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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미국의 역사 : 발명왕·철강왕·석유왕의 시대 (1870 ~ 1910)

● 특허권과 2차 산업혁명

미국이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살기 좋은 기후와 광활한 땅

그리고 유럽의 선진기술을 
일찍부터 전수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특히 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세계 문명을 선도하던 영국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던 미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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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영국과 언어도 같았고 문화도 같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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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미국은 기회의 땅으로 인식되어
영국의 고급인력들이 꿈을 이루기 위해 이주하던 곳이었음."

중남미 국가들이 
상대적으로 낙후된 스페인의 영향을 받아
제대로 성장할 수 없었던 전례만 보더라도
 
▲ 과거 스페인 식민지였던 곳 중에 현재 선진국은 없다.

미국의 성장에는 행운이 따랐던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18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영국의 산업혁명은

불과 20 ~ 30년만에 
미국에도 고스란히 전수되게 된다.
(유럽의 독일보다도 빠른 도입이었다.)

이때가 미국이 독립할 무렵이다.

당시 산업혁명의 기술만 
도입되었던 게 아니었다.

영국의 자본주의가 직수입되어
미국에서는 은행이 들어서고 주식회사가 생겨났다.
▲ 미국 최초의 은행

합리주의와 실용과학을 중시하는 풍토도 
고스란히 전수되어

미국은 건국과 동시에 특허권을 보장하는
법을 제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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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영국보다 앞서
특허권을 법으로 보장한 나라가 미국이었지."

이런 특허권 보장은
향후 미국을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유럽의 기술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나라에서
스스로 창조하는 나라로 변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 도래한 2차 산업혁명 시기에
미국이 선도적인 위치에서 
기술혁신을 주도했던 원인도

사실 '특허권'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제로 미국에서 1865년부터 1900년까지 
발명 특허로 공식적으로 등록된 것만 무려 64만여 종이었고

이는 같은 기간 
유럽 전역의 특허권 수를 합한 것보다 많은 수치였다.

당시 링컨은 이렇게 말했다.

 링컨
"특허제도는 천재의 발명이 가져올 이익에
연료를 제공하는 것이다." 


● 발명왕 에디슨

1870년대 말 유명한 발명왕, 
에디슨이 등장한다.

그가 발명한 전력은 그동안의 증기 동력을 대체했다.
경제발전의 새로운 에너지원이 탄생한 것이다.
 

전력은 곧 미국 경제발전에 강력한 원동력이 됐다.

물론 당시 과학자들도 '전기'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그 전기를 사용할 수 있게 만든 이가 에디슨이었다. 
 

사실 그는 '전구'를 최초로 만든 이도 아니었지만

먼저 발명한 영국인을 
돈으로 매수해서 특허권을 독점했던 인물이 에디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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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영국인도 최초의 발명가가 아니었다는 사실."

이후 에디슨은 전광회사를 세워 
미국 가정마다 전기를 연결했다.

결국 그의 업적은 바로 이런 '실용화'에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에디슨 
"천재는 1% 영감과 99%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라는 말로 스스로를 자위했을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가 전구의 특허권을 갖게된 이후, 
수년 동안 미국에서만 발전소가 5천 개 넘게 세워졌고

1902년에만 1800만 가구, 7천만 명에게
전기를 보급시켜 90% 가까운 보급률을 기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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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유럽은 전깃불부터 생소했던 시절이었지만
미국은 시대를 한참 앞서갔던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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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고종이 경복궁에 최초로 설치한 전구도
사실 에디슨 전기회사에서 구입한 것임."

물론 에디슨이 발명한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일생 동안 1천여 개가 넘는 발명을 해냈는데
전구는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축음기, 영사기, 실용적 장거리 전화기, 냉장고
모두 그의 발명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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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발 빠르게 영화산업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도
에디슨의 공이 컸지."
▲ 에디슨 영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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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를 최초로 만든 이는 미국인 벨이었지만
그걸 보다 실용화시킨 것은 에디슨이었음."
▲ 에디슨 전화기

1928년의 한 조사에 의하면
에디슨이 가진 특허권 사용료로 

전세계 기업이 그에게 지급한 돈이 
당시 가치로 무려 157억 2500만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현재가치 2,118억 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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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억 달러면
당시 일본제국의 전체 GDP보다 높은 수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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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로열티로 먹고산다는 얘기는
이미 100년 전부터 통용되던 얘기라는 것."

