,

그의 정권은 부패하고 무능한데다
대중적 지지 또한 약했다.

1945년 당시 중국에서는 
전체 인구의 1/4을,  
마오쩌둥의 공산당 세력이 지배하고 있었고

마오쩌둥은 대중들의 민심을
휘어잡고 있었다.

때문에 미국에서는
불만이 많았다.

moon_and_james-78
"부패한 장제스 대신에
다른 제3의 세력을 지지해줘야 합니다."

하지만 마땅한 인물을 찾기 힘들었다.

 트루먼
"지금은 장제스 정부를 지원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싫든 좋든, 장제스가 
대의명분을 잃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은 계속해서 
장제스에게 돈과 무기를 쏟아붓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국민당 정권을 살리기 위해

군사적으로 개입할 생각까지는
하고 있지 않았다.

대신에 아시아에서 중국을 대신할
강력하고 친서방적인 세력을 찾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일본의 부활이었다.
(앨런 브링클리,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3권 p.282~283)

 트루먼
"별 수 없어. 
아시아에서 중국이 아니면, 일본밖에 없잖아."

사실 1945년부터 일본은 
맥아더의 군정 하에,

비교적 엄격한 점령 정책을 
시행 받고 있었던 터였다.
▲ 맥아더와 텐노

하지만 트루먼의 
새 방침이 떨어지자,

이후로 일본에서는
산업 발전을 막는 모든 제한적 조치가 철폐되었고

때마침 한국전쟁 특수까지 겹쳐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게 된다.
▲ 1956년 일본은 전쟁 전 수준으로 회복하게 된다.

결국 일본의 재기는
장제스의 몰락이 가져온,

뜻하지 않은 
선물이었던 셈이다.


● 트루먼 독트린 (47년 6월)

1945년 말까지
유럽의 절반이 공산화되었다.

미국은 더 이상의 확산을 막기 위해
새로운 외교 정책을 공표했다.

그것은 '봉쇄'였다.

 트루먼
"개방된 세계는 이미 글렀어."

 트루먼
"소련이 더 커지기 전에 
여기서 틀어막고, 왕따를 시켜버리는 게 최선임."

때문에 미국은 동유럽 전체를
막아서 공산권을 고립시키는데 주력하게 된다.

 트루먼
"사회·경제·군사 전반에 걸쳐 
공산권을 철저히 고립시키자능."

여기에 영국도 맞장구쳤다.
그 유명한 '철의 장막'이라는 표현을 곁들였다.

 처칠
"공산세력은 스스로 발틱해에서 아드리아해까지 
'철의 장막'을 두르고 있다능."

한편, 동유럽을 싹쓸이한 스탈린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눈독을 들였던 곳은
터키와 그리스였다.

터키를 점령해서,
지중해의 통제권을 차지하려고 했던 것은
러시아의 오랜 숙원사업이었고

100년 전 크림전쟁의 실패로, 
못다 한 꿈을 이루고자

스탈린은 터키를 보면서
잔뜩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때마침 그리스에서는
공산주의 세력이
정부를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었다.

moon_and_james-13
"뜨아! 이제는 남유럽까지 
소련의 공산당 세력이 넘보고 있다!"

하지만 영국이나 프랑스는
예전처럼 그리스와 터키를 도와줄 수가 없었다.

"지금 내 코가 석 자라능!"

결국 미국만이 
위기에 봉착한 이 두나라를 구원할 수 있었다.

미국은 즉각 
단호한 정책을 공표했다.

 트루먼
"앞으로 미국은 반공을 표방한 정부에 대해서는
경제적·군사적 원조를 아끼지 않을 것임."

일명 트루먼 독트린이었다.

나라와 국민이 가난해지면
쉽게 공산주의 유혹에 빠지게 되니,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서
공산주의 확산을 막겠다는 의지였다.

결국 미국은 그리스와 터키를 돕기 위해 
4억 달러를 지원해준다.

그리고 이런 미국의 지원은 
그 효과가 분명했기 때문에

소련은 터키를 포기하게 되고,
그리스에서도 공산주의 세력은 분쇄되게 된다.

