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
● 검은 화요일
1920년대 미국은 경기는 호황세였고
주가는 계속 상승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차를 몰고, 넓은 집에서 살았고,
여가생활을 즐겼다.
역사학자들은 당시 미국인들을 두고
'광란의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1929년 10월 29일이 되자,
모든 게 종료됐다.
(이날은 검은 화요일로 지칭된다.)
그동안 부풀어 오르기만 하던 거품이
마침내 터져버린 것이다.
이날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한 사람이 대량으로 주식을 팔았다.
"아무래도 요즘 분위기가 뒤숭숭해."
해당 종목의 주가가 뚝! 떨어졌다.
그러자 이게 신호탄이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은 의아해했고,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동안 너무 잘 나간다 했었어."
"맞아! 드디어 올 것이 왔어."
역시 주식은 대중심리가 지배한다.
곧 너도 나도 주식을 팔았다.
수습이 불가능한 상황에 치달았다.
팔려는 사람만 잔뜩 있고,
사려는 사람은 도통 없었다.
결국 하루 만에 주식시장은 붕괴됐고
주가는 거품처럼 꺼졌다.
주식시장은 한방에
미국의 20년치 예산을 잃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주식투자는 개인만 하는 게 아니다.
은행도 한다.
그러했으니, 주식시장이 망했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너도나도 은행으로 몰렸다.
"예금한 돈 모두 찾아야겠음."
한 사람이 찾자,
불안한 마음에 다른 사람도 찾아가고
▲ 은행 앞의 사람들
그러다가 은행이 난색이라도 하게 되면,
"은행에서 예금 인출을 거부하고 있다"
라는 소문을 퍼뜨리는 터라
더욱 인출자들은 몰려들었다.
"내 돈 내놔!"
"내 돈 내놔!"
우왕좌왕 인출 러시가 발생하자
결국 은행은 파산하게 되었고
사태는 다른 은행으로 확산되고,
미국에서는 은행들이 줄줄이 파산하게 된다.
결국 5,000개 은행이 파산했고
900만 개의 예금통장이 사라졌다.
1933년에는 은행이 없는 주(州)가
28개에 달했을 정도였다.
주식시장에 이어 은행마저 붕괴됐으니,
사람들의 재산이 순식간에 없어진 것이었다.
● 대공황
많은 사람들이 평생 동안 모은 저축과 재산이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
은행이 망하자,
곧 수많은 기업과 공장은
대출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문을 닫아야만 했다.
갑자기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속출했다.
가뜩이나 재산도 몽땅 잃었는데,
일자리마저 없어진 것이었다.
그나마 굴러가고 있던 공장들도
제품을 살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어
생산을 더욱 줄일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게 순식간에 발생한 일들이었다.
▲ 무료급식소의 사람들
이전의 경제 침체기에는
대부분의 인구가 농촌 지역에 살았던 터라
경기 침체가 오더라도,
최소한 농작물을 재배해 먹고살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시 지역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경제가 크게 침체함에 따라
산업 활동이 줄어들면서
물가가 떨어지고 실업률은 치솟았다.
10달러에 팔리던 물건들은
5달러에 내놓아도 사줄 사람들이 없자,
3달러, 2달러 자꾸만 가격이 내려갔다.
1932년 실업자는 1200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때까지 14만 개의 기업이 문을 닫았다.
당시 미국인 1억 2천만 명 중
3,400만 명이 수입원이 아예 없었다.
불과 2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일자리가 있는 사람도 급여가 크게 줄었지만,
그나마 벌이가 있다는데 만족해야만 했다.
1929년 1,040억 달러였던 미국의 GDP는
1932년에 580억 달러로 떨어졌다.
반토막이 난 것이다.
출구를 찾지 못하고 비관한 사람들은
비관하여 다리 위에서 뛰어내렸고
도시에서는 굶주린 사람들이 줄을 이어
무료 급식소를 전전하고 있었다.
이것이 세계 최고 부자 나라, 미국에서
바로 1930년대에 발생했던 일이다.
그리고 미국의 대공황은
곧 유럽과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 대공황 당시의 영국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나라였기 때문에
그 여파는 상당했다.
영국이나 독일과 같은 주요 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공장들이 문을 닫았기 때문에
그동안 수입해오던 철강, 부품, 원자재 등을
제대로 공급받을 수 없게 됐다.
▲ 대공황 당시의 프랑스
또 미국인들의 소비가 크게 위축되었기 때문에
미국으로의 수출도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유럽의 공장들도
줄줄이 문을 닫아야만 했고
유럽에서도 역시 실업자들이 넘치고
굶주린 사람들이 거리를 전전하게 되었다.
