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량생산 혁명
● 포드식 대량생산 방식
'말 없는 수레'
자동차는 19세기 후반에 발명되지만,
당시만 해도 자동차는
부자들 전용의 값비싼 장난감이었다.
▲ 1903년의 자동차
이럴 때 미국의 사업가, 헨리 포드는
일반 대중도 탈 수 있는 자동차를 만들고 싶었다.
헨리 포드
"자동차를 대량생산할 수만 있다면 떼돈을 벌 텐데,
어디 방법이 없을까?"
포드는 매일같이 궁리했다.
헨리 포드
"돈, 돈, 돈.."
그러다가 노동자들이
자동차를 조립하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던 중
곧 하나의 영감이 떠올랐다.
당시만 해도 노동자들은 차 한대를 가운데 두고
돌아가면서 조립했다.
그러다 보니 부품을 장착할 동안
차체를 조립하는 노동자는 손을 놓고
차체를 조립하는 동안에는
부품을 달던 노동자들은 손을 놓았다.
"난 다했삼. 이제 너 차례."
당연히 노동자들의 대기시간이 길어졌고
왔다 갔다 하느라 이동시간도 길어져
하는 일에 비해서
노동자들은 매우 피곤했고,
차 1대를 만들려면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나사 끼웠으니
이제 돌아가서 쉬어야지."
따라서 불필요한 시간들을 없애고
노동자들이 쉬지 않고 생산에만 몰두하게 한다면
쓸데없는 인건비도 줄일 수 있고
대량생산도 충분히 가능할 일이었다.
그런 생각에 미치자,
포드는 곧 묘안이 떠올랐다.
노동자가 아닌,
차를 이동시킨다면 어떨까?
차를 이동시켜, 노동자들 앞으로 지나가게 하면
쓸데없는 시간이 대폭 줄어들지 않는가!
핸리 포드는
아이디어를 실천해보기로 했다.
먼저 움직이는 벨트 위에
조립할 자동차를 올려놓고
노동자들에게는 각자 맡은 임무를 주어
조립할 자동차가 도착하면
자신들 앞에 놓인
부품을 맞춰 끼워 넣도록 하였다.
헨리 포드
"이제부터 각자 맡은 임무만 하면 된다능."
그렇게 부품을 놓는 직원과 조립하는 직원,
볼트를 박는 직원과 너트를 끼우는 직원
너트를 끼우는 직원과 조이는 직원
모두에게 각각의 임무를 주었다.
그리고 1908년 디트로이트의 공장에서 이뤄졌던 이 실험은
곧 엄청난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컨베이어 벨트가 돌자
노동자들은 분주하게 주어진 부품을 끼워 넣었고
한쪽에서 부품이 놓이기 무섭게
반대편에서는 T형 자동차가 완성되어 나왔다.
"나는 나사만 끼우면 된다능."
"나는 핸들만 달면 된다능."
예전에는 하루에 2~3대 만들던 자동차가
이제는 하루에 수천 대씩 만들어졌고,
급기야 1924년에는
24초에 1대씩 생산됐다.
그러한 대량생산은
곧 자동차의 가격을 혁신적을 낮췄다.
1908년 850달러이던
T형 자동차의 가격은,
1915년에는 440달러로 떨어졌고
1924년에는 290달러로 떨어졌다.
1913년에 사람들은 평균
2년을 모아야 살 수 있었던 T형 자동차가
1924년에는 3개월이면 충분했다.
▲ 자동차로 넘친 거리
● 자동차가 바꿔 놓은 세상
포드의 공장이 생산한 T형 자동차는
곧 미국을 크게 변화시켰다.
그것은 가히 혁명과도 같았다.
그때까지 미국인들은
평생토록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반경 30km를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곧 집집마다
자동차를 갖게 되었고,
고향 바깥으로 나갈 기회가 거의 없던 사람들이
자동차를 몰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게 되었다.
▲ 1920년대 미국
자동차가 대중화되자
미국 전역에서는 도로공사가 일어났고
덕분에 수많은 일거리가 창출되었다.
사방으로 뻗어 가는 도로망은
미국을 하나로 통합하기 시작했고
이제 사람들은 차를 몰고
출퇴근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직장 근처에 살 필요가 없어진 이들은
하나둘씩 교외로 빠져나갔다.
▲ 당시 교외에 대대적으로 들어선 주택들
때문에 도시 주변의
근교 지역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모텔과 주유소,
쇼핑센터와 슈퍼마켓이 곳곳에 생겨나게 되었다.
