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List

2017년 2월 21일 화요일

미국의 역사 : 미국의 탄생과 성장 (1770 ~ 1870)

● 미국은 오늘날 왜 최강국이 되었을까?

먼저 왜 미국(美國)이라고 불리게 됐는지 알고 가자.

중국인이 물어봤다.

"너희들 누구냐해?"

"아엠언 음메리칸."

그런데 중국인들은 '음'을 감탄사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얘네들 '메이리젠'이라고 말했다해."

그래서 '메이궈(美國)' 즉 미국이 된 것이다.

절대 아름다운 나라여서 미국이 된 건 아니다.
일본에서는 '쌀미(米)자'를 써서 미국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의 엄청난 풍요로움은
수많은 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이고, 가히 아름답게 비칠만하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현재 미국의 영향력을 벗어날 나라는 없다.

한해 국방비만 1000조원(1조 달러)을 넘어, 
천조국으로 불리는 나라. ☞ 참고
(GDP가 1조달러만 넘어가도 준강대국으로 불리는데 말이다.)

석탄, 철광석, 석유 등 자원도 엄청나고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미국이 세계 2위의 산유국이다)

차를 타고 하루종일 가도, 끝나지 않는 거대한 농장에
농약조차 비행기로 뿌리는 나라가 미국이다.

너무 잘나서 
질투와 시기도 많이 받는 나라가 미국이다.

moon_and_james-24
"쳇! 미국넘들은 신의 축복이라도 받은 모양이지."

그렇다면 미국은 왜 이토록 
엄청난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일단 미국은 전세계에서 '경제적으로 유용한 땅'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나라다.

러시아의 면적이 미국의 2배에 이르지만
경작지는 미국의 70% 밖에 안된다.

세계에서 2번째로 큰 나라 캐나다의 경우도
경작지는 미국의 1/4 수준이다.

게다가 '문명이 발전하기 좋은 적당한 기후의 땅'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지리학자 엘스워드 헌팅턴은 그의 저서 '문명과 기후'에서

인간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최적의 기후 조건을 제시했었다.
▲ 짙은 색일수록 인간이 활동하기 좋은 기후

 엘스워드 헌팅턴
"육체적 노동은 15~18도, 정신적 노동은 4~10도 일때
가장 능률이 높은데, 이런 기후는 중위도의 온대기후라능."

▲ 세계의 온대기후 지역

실제로 전세계 선진국들은 모두 이곳에 위치하고
▲ 세계의 선진국 : 남미에 파란 부분은 프랑스령 기아나

IQ가 높은 나라들도 모두 이 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 IQ 지도 

쉽게 말해 미국은 
'알짜배기 땅'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나라인 것이다.

게다가 이곳에는 400년 전부터 새로운 기회를 찾아서
선진 문명과 기술로 무장한 유럽인들이 몰려와 살고 있었고
 

200년 전부터는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 만들어져서
잠재된 보유 능력들을 한데 결집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후 미국이 세계 최강국으로 발돋움 하게 되었던 건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다.

moon_special-28
"광활한 땅, 살기 좋은 기후, 유럽의 선진기술.
모든 면에서 미국은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시작했던 것임." 

물론 미국이 그렇게 성장하기까지는

연방국을 하나로 통일시키고 
능력위주의 사회를 구축하고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면서
시장경제체제를 확고히 한,
지도자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 워싱턴, 재퍼슨, T 루즈벨트, 링컨

실제로 1780년대 
조지 워싱턴이 연방체제를 확립하지 못하고

1860년대 남북전쟁에서 링컨이 
미국을 통일시키지 못했더라면

오늘날의 미국은 결코 없었다.
 
      워싱턴             링컨
 
만약 두 명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오늘날 미국은 생각보다 풍요롭지 못하고

세계 시장경제체제는 
지금보다 확고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T. 루즈벨트     F. 루즈벨트



미국의 탄생

● 북미 대륙의 개척

500년 전까지만 해도 광활한 북미 대륙은 
인디언들의 땅이었다.

당시 북미 대륙에만 2천만 명 이상의 인디언들이
주로 옥수수 농사를 짓고 살고 있었다.