결국 미국의 악순환은
마치 바이러스처럼, 유럽과 전세계로 확산되었던 것이다.
● 대공황의 원인
대공황의 원인은 무엇일까?
주가 폭락이었나?
주가 폭락은 경제가 병들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일 뿐이다.
문제의 원인은, 1920년대에 미국인들은
너무 과다 투자를 했다는 점이다.
포드 자동차의 대량생산 혁명과
1차 대전의 특수로
1920년대가 되자, 미국은
이전에 없었던 엄청난 경제 호황을 누리게 됐다.
때문에 당시 미국인들의 생각은
제품은 만들기만 하면, 저절로 팔린다는 생각이었고
무리하게 돈을 빌려서라도
큰 공장들을 마구 지었다.
특히 포드 식 대량생산의
달콤한 매력에 빠진 공장주들은
새로운 장비와 기술을 동원해
보다 적은 비용으로, 보다 높은 생산을 하는
효율성만을 강조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기계가 인력을 대체하게 되면서
공장의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아놔, 물건만 많이 만들면 뭐 하나?
사줄 사람이 있어야지."
하지만 사람들은, 병에 걸리기 전에는
건강의 소중함을 모르는 법이다.
당시 경영자들의 생각이다.
"회사의 덩치를 키우려면
주주들이 회사의 주식을 많이 사줘야 함."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회사의 실적이 좋아야만 하는데.."
"실적을 높이는 거야, 뭐 간단하지.
물건 많이 팔고, 생산비용 줄이면 됨."
"생산비용은? 그건 인건비를 줄이면 되지 뭐.
공장에 기계 많이 들여놓으면, 직원들 적게 채용해도 됨."
하지만 그렇게 실컷 만든 물건들은
과연 누가 다 사주려나?
공장 창고에 물건이 수북이 쌓이고 있어도
경영자들은 '곧 좋아지겠지'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고
여전히 주식시장에서 주가는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물건이 안 팔려도
경영자들은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깟 매출실적 나쁘면 어때.
회사의 주가가 이렇게 높아지고 있는데.."
주주들도 마찬가지였다.
최근 수년 동안 주가는
계속 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돈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이런 매혹적인 시장을 놓칠 리가 없었고
사람들은 돈이 없어도
빚을 져서라도 주식을 사고자 했다.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라도
주식투자만 잘만 하면 쉽게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에
역시나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일부 주식은 며칠 만에
가격이 두 배 혹은 세 배까지 뛰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게 거품이었다.
애초에 주식시장의 가치는
실물경제 수준을 크게 넘어설 수 없다.
만들어진 물건의 가치는 100원인데
이걸 주식시장에서 300원, 400원으로 평가한들
과연 그런 환상의 시간이
얼마나 오래가겠는가!
● 후버 대통령과 후버빌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대공황을
후버 대통령 탓으로 돌렸다.
"대공황은 모두
못난 대통령 때문이다!"
그러나 시장경제체제에서, 대통령 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경제를 흔들 수 있단 말인가?
"우리 나라에서도
대통령에 대한 환상이 매우 크지만.."
후버 대통령의 진짜 책임이라면
경제를 지나치게 방임했다는 점에 있었을까?
"하지만 당시 미국인들의 생각은
정부는 시장에 지나치게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음."
그는 1928년 대통령 선거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후버
"미국의 번영은
철저한 개인주의와 자립심에서 비롯됩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철저하게
자유경쟁 시장 체제를 운영하던 미국에서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고
정부가 나서서 복지정책을 운운했다가는
도리어 비난을 면키 어려웠다.
▲ 후버 대통령 연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후버 대통령은 분명 억울했다.
후버
"왜 내가 집권하자마자,
대공황이 터지는겅미?"
하지만 경제 상황은 매우 나빴다.
이럴때 모든 화살은 대통령에게 쏠리기 마련이다.
당시 집을 잃은 수만 명의 미국인들이
나무토막과 판자로 만든 허름한 판자촌에서 살았는데
사람들은 이런 마을을 후버의 이름을 따
'후버빌'이라고 불렀다.
사실 후버 대통령은
경제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었다.
여기저기서 공공사업을 벌였고,
은행과 기업들이 파산하지 않도록
정부에서 막대한 돈을 빌려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의 집권기에는
별다른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기에
그는 최악의 대통령 중 한 사람으로
오늘날 미국인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뉴딜정책
● 적색 공포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은 빨간색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왜 그랬을까?
색깔 자체를 두려워하기보다는
그 색깔이 상징하는 공산주의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던 1917년,
러시아에서는 공산혁명이 일어나
소련이라는 공산주의 국가가 탄생했다.
이때 소련을 상징하는 깃발이 빨간색이었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공산주의자를 '빨갱이(Reds)'라고 불렀던 것이다.