자동차가 없었더라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던 상황들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이런 포드의 생산방식은
다른 제조업 분야에서도 광범위하게 응용되었으니,
"세상에, 이렇게 엄청난 생산방식이 있었다니!"
자동차뿐만 아니라
곧 모든 산업의 생산방식을 바꿔놓았다.
대량생산을 위해
공장주들은 부품을 규격화하였고
"마치 프라모델의 조립식 부품처럼.."
노동자들은 각자 맡은
단순하고도 전문적인 일만 하면 그만이었다.
"때문에 당시 노동자들은 마치 로보트와도 같았고
완성품들은 개성이 좀 부족했지.."
▲ 표준화만 강조하다보니, 자동차의 모양새가 모두 똑같았다.
어쨌든 이런 생산방식 덕분에,
공장주들은 보다 낮은 원가를 들이면서도
보다 많은 생산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고
미국의 경제는
더욱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1920년대 미국의 경제는
영국, 독일, 프랑스를 모두 합한 것과 비슷했다능."
한편 포드의 대량생산 방식은
노동자들에게 높은 임금을 보장하게 되었다.
왜일까?
조립라인의 단조로운 작업은
노동자들에게 싫증을 느끼게 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이직을 막기 위해서라도
공장주들은 임금을 높여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노동자의 기계적인 삶을 풍자한, 찰리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하루 종일 나사만 끼워보라능."
하지만 고임금은,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자동차를 구입할 능력이 있는 소비자들을
보다 많이 만들어 냈기 때문에
결국 포드와 같은
공장주들에게도 이익이 됐다.
1차 세계대전
● 1차 세계대전의 특수
이럴 즈음 미국의 성장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던
일대의 사건이 발발한다.
바로 1차 세계대전이었다.
1차 세계대전은 근원적으로 볼 때
근대화의 후발 주자 독일이
영국, 프랑스가 독식하고 있는
제국주의의 판도를 뒤엎어보자는 심리로
발발한 전쟁이었다.
빌헬름 2세
"우리의 공업생산력은
이미 영국, 프랑스를 능가하고 있는데.."
빌헬름 2세
"식민지는 영국, 프랑스 넘들이
모두 다 차지하고 있으니.."
여기에 유럽의 두 늙은 제국,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투르크를
독일이 끌어들이면서 판이 커진 전쟁이었다.
빌헬름 2세
"너희들도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싶지?
그럼 나한테 붙어."
때문에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 발발했던
사라예보 사태는
단순히 게르만족 지배에 반발한
슬라브족의 저항이 아니었다.
▲ 참호 속의 러시아군
언제든지 침략의 핑곗거리를 찾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 독일과 같은 유럽 강대국들이
'옳거니 잘 됐구나'라는
기회주의적인 심리로 일으킨 전쟁이었던 것이다.
▲ 기관총을 쏘고 있는 영국군
어쨌든 이런 식으로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곧 미국도 심하게 요동쳤다.
많은 사람들이 유럽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현상이었다.
특히 이주 역사가 짧은 이들에게는
곧 부모의 나라이기도 했다.
"헉! 고향의 부모님들은 모두 무사하실까?"
하지만 처음 미국은 중립을 선언했다.
윌슨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어느 편도 들지 말라고 당부했다.
영국뿐만 아니라,
독일에게도 무기를 팔아먹던 미국으로서는
애써 손님을 내쫓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유럽으로부터 밀려드는
군수물품과 철강제품의 주문으로
공장주들은
오히려 입이 찢어지고 있었다.
"오! 이래서 남의 나라 전쟁은 좋아!"
하지만 그렇더라도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다.
근본적으로 미국에는
독일 출신의 이민자보다 영국 출신들이 훨씬 많았다.
▲ 악당으로 묘사된 독일군
이들은 심정적으로
연합국의 승리를 바라고 있었다.
"못된 게르만 넘들!"
때문에 당시 독일 출신자들은
미국 내에서 은근히 차별을 받았고
'훈족'이라는 멸시까지 받아야만 했었다.
▲ 훈족이 되어버린 독일군
"당시 영국인들은 독일인들을
동쪽의 야만인이라는 뜻에서 '훈족'이라고 비하하고 있었다능."
● 미국의 참전 결정
1915년 독일 잠수함이
영국의 정기 여객선을 격침한 사건이 발발했다.
▲ 루시타니아호 격침 사건
이 사건으로 1200명의 승객이 사망했는데
그중에 미국인도 128명이나 있었다.