하지만 15세기 후반 유럽인들이 몰려오자
곧 북미의 인디언들은 90% 이상이 전멸하게 된다.

이유는?
유럽인들이 가지고 온 질병 때문이었다.

사실 인간에게 치명적인 전염병의 대부분은
가축과 함께 공생하면서 발생한 것들인데

구대륙에는 여러 가축들이 있었지만
신대륙에는 가축이 없다보니

유럽인들이 대거 몰려오자 

질병에 대한 내성이 전혀 없던 인디언들은 
멸종에 가까운 피해를 입게 되었지만, 유럽인들은 멀쩡했던 것이다.

그렇게 원주민들이 전멸하고 
신대륙이 공터가 되었기 때문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뒤에도 
북미 신대륙에는 100년 동안 공백기가 있었다.

moon_and_james-76
"땅만 있으면 뭐 해? 일해줄 사람도 없는데.."

하지만 스페인이 멕시코와 페루의 식민지를 통해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었고
(아즈텍과 잉카에서는 생존한 인디언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포르투갈이 노예무역을 주도하며
신대륙으로 흑인 노동력을 보급할 수 있게되자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 당시 노예선

당시 스페인은 신대륙의 은, 포르투갈은 노예무역으로
각각 역사상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 참고

 
▲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자기들 맘대로 지구를 반땅해서 나눠가졌던 당시

"아~ 우리도 저렇게 잘나가던 때가 있었는데.."

그러자 17세기,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서둘러 신대륙으로 진출하여 
북미 대륙을 한자리씩을 꿰차게 된다.

가장 북쪽은 프랑스, 뉴욕 부근은 네덜란드, 
그 밑으로는 영국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영국의 진출이 가장 두드러졌다.

1607년 영국인들은 버지니아 주를 개척하면서
흑인 노예들을 이용해 거대한 담배 농장을 만들었고
 
▲ 버지니아주 개척

본격적인 식민지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moon_special-28
"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버지니아 주의 개척을 
그리고 높게 취급하지 않는다능."

moon_special-26
"그보다 청교도들의 이주를 
신대륙 개척의 정통으로 취급하려는 성향이 있음."


● 유럽인들보다 자유로웠던 식민지인들

1620년 종교탄압으로 쫓겨난 100여 명의 영국 청교도들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출발했다.

그들이 험난한 바다를 건너는 목적은
딱 한 가지, 종교의 자유를 찾기 위해서였다.

"영국국교회는 무늬만 개신교임.
로마 가톨릭교회의 잔재를 철폐하지 못했음!"

그렇게 메이플라워 승객들은 
사나운 파도와 질병의 고통을 견디며 
망망대해를 헤쳐나갔던 것이고

1620년 11월 하순, 66일간의 기나긴 항해를 마치고 
메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 도착하게 된다.
▲ 초기의 청교도들 : 그들은 인디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후 청교도들은 다짐한다.

"앞으로 우리들이 살아갈 공동체는 
다수결 원칙에 따라 운영된다능."

이를 두고 오늘날 미국인들은
'메이플라워호 선언'이라고까지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사실 당시 유럽에서 
나라를 버리고 떠난 유랑민들이나 해적들 사이에서
 

다수결의 원칙과 개인주의 룰은 
어디서나 만연하고 있었다. ☞ 참고

moon_special-40
"애초에 전제왕정이나 신분제 사회의 모순이 싫어서 
탈출한 사람들이 많았으니.."

하지만 이렇게 민주주의와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미국의 역사가 시작됐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이후 청교도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북미로 이주해왔으니..

이들은 저마다 국적도 달랐고
계층도 달랐고, 종교도 달랐으며
아프리카로부터 잡혀온 흑인들도 있었다.

신대륙에는 이런 식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00년이 지난, 18세기가 되면
북미 애팔래치아산맥 동쪽 대서양 연안에는 
영국의 13개 식민지가 연이어 건설되게 된다.

moon_special-28 
"서류상 식민지의 사람들은 영국인이었고 
영국의 통치를 인정했지."

다만 당시 13개 주 식민지는 
상당한 자치권을 보장받았기 때문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통치를 받았던 라틴아메리카와는
여러 면에서 상황이 달랐다.