 스탈린
"아놔.."

그리고 효과를 실감한 미국은
이후 30년 이상을

냉전시대의 기본 외교정책으로서
'트루먼 독트린'을 활용하게 된다.

moon_and_james-83
"반공을 표방하면,
우리가 돈과 무기를 주겠다능."


● 마셜 플랜 (1947 ~ 1951)

그리스와 터키를 
원조해주는 것을 시작으로

미국은 서유럽 전체의
경제적 재건을 돕겠다는 계획을 하게 된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었다.

moon_and_james-71
"유럽을 빨리 재건시켜서
스스로 먹고살도록 해줘야지."

moon_and_james-45
"우리가 언제까지 
유럽을 먹여 살릴 수는 없는 일."

moon_and_james-44
"또 유럽이 경제적으로 성장해야만
우리 상품을 팔아먹을 수가 있다능."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반공(反共)을 위해서였다.

moon_and_james-58
"서유럽이 허약해지면
결국 소련이 다 쓸어먹게 됨."

moon_and_james-78
"가난은 공산주의의 욕구를 
자극하게 하는 일등공신!"

결국 1947년 6월, 미국의 국무장관 마셜은 
대대적인 프로젝트를 기안하게 된다.

 마셜
"내 이름을 따서 마셜플랜이라능."

이때 마셜플랜은 대담했다.

 마셜
"동유럽과 소련도 가리지 않겠음.
누구든지 돈이 필요하면 말하라능."

하지만 소련은 재빨리 거부했다.

 스탈린
"동유럽에 미국의 영향력을 키우려는 속셈이다!"

아울러 동유럽 위성국가들의 
집안 단속도 철저히 했다.

 스탈린
"저런데 현혹되지 말라고.
우리도 곧 지원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겠어."

때문에 소련은 47년 9월,
재빨리 '코민포름'을 창설하여 

동유럽 국가들을 
블록 안으로 묶어둬야만 했다.

어쨌든 미국의 당근책에
서유럽 16개 국가들은 기꺼이 참여했다.

"반소! 반공!" 

"미국 달러 땡큐!"

다만 미국 내 여론이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 끝나자, 전쟁 특수도 사라졌고
군인들의 귀향으로 일자리가 부족했던 상황이었다.

moon_mad_angry_edition-7
"아니, 왜 정부는 돈을 
못 퍼줘서 안달인 거임?"

하지만 1948년 2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미국 내 반대 여론은
하루아침에 모두 사라졌다.

moon_and_james-11
"헐! 이젠 중부 유럽까지 
공산당이 손을 뻗히는군."

moon_and_james-24
"역시 반공을 위해서는
유럽을 적극 지원해줘야 한다능!"

결국 1951년까지 약 3년 동안 미국은 
총 130억 달러의 원조금을 서유럽에 쏟게 된다.
(당시 우리나라의 1년 GDP가 15억 달러 수준이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국가(녹색), 지원액(빨간막대)

이후 서유럽 경제는
빠르게 회복할 수 있게 되어

1950년이 되자, 서유럽의 산업 생산은 
64%나 증가하게 되었고

회원국 내의 공산주의 세력은 
크게 감소하게 되었다.

또 유럽의 경기가 살아나니
미국도 이들 국가들과 
다시 무역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결국 미국으로서도 이득이었던 것이다.


● 베를린 봉쇄 (48년 6월)

미국은 독일의 재건이 
서방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트루먼
"독일의 세 지역을 일단 하나로 합칩시다."

그러자 영국과 프랑스도
이에 합의를 했다.

 
"알겠슴돠."

하지만 스탈린은 강력히 반발했다.

 스탈린
"누구 맘대로 합쳐?"

그리고 이에 대한 항의로
베를린의 서쪽 지역을 완전히 차단해 버렸다.

 스탈린
"좋아, 그렇게 나오다면
서베를린은 우리가 모두 차지해버리겠다."

당시 서베를린에만
240만 명의 독일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moon_and_james-13 
"뜨아! 우리는 고립됐어."