그는 이런 재력을 바탕으로 
굴지의 기업 GE를 설립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미국에는 
에디슨만 있었던게 아니었다.

수많은 발명가들이 있었고
자수 성장한 기업가들로 넘쳐났다.

또 수많은 유럽의 고급인력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을 찾고 있었다.


● 철강왕 카네기

애디슨이 전구에 적합한 필라멘트를 찾기 위해
한창 고심하고 있을 무렵,
 

사업가 앤드류 카네기도 
철강을 저렴하게 대량생산하는 방법을 시험하고 있었다.

애디슨이 필라멘트 소재를 위해
턱수염, 낚싯줄, 대나무까지 이용해봤다면

카네기는 섭씨 1650도의 고온에서
5톤가량의 금속을 집어넣고 
목숨을 건 실험을 하고 있었다.

 카네기 
"실험만 성공하면 나는 세계 제1의 부자가 되는거임."

그리고 1875년 그의 실험은 성공하게 된다.

곧 철강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미국의 철제 가격은 80% 이상 떨어졌고

1860년 수천 톤에 불과하던 생산량이
1900년엔 무려 1100만 톤까지 치솟게 된다.
 
▲ 카네기의 철강 공장

그리고 철강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지자
전에 없던 고층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미국의 대도시들은
신흥 금융가와 기업가들로 넘쳐나고 있었지만

땅이 모자랐기 때문에
고층건물을 하나의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 부분을 가능하게 해준 것이
바로 대량생산된 철강이었다.

1902년 뉴욕 맨하튼에만 
65개의 고층건물이 들어선다.
 

시카고에서는 
50여 개의 고층건물이 들어섰다.
 

고층건물이 들어서자 
동시에 승강기도 나타나게 되었다.

전에는 아무리 높은 건물도 
5층을 넘기 어려웠지만

걸어 올라갈 필요가 없어지자
건물들은 하늘로 치솟기 시작했고
고층일수록 임대료가 올라가는 기현상도 발생했다.
 

오늘날 수백만 명 급의 거대도시의 등장과
하늘 높이 치솟은 마천루는

모두가 철강의 대량생산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고

그걸 가장 먼저 실현할 수 있었던 국가는 
바로 미국이었던 것이다.

당시 고층건물의 건설 장면을 보면
눈을 의심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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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 합성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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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합성 아님!"

지상 30층, 80m 높이에서

안전모도 없이
안전장비도 없이

당시 고층건물 노동자들은 
하루 8시간씩 작업을 하며

강철 빔에 앉아서 유유자적 휴식도 취하고
그곳에서 식사도 했다.
 

물론 그러다가 미끄러지면 간다.

때문에 '접착제'로 지칭되던 베테랑 노동자들은 
절대로 초보들과 일을 하려하지 않았다.

초보들과 함께 일하면 
덩달아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100년 전 
미국의 노동자들은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했었던 것이다.

참고로 이들 노동자들은 대부분 
유럽의 이주민들이나 인디언들로서

선원 생활을 했거나
다리 건설을 경험한 인부들이었기에
높은 곳에서 일하는 것이 적응이 되어 있었다.
 

● 석유왕 록펠러

미국은 살기 좋은 기후와 광활한 영토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엄청난 지하자원도 함께 매장되어 있었다.
 

특히 텍사스의 석유만 가지고도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전세계 석유 공급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고 있었다.
 
▲ 텍사스의 유전

그 중심에 석유 재벌 록펠러가 있었다.

역사상 그보다 부자는 없었다.
전성기 당시, 그의 재산은 현재가치로 무려 3,183억 달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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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로 330조 원임. 
하루에 150억 원씩 60년을 써도 돈이 남는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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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아!"