"빨갱이라는 말을
우리나라도 직수입하게 된다능."
그렇다면 미국인들은
왜 그토록 공산주의를 두려워했던 것일까?
공산주의는 사유 재산을 부정하고
정부가 모든 토지와 산업을 소유하며
자원과 물자를
분배해주겠다는 체제인데,
그렇다면 사유재산 인정과
철저한 자유경쟁을 추구하던
미국식 자본주의와는
너무도 상극이었다.
또 공산주의는 체제를 유지하려면
강력한 전제주의 정부가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에
지도자는 곧 모든 권력을
독점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 또한, 개인주의가 만연된 미국인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미국 기득권자들의 생각이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여전히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사회적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언제 미국의 노동자들이
러시아처럼 들고일어나서
미국식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키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때문에 미국의 기득권자들은
불안해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런 상황에서 사회주의적 마인드를 가졌던
여러 인사들이 테러를 당하고, 체포당해야만 했었다.
이것이 1920년대
미국을 쓸고 간 적색공포였다.
● 계획경제 : 소련과 케인즈
경제가 파탄 나자 보수 정권이 물러나고,
그 자리를 진보 정권이 꿰차고 들어서게 됐다.
우리나라의 IMF 사태를 말하는 게 아니다.
1933년 미국도 그러했다.
1933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루스벨트는
취임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와는 그냥 성씨만 같은 먼 친척이다.)
루스벨트
"우리의 유일한 공포는
바로 공포 그 자체임돠."
루스벨트
"공포를 버리고
공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노력합시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위기를 타개한단 말인가?
루스벨트는 '계획경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학자들의 조언이었다.
"요즘 전세계가 경제위기로 휘청거리고 있는데
소련은 매년 경제성장률이 두 자리 숫자임돠."
루스벨트
"헉! 어떻게 그게 가능함?"
"바로 계획경제에 그 비법이 있슴돠."
당시 소련은 1928년에서 1932년까지
이른바 경제개발계획 5개년을 실시하고 있었고,
불과 5년 사이에 낙후된 농업국가에서
발달된 공업국가로 발전시키고 있었다.
때문에 서방의 정치가들은
소련의 성공에 주목하고 있었고,
정부의 간섭이 적을수록 좋다고 생각했던
기존의 미국인들도 점차 '계획경제'를 달리 보기 시작했다.
▲ 1930년대 미국인 10만명이 소련으로 이민을 가기도 했었다.
소련으로 이민을 가기 위해, 비자를 신청하고 있는 미국인들
오히려 새로운 트렌드로 '계획(plan)'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경제학계에서도
고전학파 사상에 반하는,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고 있었으니
그 중심에는 케인즈가 있었다.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즈는
이런 대책을 내놓았다.
케인즈
"보이지 않는 손으로 경제를 방임하는 것은
더 이상 해법이 될 수 없다."
케인즈
"정부가 보이는 손이 되어
경제에 깊숙히 관여해야만 한다!"
이때 케인즈는 루스벨트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케인즈
"지금 미국이 곤란하다는 걸 잘 압니다.
이럴때 계획경제를 실험해야합니다."
케인즈
"자본주의의 고질병을 고칠 수 있는 실험입니다.
미국이 세계의 대표가 되어 주십시오."
● 뉴딜정책
루스벨트는 취임하자마자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루스벨트
"그래, 계획경제를 함 해보는거야!"
곧 수십 가지의 계획을 묶어
'뉴딜(New deal)'이라는 이름의 정책을 내놓았다.
대충 이런 것들이 있었다.
루스벨트
"앞으로 증권시장과 은행은,
와르르 무너지지 않게
국가가 관리·감독하겠음."
루스벨트
"은행이 파산하더라도
예금자들은 저축을 보상받을 수 있음."
루스벨트
"노인 연금과 실업수당 등의
복지 혜택을 보장하겠음."
루스벨트
"테네시 강 유역의 댐 공사를 대대적으로 해서
수십만 명의 일자리를 제공하겠음."
루스벨트
"여러 분야에서 일자리를 창출하겠음.
나무 심기, 도로 건설, 터널 공사, 벽화 그리기 등등."
흔히 뉴딜정책하면,
댐공사 하나만을 생각하지만,
이렇게 다양한
정책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후 뉴딜이 가져온 효과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400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었는데,
이는 곧 소비자 1200만 명의 증가를 의미했다.
▲ 도로공사하는 일꾼들
1200만 명이 돈을 쓰기 시작하니,
다시 공장은 하나둘씩 돌아가기 시작했고
은행이 파산하더라도
저축을 보상받을 수 있다니,
사람들은 예전처럼
은행에 안심하고 예금을 했다.