이는 영국인들 스스로 식민지를 '영토에 대한 관리'보다는
'상업을 통한 통제'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비록 일부 법률은 영국의 동의를 얻어야 했고,
영국 국왕의 명령을 따라야만 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대부분은 자치관리 형태였다.
▲ 당시 자치 의회

세금과 관련된 중요한 부분도 자율적으로 정했다.

오히려 식민지인들은 유럽 본토인들보다 훨씬 더 
능동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다.
▲ 식민지 자치시대의 형틀


● 보스턴 차(茶) 사건 (1773년)

17세기 후반 영국은 스페인을 물리치게 되면서
해상 무역을 독점하게 되었고

18세기 중엽에는 유럽 최강 프랑스와
전쟁을 벌여 승리하게 된다.
▲ 영국과 프랑스의 7년 전쟁

영국의 한 역사학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면서부터 영국은 
더 이상 주변국가들을 신경 쓰려고 하지 않았다."

즉 영국은 더 이상 
유럽의 한 국가가 아니었고

더 이상 독일, 프랑스, 러시아와 같은 나라는
영국의 적수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 17세기 영국 해군

하지만 전쟁으로 
영국의 국고는 바닥이 나 있었다.

때문에 영국은 식민지에서 세금을 추가로 징수해
재정위기를 모면하려고 했다.

그러자 식민지인들은 곧 불만을 터뜨렸다.

moon_and_james-24
"쳇! 영국의회에는 식민지 대표가 한명도 없으면서
세금은 마구 거둬가려고 하네.."

흔히 우리는 영국이 가혹한 세금을 거두려하자
북미 식민지인들이 불만을 터뜨렸다고 배워왔다.

하지만 실제로 그랬는가?

통화조례, 설탕조례, 인지조례 
그 가짓수나 세율을 따지더라도 
본토 영국인의 1/20도 안되는 세금을 냈었다.

여기에 영국은 식민지의 수입품마다 
관세를 매기기로 했다. (타운젠드법)

그러나 마찬가지로 
식민지인들은 불만을 터뜨렸다.

 타운젠드 
"오케, 알겠어. 관세 걷지 않을게.
다만 차(茶)관세만 좀 걷자."

당시 영국은 중국과의 대외무역이 재미를 보지 못한 나머지
동인도회사가 파산 위기를 겪고 있었기 때문에

차(茶)조례만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 동인도회사

하지만 식민지인들은 이것조차도 반대하고
차(茶) 불매 운동을 벌인다.

brown_and_cony-55
"의회 대표 한명도 선출 안해주는 영국을 위해 
세금을 납부할 수는 없다!"

게다가 관세를 피하기 위한 
밀수업자들의 차(茶)가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에 
▲ 당시의 밀수 현장

동인도회사는 오히려 막대한 적자만 보고 말았다.

moon_special-26
"당시 관세수입은 고작 3,500파운드였는데
매출 감소로 손해 본 액수는 730만 파운드였다지."

그야말로 긁어 부스럼을 만든 꼴이었다.

창고에는 언제 판매될지도 모르는 찻잎들로 가득 쌓였고
동인도회사는 더욱 휘청거렸다.

moon_and_james-78
"아놔, 이렇게 된거 어쩔 수 없다.
관세를 매기지 않을테니, 동인도회사가 직접 식민지에 내다 팔아라."

그런 이유로 동인도회사는 직접 차를 싣고 
식민지의 보스턴항에 정박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귀신같이 알고 나타나

식민지인들은 차를 실은 선박으로 난입해
차를 수거하고 바다에 수장시켜 버렸다.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인디언'으로 분장을 하고 말이다.


● 미국의 독립 (1776년)

그러자 영국은 발칵 뒤집혔다.
항구를 폐쇄했고

"식민지가 손해배상을 할 때까지 항구 폐쇄!"

서둘러 군대를 파견해서 신대륙에 주둔시켰다.

"이런 고얀 놈들!"

이후 식민지인들은 
자치운영에 전례 없는 도전을 받게 된다.

brown_and_cony-57
"아놔, 그동안 잘 보냈는데 어쩌다 이지경이 된겨!"