록펠러가 정유사업의 미래를 예측하고
석유회사를 차릴 시점은 

우연히도 에디슨이 실험실에서 전구의 필라멘트로 고민하고
카네기가 용광로에서 위험천만한 실험을 했을 무렵이다.

그는 사업 확장을 통한 독점의 방식으로 
부를 쌓고자 했다.
 

때문에 유전(油田)을 독점하고, 유통망을 독점하고
거대한 설비를 통해 생산 단가를 낮춰

경쟁기업들이 
도저히 진입할 수 없도록 막았다.
 

덕분에 석유값은 
배럴당 2달러에서 3센트로 폭락했지만

경쟁사들은 생산단가보다 낮은 가격을 받고서는 
도저히 장사를 해 먹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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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잇! 더럽고 치사해서!"

그렇게 제풀에 지쳐 경쟁사가 나가떨어지면
집어삼키는 식으로(오늘날 M&A 방식) 시장을 더욱 넓혀나갔다.

그리하여 그가 설립한 스탠더드 오일 회사는
10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미국의 석유 시장의 90%를 독점하게 된다. 

이는 곧 세계시장의 
80%를 독점하게 된 꼴이었다.

때문에 석유 시장을 손안에 쥔 록펠러는

이후 석유 생산업자들을 통제할 수 있었고
가격도 원하는 대로 결정할 수 있었다.

심지어 유통라인까지 손을 대
석유를 운반하는 철도회사까지 통제하고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다는 세간의 혹평에
그는 이런 식으로 반박했다.

 록펠러 
"한 송이의 아름다운 장미를 얻기 위해서는
주위의 잔가지들을 잘라내야만 한다능." 


● 자본주의의 첫 번째 위기 : 독점시장

20세기 초까지 미국 정부는
독점을 시장경제의 순리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시장을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둔다'는 원칙은
건국 후 100여 년 동안 이어져온 미국 시장경제체제의 질서였다.

때문에 대기업들이 득세하고
독점자본화되는 과정을 

미국 정부는 약육강식의 원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기업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합병을 통해 기업을 불려서

시장과 가격을 통제할 수 있고
안정된 이익을 챙길 수 있는 '독점 기업'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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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일단 독점기업이 되자능!"

따라서 19세기 말 미국에서는
각 분야에서 시장 경쟁을 위협하는 
거대 독점기업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철강왕·석유왕·소고기왕·통신왕·철도왕·금융왕등으로 불렀다.

국가재산의 약 60%가량이
미국 인구 2%에게 집중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경제가 고속성장을 구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점의 폐단은 쉽게 무시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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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산업혁명이 도래한 이후
미국은 세계 최강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게 되니깐.."

마치 개발독재 시절 
우리의 발전과도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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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을 위해서 대기업 특혜와 
노동자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 것임!"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다.

1890년대가 되자 수많은 문제점들이 여기저기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장 심각했던 것은 노동자들의 착취였다.
 

당시 미국의 王들은 죄다 공정경쟁이 아닌, 
독점이라는 부정 편법을 통해 재산을 축적했었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인권은 철저히 무시되어
임금은 최저생계비를 겨우 웃도는 수준이었고

항의하는 노동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탄압하고 억압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주요국가 중에서 
노동자의 사망이 가장 높은 나라였다.

철강왕 카네기의 주머니를 채워줬던
펜실베니아의 피츠버그는 유명한 철강도시였지만
 
▲ 피츠버그

도시에는 하루 종일 뿌연 먼지가 날리고 있었고

수많은 노동자가 산재에 시달리고
시민들은 호흡기 질환으로 시름하고 있었다.
 
▲ 피츠버그 시내

석유왕 록펠러는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을 향해
총질을 가해 노동자 25명을 죽이기도 했었다.

혹독한 작업시간도 문제였다.

당시 노동자들은 1주일에 6일 동안
매일 평균 12시간에서 16시간씩 일을 해야만 했다.