때문에 당시 여론은 매우 격앙되었다.
참전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도 영국을 도와 전쟁에 참여해야 함돠!"
하지만 독일이 재빨리 사과를 했기에
윌슨은 중립정책을 고수할 수 있었다.
빌헬름 2세
"쏘리!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삼."
그러나 이후로
미국과 독일의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아오, 짜증나는 넘들!"
영국은 이걸 이용하고 싶었다.
가뜩이나 연합국 측은 자원이 거의 바닥나서
궁지에 몰린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영국은
마침내 미국을 끌어들일만한 건수를 찾게 된다.
애스퀴스 총리
"그래! 이거다!"
당시 독일은 미국의 참전을 걱정한 나머지,
멕시코를 통해 미국을 붙잡아 두려고 했었다.
빌헬름 2세
"너희 미국한테 빼앗겼던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 땅 모두 되찾고 싶지 않아?"
빌헬름 2세
"우리와 동맹을 맺자.
그러면 미국을 공격할 무기를 제공해주겠음."
이런 전보를
독일이 멕시코에게 날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걸 영국이 중간에 가로챘다.
그리고 미국에 고스란히 전해줬다.
윌슨 대통령
"뭐야? 그런 일이 있었어?"
사실이 알려지자
더 이상 미국은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윌슨은 곧 참전 연설을 발표했다.
윌슨 대통령
"우리의 평화를 위협하는 적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자 대중들은, 기다렸다는듯이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오히려 윌슨이 당황할 정도였다.
윌슨 대통령
"오늘 내가 한 연설은
우리 젊은이들의 죽음을 요구하는 메시지였는데.."
윌슨 대통령
"박수갈채를 받다니
참으로 묘하군."
한편 멕시코는 잽싸게 수습했다.
"독일이 일방적으로 꼬드긴 거지,
우린 아무 말도 안 했다능."
● 승전국이 된 미국
1917년 봄, 미국은
연합국에 해군을 지원하게 된다.
그러자 독일 U보트에 공격을 받던
연합국 측의 피해는 눈에 띄게 줄어들게 되었다.
▲ 당시 대서양의 선박을 공포에 떨게했던 독일의 U보트 잠수함
"좋았어. 효과가 있잖아."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해군 지원만으로 전세가 바뀌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1917년 말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는 연합국의 일원에서
이탈하게 되었고
그러자 독일은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몰빵할 수 있게 되었다.
"기다려라! 영국, 프랑스 넘들
본때를 보여주겠다."
하지만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예비 병력조차 거의 없었던 때였다.
"살려주라능! 미국!"
때문에 미국은 1918년 초부터
지상군을 파견하게 된다.
▲ 1차대전 당시 미군
그러자 곧 전쟁의 분위기는
바뀌게 된다.
당시 미국의 무기 수준이
유럽보다 월등하다고는 볼 수 없었지만
오랜 전쟁으로
모두가 지친 상황에서
체력이 빵빵한 군대가
새롭게 뛰어들었다는 자체만으로도
판세는 한쪽으로
급격히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 이상은 무리라능!"
결국 동맹국 중 맨 마지막으로 독일은
1918년 11월 11일, '빼빼로데이'에 항복을 하게 된다.
▲ 독일의 항복식
때문에 1차 세계대전에서
미국 역시 영국, 프랑스와 함께 당당한 승전국이 되었다.
뿐만 아니었다.
전쟁 전 채무국이었던 미국은
전쟁 후 유럽의 채권국으로 변했다.
▲ 1차대전 중 폭발적으로 늘어난 미국의 수출액
당시 채권의 규모는
무려 전 세계 자산의 40%에 해당하는 엄청난 수치였다.
"하하하! 전쟁 때문에 돈을 왕창 벌었네."
● 좌절된 미국의 야심
미국 또한 독일과 마찬가지로
근대화의 후발주자였고
쇠락한 영국보다는
오히려 경제, 산업 발전 면에서 앞서가던 나라였다.
때문에 영국, 프랑스 위주의
제국주의 판도에 미국 역시 불만이 많았다.
"영국과는 동맹이었지만
심증적으로는 독일과 같은 불만이 있었던 것임."
때문에 전쟁 이후에 있을, 협상 과정에서
미국은 기존의 질서를 깨뜨려보고 싶었다.
▲ 당시 아프리카의 상태
1919년 윌슨 대통령은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유럽으로 향했다.
그는 민족자결주의를 외칠 생각이었다.
윌슨 대통령
"모든 민족들은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능."