역사의 갈림길에서 식민지 사람들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moon_and_james-24
"싸워서 독립하자!"

brown_and_cony-55
"전쟁반대!"

moon_mad_angry_edition-7
"에라 몰라! 난 무관심!"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이럴 때 패트릭 헨리의 대중연설이 효과를 봤다.

 패트릭 헨리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패트릭 헨리 
"우리는 인구가 300만에 광활한 영토가 있음.
우리가 뭉친다면 적들에게 질 이유가 없다능!"

brown_and_cony-69
"어? 그러고보니 그렇긴 하네.."

결국 1775년 4월 메사추세추 주 렉싱턴에서
첫 총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 사이의 전투는 시작된다.
 
▲ 렉싱턴 전투

그러자 독립전쟁이 발발했다는 말을 듣고
영국과 앙숙인 프랑스가 적극적으로 원조해줬고

스페인, 독일, 네덜란드 등,
그동안 영국을 미워하던 유럽 각국의 원조가 잇달았다.
▲ 해상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과의 전투

moon_mad_angry_edition-16
"약오르지롱~"

게다가 전쟁은 예기치 않게 장기화되면서 
영국군은 점점 보급에 곤란함을 겪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천연두, 괴혈병 등 질병이 창궐해
전투보다 질병으로 죽는 병사가 훨씬 많았다.

 
"어서 지옥같은 이곳에서 탈출했음 좋겠어."

결국 영국군은 자진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독립전쟁은 민병대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 (1783년)

"만세!"

한편 1776년 7월 4일

13개의 영국식민지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미합중국을 결성하게 된다.
(미국은 이날을 사실상의 독립일로 보고 있다.)

당시 독립선언서의 내용은 이렇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모두가 평등하며
누구나 다 생명권, 자유권,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그리하여 인류 역사상 최초로 
근대적인 민주공화국이 수립되게 되었고

곧 대통령제가 실시되게 된다.

이후 유럽에서도 자극 받아 
시민혁명이 발발하게 되었으니

미국의 독립전쟁은 현대 민주주의 역사에서도 
매우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moon_special-26
"미국의 역사가 짧다지만,
민주주의의 역사는 그 어느 나라보다 길었다능."



미국의 성장

● 연방정부의 출범 (1787년)

18세기 후반, 
신생독립국 미국의 길은 순탄치가 않았다.

당장 경제적인 위기가 발생했다.
moon_special-19

그동안 영국의 보호 아래서 북미의 식민지는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북부의 상공업, 중부의 농업, 남부의 플랜테이션 농업
모두 영국의 자유무역 체계 아래서 발전한 것들이다.

하지만 영국 시장이 날아갔기 때문에
수출할 곳도 마땅치 않았고
재정난으로 세금은 식민지 시절보다 훨씬 높았다.

moon_special-32
"뭐냐고! 차라리 예전이 더 좋았잖아!"

심지어 통용 화폐도 주(州)마다 달랐다.
주마다 관세가 따로 있어서, 교역도 버거웠다.

문제는 경제뿐만 아니었다.

당장 미국은 강력한 지도자도 법원도 없었다.

유일한 정치적 조직인 국회도 힘을 발휘할 수는 없었고 
독립 후 미국은 13개 주가 뭉친 연약한 연맹에 불과했다.
moon_special-21

이럴 때 연맹을 휘어잡을 수 있었던 건
독립전쟁 당시 육군총사령관을 맡았던 조지 워싱턴이었다.

 워싱턴
"여기서 결정합시다.
하나의 통일된 국가를 세울 것인지, 
아니면 13개로 쪼개져서 영원히 싸우면서 살아갈 것인지!"

▲ 18세기 중엽부터 미국을 한데 뭉치게했던 구호

"하나로 뭉칩시다!"

"연방국가를 수립합시다!"

그리하여 미국은 연방국가로 출범할 수 있게된다.
조지 워싱턴의 리더십이 분명 주효했다.

이때가 독립선언을 한 지 어언 11년 후의 일이었다.

"국가의 권력은 연방정부에게 있고
각주는 자치권을 갖고, 연방정부는 이를 간섭할 수 없다!"

"주와 주 사이에 무역장벽을 없애서
연방국가 내에서는 관세를 걷지 않는다!"