아동 근로자들도 많아,

당시 미국에는 200만 명의 어린이들이 고된 노동에 시달렸고 
그중에는 4살짜리 아이들도 있었다.
 
 
▲ 어린이 노동자

뉴욕의 한 의류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근무 중에 이탈하는 것을 통제하기 위해
출입구에 자물쇠를 채워서 관리했었는데..

그러다가 화재가 발생하여

146명의 생명이 그 자리에서 질식사했던
어처구니없는 사건도 발생했었다. ☞ 참고
 
▲ 화재현장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자유방임정책'이 빚어낸 참담한 결과였다.


● 독과점을 철폐하라

자유시장 경제는 야생마처럼 한 세기를 질주했지만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독점 기업의 출현으로
노동자들은 늘 빈곤했고, 도시는 빈민들로 넘쳐났고
사회는 불평등했다.
▲ 당시 도시 빈민

중소기업은 성장을 방해받고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대기업의 그늘 속에서 파산했다.

19세기 말 미국은 세계 최대의 경제국으로 발돋움했지만
그와 동시에 더 이상 평등과 기회의 땅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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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드림은 개뿔!"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의 시위가 드세지고
 

언론들은 점차 추악한 사회현상을 알리고 
합리적인 시장 질서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른바 '진보운동'이 불거진 것이다.
(미국의 진보운동은 1900년부터 시작해 1920년까지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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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한 독점 기업들을 퇴단시키고
기업은 근로자들의 복리후생을 높여라!"

때문에 이 시기 정치인들은
어떻게 하면 성장의 이익을 

대다수 국민들에게도 골고루 돌려줄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안됐다.
 

1901년 대통령에 취임한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보수당이자 만년 여당인 공화당 소속이었지만

이런 대중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 루즈벨트의 연설

사실 루즈벨트는 처음에는 원하지 않았지만
워낙 국민들의 압력이 너무 컸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루즈벨트는 정책을 발표한다.

 T. 루즈벨트
"정부는 개인의 자유를 보호한다능.
그런데 독점기업들은 평등의 기회를 파괴하고 있음."

 T. 루즈벨트
"앞으로 기업이 시장에서 독점을 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강력히 제제하겠음."

그러자 王들은 기절초풍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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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아!"

석유왕 록펠러의 회사도 표적에서 살아날 길이 없었다.

언론에서는 석유대왕이 어떻게 
잔인한 방법으로 부를 쌓았는지를 재빨리 알리며
정부의 정책의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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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펠러는 사악한 악마였어!"

때문에 록펠러는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록펠러 
"알겠다능. 계열사 상당수를 해체하고
수익금의 상당수를 사회에 환원하겠다능."

그렇게 록펠러의 제국이 무너지자
연이어 다른 독점기업들도 강제로 해체되어야만 했다.
▲ 이후 스탠더드 석유회사는 34개로 분리되고,
록펠러는 뉴욕 지부를 중심으로 모빌석유회사를 운영하게 된다.

루즈벨트의 재임기간 동안 연방정부는 
40여 개의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고

소고기 독점시장, 석유 독점시장, 담배 독점시장 등을
사법부의 결정 아래 강제로 해체시켰다.

이어 노사갈등 문제에도 칼을 뽑았다.

 T. 루즈벨트
"기업들은 근로시간을 준수하고
산재 보상 기준을 강화하라능!"

 T. 루즈벨트
"근로시간은 하루 8시간을 넘기지 말라능!"

 T. 루즈벨트
"고용보험과 산재보험 확실히 지키라능!"

그런식으로 루즈벨트는 
자본주의가 진행되면서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시장실패'라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 미국의 대외 팽창

2차 산업혁명이 일어나던 시기(1870년 ~ 1910년)
세계는 '제국주의 시대'로 재편되고 있었다.
 

이전까지의 식민지는 
인적·물적 자원을 수탈하는 곳으로만 여겨졌지만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자본주의가 성장하게 되자

열강들은 기업들이 만든 상품을 팔아먹을 시장과
돈을 가진 은행들이 남는 돈을 투자할 곳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때 찾아낸 곳이 
바로 식민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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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가 있으면 
공급과 수요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었다능."