▲ 벽화를 그리는 사람들
또 은행으로 돈이 들어가니,
공장들은 대출을 받아 투자를 늘려갈 수 있었고
이런 식으로 차츰 경제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모든 정책이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실패한 것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효과가 상당했기에
오늘날 뉴딜정책은 성공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 뉴딜의 파급효과
뉴딜은 미국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정부의 조직과 권한은
이전보다 매우 커졌고,
어느덧 국민들은
정부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복지정책을
공산주의적인 발상이라 매도하지도 않았다.
"경제에는 중산층이 많아져야
대중소비가 활발해져 성장을 견인한다능."
그런가 하면 경제학에서는
'거시경제학'이 새롭게 만들어졌다.
이전까지 경제활동은
철저히 가계와 기업 간의 관계였기 때문에
정부가 개입할 여지가 없었지만
뉴딜정책으로 인해,
'정부'라는 새로운 경제주체가 등장하게 되었고
물가·실업률·경제성장률 등이
새로운 지표로서 주목받게 되었다.
"대신 공부할 양은 2배로 늘어난.."
예전에는 경기가 호황이면
사람들은 마냥 좋아하다가도
불황이 찾아오면
어서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는데,
이후로는 경기가 호황이면
정부는 세금을 더 많이 걷는 식으로
과열 경기를 조정했고
반대로 경기가 불황이면
공공투자를 늘리는 식으로
적극적으로 경기를 부양했다.
때문에 F. 루스벨트는
자본주의의 제2의 위기를 넘긴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2차 세계대전
● 2차세계대의 발발
하지만 대공황은 뉴딜 정책 덕분에
벗어난 게 아니었다.
읭?
뉴딜은 약 400만 명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었고,
덕분에 1,200만 명의 유효 소비자가 등장하게 됐다.
큰 도움이 되긴 했지만,
그러고 나서도
900만 명이나 되는 실업자가 남아 있었다.
대공황을 끝내려면
뉴딜보다 좀 더 규모가 큰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그런데 구세주가 나타났다.
그것은, 다름 아닌 2차 세계대전이었다!
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은
모든 이들이 일자리를 갖게 되었고
1943년에는
일손이 모자를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왠지 상황이 묘하다.
미국은 30년 전에도 그랬었다.
T. 루스벨트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며
경제를 부흥시키기는 했지만, 완벽하지는 못 했다.
그럴 때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서
엄청난 경제 특수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F. 루스벨트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며
경제를 부흥시키기는 했지만, 아직 완벽하지는 못 했다.
이럴 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그것도 또다시 유럽에서!
● 2차대전의 특수
유럽에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국은 입이 찢어졌다.
무기와 식량, 의류용품은 전례가 없는
대량생산 체제에 돌입하게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에 미국은
항공기 30만 대
탱크 8만 8천 대
군함 7600 척
소총 2천만 정
실탄 400억 발
등을 비롯해, 수많은 차량과 무기 등을
생산할 수 있었다.
이때 군수공업에 투입된 인원들만
4천300만 명에 이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인력이 부족했다.
때문에 당시 군수공장에서는
수많은 여자들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을 흔히
'리벳공 로지'라 불렀었다.
'철판에 리벳을 박는 로지 양'
이라는 포스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우린 할 수 있어!"
2차 대전 중 미국에서는 총 1천만 명이
군인으로 징병이 되었기 때문에
이를 메꾸기 위해서라도
여성들이 군수공장에서 일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지만,
부자 나라 미국에서도
전쟁 중에 물자 아끼기 운동은 대단했었다.
어린이는 고철과 고무를 모았고,
여성들은 가족의 헌 옷을 수선했다.
가정에서는 텃밭을 이용해
채소를 기르자는 운동도 일어났다.
시민들은 카풀을 하고,
난방을 줄여 연료를 절약했었다.
또 모든 국민들은,
버터·설탕·커피·고기·가죽신 같은 소비재를
제한된 양만 살 수 있는 배급표를 받았다.
결국 풍요로운 나라 미국에서도
전쟁 기간 중에는 전 국민이 총력전에 동원됐었고
그것도 모자라서
아껴 쓰기 운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 미국인들에게는
대공황이라는 국난의 역경을 이겨낸,
값진 경험이 있었다.
어쨌든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상황은 더욱 눈부셨다.
석유 생산량은
전세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고
전세계 제조업의 절반도
미국이 차지하고 있었다.
금 보유고의 2/3가
미국에 귀속됐다.
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의 GDP는
불과 4년 만에 2배로 늘었고,
이는 유럽 전체(소련 제외)의 GDP와
혹은 아시아 전체의 GDP와도 맞먹는 수준이었다.
가히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