그렇게 합의를 보자, 
이번에는 대통령을 선출하는 일이 남았다.

사람들은 만장일치로 워싱턴을 추천했다.

"님이 하셈. 님보다 유명한 사람 없잖아요."

하지만 워싱턴은 그닥 내키지 않는 자리였다.

 워싱턴
"나한테 이러지 마셈. 나는 그럴 위인이 못됨요."

사실 그는 버지니아의 마운튼 버넌에 내려가면
대통령 궁보다 훨씬 크고 근사한 저택에서

수백 명의 흑인 노예들의 시중을 받으며
농장주로서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 워싱턴의 마운튼 버넌 저택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직을 한사코 '봉사'로 생각했던 그였다.

 워싱턴
"어쩔 수 없군요. 그럼 할 수 없죠."

그가 4년 임기의 대통령을 2번 한 뒤에 
더 이상은 하지 않겠다고 자진 퇴진했던 것을

현대인들은 '아름다운 퇴진'으로 찬양하기도 하지만
사실 이런 속내가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조지 워싱턴은 
미국을 하나로 통합시킨 주역이었고

'4년 중임제'라는 대통령 제도가 
이후 관습적으로 지켜지게 하는데 있어
그 선례를 제공한 인물이기도 하다.


● 1차 산업혁명의 도입

통일된 미국은 하나의 통일된 시장, 
통일된 화폐, 통일된 조세제도를 가지게 된다.

정부는 경제체제에 있어
영국의 자본주의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유럽의 금융제도와 재정제도도 
고스란히 따라 했다.

프랑스로부터는 땅을 사들여
영토는 3배나 더 커졌다.
▲ 1783년 미국의 영토, 1848년에는 태평양 연안까지 영토가 확장된다.

1791년에는 미국 최초의 은행도 들어선다.
정부는 은행을 통해 채권을 팔고, 주식을 팔았다.
▲ 미국 최초의 은행

그렇게 마련한 자금으로는
길을 놓고 다리를 만들고 운하를 뚫는 등
국가적인 기간시설을 건설했다.

이 시기 유럽의 산업자본도 
유럽에서 건너왔다.

특히 영국의 기술자가 미국으로 밀입국하여
기억을 더듬어서 만든 방직기는

이후 미국의 방직 사업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방직 공장은 12개로 늘어나는 등

이로부터 미국 초기 산업혁명의 막이 오르게 된다.

독립 당시 270만 명이던 인구가
80년 만에 3천만 명을 넘어서게 된다.

이주민의 폭발적인 증가는
황무지 개간의 노동력이 되어주었고
기술 발전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된다.

산업혁명 시기 오히려 미국은 유럽보다 역사적인 짐이 없었다.

moon_special-28
"유럽에서는 기존의 전통 관행들을 부수고, 
낡은 시설을 해체하고 새로 세워야 했지만.."

moon_special-27
"미국은 그냥 새롭게 시작하면 됐으니
오히려 그런 면에서 좋은 조건이었던 셈."

이후 미국은 무서운 속도로 유럽의 선진국들을 따라잡았고

1860년이 되면 미국의 경제발전 수준은
대다수 유럽국가들을 초월하기에 이른다.


● 미국 역사의 중대한 분수령 : 남북의 갈등

그러나 연방정부의 힘은 여전히 미약했다.

때문에 미합중국이 탄생 한지 74년 뒤 
연방정부는 중대한 시험을 맞이해야만 했다.

19세기 중반 미국은 경제적으로
남과 북은 전혀 다른 나라처럼 운영되고 있었다.

당시 북부에서는 공업과 상업이 발전하고 있었고
자본주의 제도를 실시하고 있었지만

반면 남부에서는 플랜테이션 경제를 바탕으로 
농장주가 경제를 지배하는 노예제도가 실시되고 있었다. 

moon_special-28
"당시 미국 남부는 백색황금이라는 목화가 
대대적으로 재배되고 있었고.."

moon_special-28
"목화농사는 원체 손이 많이 가는 힘든 일이라 
노동자들은 전적으로 흑인 노예들에게 의존했지."