이를 통해서 영국과 프랑스가 가진 식민지들을
대거 독립시키고
그렇게 신생독립국들이 많아지게 되면,
미국으로서는
접근할 수 있는 시장이 더욱 많아지는 셈이었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들어줄 리 만무했다.
"우리는 전쟁으로 잃은 게 많음.
식민지를 토해내라니, 그건 도저히 용납못함."
오히려 영국과 프랑스는
윌슨이 외친 민족자결주의를
패전국인 터키와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하다 말고 도망친, 러시아의 영토를
쪼개는 데에만 이용했다.
"민족자결주의라능. 어서 독립하라능."
미국은 난감했다.
"아놔, 그게 그런 식으로 이용되다니.."
그렇다면 다음 수가 있었다.
▲ 1919년 6월 파리에서 열린 평화회의
영국과 프랑스의 기세가 너무 올라가지 않도록
독일이라도 살려두고자 했다.
윌슨 대통령
"패전국(특히 독일)을 심하게 비난하고
배상금을 과중하게 물리지 말라능."
윌슨 대통령
"그렇게 되면 패전국 국민들은
가난을 벗어나기 힘들 테고.."
윌슨 대통령
"그러다 보면 분노가 쌓여
또다시 전쟁이 발발할 수 있삼."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이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됐삼. 독일이 다시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이참에 철저히 응징을 해야 됨요."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하게 했다.
이후 윌슨의 예언대로 독일에 대한 가혹한 응징은
2차 대전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어쨌든 1차 세계대전으로 미국은 큰 돈을 벌었지만
국제적인 위상까지 가져오지는 못 했던 것이다.
광란의 1920년대
● 현대소비사회의 시작
19세기 말부터 미국은
세계 자본주의를 선도하고 있었고
그 뜨거운 열기는,
20세기 초 헨리 포드가 도안한 대량생산 방식과
1차 세계대전의 특수까지 맞물려
1920년대에는
사상 초유의 대 호황기를 맛보게 되었다.
당시 미국은 엄청난 소비사회였다.
중산층들은
전기 냉장고, 식기 세척기, 진공청소기를 샀고
▲ 1920년대 모습
사람들은 저마다 손목시계를 찼고,
담배를 피웠다.
▲ 1920년대 광고
여성들은 화장품과
대량 생산된 기성복을 구입했다.
▲ 1920년대 광고
미국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동차를 샀고,
1920년대 말에는 3천만 대가 넘는 자동차가
미국의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가구당 1.2대의 자동차가 있었던 것임.
거의 우리나라의 2000년대 초반 수준!"
사람들은 여윳돈이 많아지자
점차 문화소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런 소비심리를 놓칠세라
기업가들은 레저 스포츠 시설을 만들고
놀이공원을 조성하고
영화를 찍고, 영화관을 세우는 등 돈벌이에 나섰다.
▲ 1920년대 영화관과 영화 포스터
사람들이 테니스와 골프를 치시 시작한 것도
프로 스포츠 경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영화관에서 영화를 관람하기 시작한 것도
모두가 이때부터였다.
그레타 가르보, 클라크 게이블과 같은 영화배우는
당시 대중들의 이상형이었고
야구 선수 베이브 루스는
당대의 영웅이었다.
● 대중매체와 광고
1920년대 소비사회에 발맞춰
새롭게 부각됐던 것은 광고 산업계였다.
당시 광고계의 성장에는
1차 세계대전의 경험이 주효했다.
▲ 1차 대전의 징집 포스터
즉 전쟁을 통해
전시 선전술을 꿰차고 있었던 사람들이
'프로파간다'의 선전술을 적국의 병사들이 아닌,
자국의 소비자들을 유혹하는데 써보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자 그 효과는 엄청났다.
기존의 상품 광고는
단순히 정보만을 제공하는 기능이었지만
1920년대 광고는 보다 간결해진 반면
훨씬 감각적이었고 직설적이었다.
멋진 배우들이나 스포츠 선수들이 상품을 선전하면
왠지 더 믿을 수 있고, 매력적인 상품이 되었다.
클라크 게이블이 태우던 담배를 피우면
나 자신도 어느새
우수에 찬 눈빛의 차도남이 되어버렸고,
베이비 루스의 콜라를 마시면
나도 따라서 힘이 넘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런 효과적인 광고 덕분에
미국의 소비사회는 더욱 확고해질 수 있었고
산업은 보다 발전할 수가 있었다.