미국은 강력히 항의했지만,
그렇다고 전쟁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트루먼
"어쩔 수 없군. 
공중 보급으로 서베를린의 시민들을 살려라!"

이때부터 미국은 
전대미문의 엄청난 공중 보급을 시작하게 된다.

작전에 투입된 미군 수송기는 
1,000여 대를 육박하고 있었고,

하루에 6천 톤가량의 
엄청난 물자가 공수되었다.

공수 물자는 초기에는 
식량과 석탄 등의 필수품이 주류를 이뤘지만,

점차 사탕·초콜릿에서부터
담배·커피 등의 기호품으로 확산됐다.

워낙 공수 물자가 많았기 때문에
서베를린 주민들은 

오히려 집집마다 
식량을 가득 쌓아두기까지 했었다.

소련은 아연실색했다.

 스탈린
"이것들을 대공포로 쏠 수도 없고,
하여간 미국 돈 많네."

결국 봉쇄 8달 만인 49년 5월에
소련은 봉쇄령을 해제하고 만다.

하지만 미국은 
소련이 훼이크를 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수작전을 다섯 달이나 더 하다가 
49년 9월, 공식적으로 작전을 종료했다.

결국 베를린 봉쇄는 
대실패로 끝났고,

오히려 미국의 가공할 
경제력과 동원력만을 재입증시켜주고 말았다.

그리고 49년 10월, 
독일은 분단을 공식화하고

서독과 동독은 각각 따로따로 
건국을 하게 된다.


● 냉전체제의 완성

베를린 봉쇄 작전으로 인해
미국과 서유럽은 급격히 동맹을 가속화했다. 

moon_and_james-24
"스탈린은 사악한 악마야."

moon_and_james-39
"공산세력을 물리치기 위해서
모두가 미국을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능."

이런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결국 49년 4월, 서방의 12개국은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를 창설하는 데 서명을 하게 된다.

"이제부터 한 회원국에 대한 군사적 공격은
전체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겠다능!"

이후로 나토 국가의 영토에는
미군이 상주하게 된다.

그러자 나토의 결성에 자극받은 소련은,
서둘러 동유럽 국가들과 군사적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그 동맹은
1955년 바르샤바 조약으로 공식화됐다.

moon_special-28
"다만, 나토에는 영국·프랑스·서독·이탈리아 등
잘 나가는 나라들이 많았지만.."

moon_special-26
"바르샤바 조약 회원국들은
그야말로 소련과 조무래기 위성국들이었지."

그렇더라도 소련의 성장은 무서웠다.
여기에 중국이라는 예기치 않은 복병도 가세했다.

1949년 9월, 소련은
서방세계의 예상보다 몇 년이나 앞서서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게 된다.

moon_special-28
"미국에 심어놓은 간첩이
원자폭탄의 정보를 소련으로 누출하게 된 것이었음."

그러자 많은 미국인들이 
경악하고 공포에 빠졌다.

moon_and_james-70
"뜨아!"

또 다음 달에는, 중국에서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놀라운 속도로 붕괴되고 있었다.

moon_and_james-78
"이건 또 뭐야?"

결국 장제스는 자신 측근과 잔여 병력들과 함께
대만으로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중국 본토 전체는 
공산주의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moon_and_james-76 
"으악!"

당시 미국인들이 받았던 충격은 
실로 대단했다.

결국 트루먼은 
미국의 외교 정책을 철저히 수정하게 된다.

그 결과 이런 방침이 내려진다.
(앨런 브링클리,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3권 p.289~290)

 트루먼
"앞으로 공산세력이 
도발하는 지역은.."

 트루먼
"전략적·경제적으로 가치가 있건 없건 간에
어디든지 달려가서 막겠다."

그리고 미국은 한국전쟁을 통해 
수정된 전략을 고스란히 실천으로 옮겼던 것이다.
▲ 부산에 상륙한 미군

이후 1950년대가 되면
미국은 반공주의가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레드 콤플렉스가 만연하였고
매카시즘이라는 마녀사냥도 활개치게 되었다.

냉전이 본격화된 것이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