때문에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가 가지는 의미는 사뭇 컸다.

값싼 원료의 공급지와
저임금을 주고도 일을 시킬 수 있는 곳인 동시에

만든 물건을 팔거나, 남는 돈을 투자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장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열강 스스로
제국주의가 되는 것을 마다할 국가들은 없었다.

이는 제국주의의 후발주자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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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어떤 열강이 식민지를 갖고 싶지 않겠음?"

이때 미국이 예의주시하던 곳은
주로 태평양 지역이었다.

먼저 일본을 개항시키고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 땅을 구입했다.

그리고 하와이도 빼앗았다.
▲ 하와이를 점령한 미해군

하지만 이것으로 만족하기는 무리였다.

일본은 너무 성장한 나머지
식민지로 만들기에는 무리였고

오히려 미국인들은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에 감탄하고 있었다.

알래스카는 땅은 넓었으나
인구가 극히 적었고

하와이는 조그만 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세기말 도무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임자 없는 땅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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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놔!"

식민지를 차지하려면 
상대방의 것을 빼앗아와야만 했다.

그런데 보니깐 
열강 중에서 왠지 허접스러운 상대가 보였다.

그건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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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옳지! 저넘들이다!"

하지만 스페인을 때리려면 뭔가 구실이 필요했다.

여기서 미국은 통킹만 사건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사건을 터뜨린다.

1898년 쿠바에서 일어났던 메인호 사건이었다. 

사건은 이렇다.

당시 쿠바에서는 독립전쟁이 발발하고 있었고

이미 유럽의 2류, 3류국으로 추락한 스페인은
군사력이 미약했던 나머지
쿠바 독립군들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걸 본 미국은 군침이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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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지! 스페인을 몰아내고 
쿠바를 보호국으로 만드는 거임."

이럴 때 쿠바에 정박 중인 미군함이 
난데없이 폭파한 사건이 발발했다.

폭파 사고로 해군 260여 명이 사망했다.
▲ 폭파된 메인호

군함의 석탄 저장고에서 자연발화됐다는 말도 있고,
미국이 고의로 폭파했다는 의심도 있었지만..

어쨌든 스페인이 
미국의 신경을 거스를만한 이유는 당최 없었다.

하지만 미국은 
다짜고짜 스페인의 책임으로 둔갑시켰다.

moon_and_james-58미국
"스페인넘들이 미군 함선을 공격했다!"

스페인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moon_special-24스페인
"우리가 왜? 생사람 잡지 마!"

하지만 미국은 이를 빌미로 
스페인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이내 쿠바를 빼앗더니
인근 푸에르토리코 섬까지 빼앗아 버렸다.

그리고 내친김에 태평양으로 눈을 돌려,
필리핀과 괌도 빼앗아 버렸다.
▲ 필리핀에서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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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쿠바는 독립을 하게 되지만, 
사실상 미국의 보호국에 놓이게 됐지."

아무리 열강이라도
힘이 없으면 당하는 것이다.

한편 이후 미국은 일본과 급격히 친해진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게 되면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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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일본이 러시아를 꺾을 줄이야.
이거 여차하면 일본이 필리핀을 노릴수도 있겠는데."

때문에 미국은 전략적으로 
일본과 가까워질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05년 미국과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게 된다.

moon_and_james-83태프트
"니들 필리핀 노리지 말라능.
그러면 조선 침략하는거 우리가 국제적으로 지지해주겠음."

 가쓰라
"아리가또. 감사하무니다."

이런 이유로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이미지가 나쁘다.

한편 미국은 1914년 파나마 운하를 뚫게 되면서
운하의 소유권을 독차지하여

대서양과 태평양을 아우르는 
일대 해양강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 파나마 운하

결국 미국도 가시적이지는 않았지만

제국주의 시기, 이런 식으로 야금야금 영토를 확장하고


영향력을 확대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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