물론 이러한 광고산업의 발달은
대중 매체라는 촉매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 당시 지하철 역사 안의 모습
당시 신문과 잡지는
전국적 유통망을 통해 전국적으로 보급되고 있었고,
한 해 영화 관람자 수만
1억 명에 육박할 정도였다.
특히 1920년부터 상업 방송을 시작한 '라디오'는
미국을 광고 사회로 만드는데 첨병의 역할을 했었다.
말하자면 1920년대 미국은
오늘날과 같은 현대가 시작된 시기였다.
사람들은 영화, 자동차, 대중 음악
등을 즐기기 시작했고
스포츠뿐만 아니라 콘서트, 뉴스, 엔터테인먼트, 광고가
라디오를 통해 전송되었던 때였다.
오늘날 대중들의 소비패턴과
거의 다르지 않았던 시기였고
그걸 미국인들은
90년 전부터 시작했던 것이다.
● 흑인과 여성 사회의 대두 : 재즈와 플래퍼
1차 세계대전으로 경제가 활기를 띠면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은
흑인들이 미국 전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91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미국에서 흑인들은 90%가 남부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경기가 호황 일로에 접어들자
북부의 공장들에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해졌다.
때문에 이 당시 200만 명에 이르는 흑인들이
디트로이트, 시카고 같은 도시로 이주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흑인들이 이주하면서
새롭게 생겨난 대중문화가 바로 '재즈'였다.
원래 재즈는 1900년대 초
미국 남부의 도시, 뉴올리언스에서 시작되었는데
흑인들이 북부 도시로 이주하면서
자연스레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었고
1920년부터 대중문화의
한 장르로 빠르게 전파되게 된다.
"당시 루이 암스트롱 같은 가수가
선풍적인 인기를 탔었다능."
▲ 루이 암스트롱
패션에도 새로운 물결이 밀어닥쳐
발목까지 내려왔던 여성들의 치맛단은
어느덧 무릎까지 올라갔다.
특히 플래퍼(flapper)라고 불리던
자유분방한 여성들은
짧은 치마를 입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립스틱을 짙게 칠하고 다녔는데,
이런 모습을 보고,
나이 든 사람들은 꽤나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여성들에게 매우 보수적이었음."
이런 플래퍼는 1920년대를 대표하고
곧 '모던'을 상징하는 여성들이었다.
그녀들은 재즈 댄스를 추었고
자동차를 몰았으며,
심지어 술과 담배를 즐기는 것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 여성 단체의 성장 : 금주법과 여성참정권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윤택해지면
점차 고차원적인 욕구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 무렵 여성들도 그랬다.
당시 여성들은 종교단체와 결탁하여
자신들의 요구를 주장하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인 여성참정권 요구와
금주운동이었다.
그런데 당시 여성들은
당최 효과적인 시위의 방법을 몰랐다.
당시 판을 쳤던, 말초신경을 건드리던,
광고의 효과를 따라 하고 싶어서였을까?
당시 여성들은 참정권을 얻겠다며
사슬로 자기 몸을 건물에 묶고
우편함을 폭파시키는 등
한사코 과격적인 방법으로
정부에 어필하려고 했다.
▲ 백악관 앞에서의 화염 시위
술 먹고 취한 남편들이
여자들을 구타한다는 데 반발하여 시작된, 금주법 운동은
▲ 술취한 남편
술집들을 도끼를 들고 부수는 식으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헉! 여자들이 더 무섭다능."
결국 정부는
이런 요구들을 모두 수용했다.
1920년부터 여성들에게는 참정권이 주어졌고
모든 술집들은 하루아침에 문을 닫아야만 했다.
졸지에 술을 마시는 것도
술을 파는 것도 모두 불법이 되어버린 것이다.
▲ 술을 버리고 있는 미국인들
● 금주법은 마피아를 만들었다
미국에서는 그렇게 금주법이 시행되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전혀 예상치 못한 폐단이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생리를 제대로 파악 못하고
정부가 일방적으로 틀어막었을 때
그 경제는 얼마나 피해를 입게 되는지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는 폐단이었다.
어떠했길래?
금주법은 미국인들을
좀 더 도덕적으로 살아가게 하려는 취지였지만
많은 사람들은
음주를 죄라고 여기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술을 마셨다.
▲ 당시 음주시위, '우리에게 맥주를 달라'
때문에 금주법은 공연히
온 나라에 범법자만 잔뜩 양산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술 마시면 범죄자라고?
까짓것 범죄자가 되고 말지.."
"정부는 대체 어떤 권리로
국민들에게 술도 마시지 못하게 하는 거임?"
"다른 나라는 안 그런데
왜 미국이라는 나라만 이러냐고!"
결국 끊이지 않는 수요는
암시장을 형성하게 되었고
높은 가격으로
거래가 형성되자,
사람들은 술을 밀조하고 밀매하면
곧 커다란 돈을 챙길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때문에 금주법이 시행된 이후로
겉으로는 이발소이나 은행이었지만
안에서는 비밀 술집을 운영하는
가게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게 되었다.
당시 주류밀매업 시장만
오늘날 돈으로 수천억 달러에 이르는 사업이었다고 한다.
"웬만한 나라의 1년 GDP 액수였다능."
때문에 이런 곳에
마피아가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피아 조직들은
아예 밀주를 만드는 비밀 양조장을 차리고
대대적으로 주류 밀매 사업에 뛰어들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밤의 시장'으로 알려진 '알 카포네'였다.
그는 밀주에서 유통,
비밀 술집의 운영까지 손을 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의 마피아는
정치인, 경찰관 심지어 재판관까지
돈으로 매수하여 결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조직을 근본적으로
발본색원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오히려 금주법은 마피아들의
돈주머니만 채워주고 있었다.
또 거액의 돈이 오고 가는
황금의 밀주 시장을 서로 차지하려다 보니
마피아끼리 기관총과 권총을 휘두르는 등
요란한 폭력전을 펼치기도 했다.
1929년 한 해에만
500명의 조직폭력배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야말로 금주법 때문에
무법천지의 폭력조직만 더욱 양성해준 꼴이었다.
결국 1933년 금주법은 폐기되게 된다.
당시 정부는 대공황으로 의기소침해진 국민들에게
의욕을 북돋아주기 위해서라고 말했지만,
"짜증 나는 세상에
술도 못 마시게 할 수는 없잖아."
그보다 재정이 궁핍해진 정부가
주류세를 뜯어내기 위한 꼼수에 가까웠다.
● 1920년대의 의미
흔히 미국의 1920년대의 대호황은
1930년대의 '대공황'에 가려 크게 부각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산이 높았기 때문에
골이 깊었던 것이다.
애초에 호황이 없었으면
공황도 없었고
주식시장의 거품이 없었으면
금융시장의 몰락도 일어나지 않았다.
때문에 대공황→2차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근원을 알기 위해서라도
1920년대 미국의 대호황시대는
제대로 알아둘 필요가 있다.
물론 1920년대 대호황 시대는
1910년대의 포드 자동차의 대량생산 혁명과
1차 대전 특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렇게 따진다면, 역사는 역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으로, 연결되고 있는 셈이다.
덧붙여 말해보자면, 1920년대를 기점으로
미국인들의 모습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이전에 미국인들의 대부분은
평생을 반경 30km 이내의, 자신이 태어난 동네에서만 살았고
마차를 타고 다니며
주로 농사를 짓고 살았고
신문이나 책을 보면서
여가생활을 즐기는 것이 전부였다.
여자들은 긴 치마를 입고
가부장제도 하에서 남편에게 순종하면서 살아야만 했었다.
▲ 1908년 미국인들
도시에서는 근로자들이 바글바글 몰린 탓에
좁은 집과 열악한 공간 속에서 살아야만 했었고
미국은 땅이 넓은 나라였지만
결코 제대로 활용할 수가 없었다.
여기에 도시 근로자 대부분은
최저 임금수준의 낮은 임금만을 받았기 때문에,
먹고사는 데에만 급급하여
여가 생활이란, 도저히 꿈도 꾸지 못했었다.
▲ 20세기 초 미국 노동자의 집
하지만 이후의 미국인들의 모습은
확연히 달라지게 된다.
집집마다 차를 몰고 다닐 수 있게 되었고,
사람들은 라디오를 통해
좀 더 다양한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높아진 임금 덕분에
사람들은 점차 여가 생활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광고는 이런 소비자들의 마음을
자극적인 방법으로 유혹했다.
사람들은 교외로 나가
좀 더 큰 집에서 여유롭게 살게 되었고
여성들은 더 이상
남편에게 순종적이지 않았고
그녀들은 스스로 참정권을 찾았고
심지어 금주법까지 만들도록 했었다.
아울러 대중음악을 즐겨듣고
남녀가 자유롭게 춤을 추고
영화를 관람하고 레저 스포츠를 즐기는 등의
▲ 1920년대 프로야구 구장
오늘날 세계인들의 보편적인 소비 방식을
1920년부터 미국인들은 영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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