게다가 무역 정책을 놓고도 
서로 다른 의견을 보였다.
brown_and_cony-39

북부는 영국 제품의 수입을 규제하기 위해
관세를 높게 매겨서 북부의 산업을 보호하려고 했지만

남부는 영국에 면화를 팔아야 하고 
값싸게 공산품을 수입해야만 했기에 
관세를 낮추자고 했던 것이다.

brown_and_cony-40북부
"국산품 애호하자! 관세를 높여라!"

brown_and_cony-42남부
"수출을 장려해라! 관세를 낮춰라!"

한술 더 떠 북부는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해서라도
노예제를 철폐해야 한다고 말했고
▲ 노예제 반대 : 파란색, 노예제 찬성 : 주황색~노랑색

남부는 그렇게 되면 
연방을 탈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 1852년 발간된 톰아저씨의 오두막집이라는 책으로
당시 노예제에 대한 대중적인 반감이 심했던 시기였다.

brown_and_cony-55 북부 
"노예제가 노동시장 유연성을 제한한다!"

brown_special-14남부 
"니들도 노예를 사서 쓰던지!"

그러던 중 1860년에 북부의 지지로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결국 남부의 7개 주가 연방을 탈퇴하게 된다. 

 링컨
"아놔, 난 그저 표 좀 얻으려고 
북부의 노예제 폐지에 찬성했을 뿐이야."

 링컨
"분열은 옳지 않아. 
노예제 인정해줄게."

링컨은 분열만은 막아야 한다며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이미 떠나기로 마음을 굳힌 
남부 연방들의 생각은 완강했다.

미국은 그렇게 설립 74년 만에 
국가 분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moon_special-28
"만약 이때 미국이 둘로 쪼개졌다면
동시에 3개, 4개, 6개, 12개로도 분열 될 수 있었지."

moon_and_james-26
"솔직히 초강대국의 등장은 별로인데,
차라리 그때 여러 나라들로 분열됐더라면.."


● 남북전쟁과 노예해방 (1861~1865년)

결국 링컨이 선택한 방법은 
무력으로 짓밟는 일이었다.

당시 북부는 인구에 있어 2배 이상 많았고, 
무기 면에서도 우수했다.

반면 남부 연합은 유능한 장군의 지휘 아래 
북부보다 단결력이 높았기 때문에 
전쟁 초반은 의외로 남부가 더 유리했다.

 남부군 
"북부 넘들 별 것도 아니잖아!"

하지만 위기 상황에서 링컨은 '노예해방'이라는 꼼수를 쓰고
그게 결과적으로 먹혔다.

처음에는 반응이 나빴다. 
북부군이 대거 탈영을 한 것이다.

 북부군 
"쳇, 노예들을 위해 피를 흘릴 수는 없다구!"

하지만 남부에서는 오히려 탈출한 노예들이 
속속들이 북부군에 가세했다.
 

링컨이 노렸던게 바로 이거였다.
탈영한 군인보다 채워진 흑인 병사들이 훨씬 많았다.

게다가 흑인들은 
해방이라는 약속을 믿고 더욱 적극적이었다.

 북부군
"와! 흑인 노예들 엄청 열심히 싸워주네."

그리고 4년만에 전쟁은 북부군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

링컨은 약속대로 흑인노예들을 해방시켜줬다.

moon_special-28
"다만 가식적인 노예해방이었지.
흑인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것은 100년 뒤의 일임."

남북전쟁 이후 미국은 
하나의 통일 국가라는 인식이 확립되고
 
연방정부의 통치력이 강해지게 되어
전쟁은 농업, 공업을 넘어서 국가전체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런데 흑인이 해방된 농장에서는 
누가 일꾼으로 쓰였을까?

답은 아시아인들이다.
▲ 대륙횡단 철도건설 작업장의 중국인 쿨리

'쿨리'라고 불리는 아시아인들은
흑인보다 성실했고, 임금도 낮았기 때문에 농장주들이 선호했다.
▲ 하와이의 일본인 쿨리들

그래서 중국인, 일본인, 조선인들까지
19세기 후반이 되면 미국으로 대거 이주하게 된다.
▲ 멕시코의 조선인 쿨리, 애니깽


● 서부개척운동

1862년 남북전쟁 기간에 미국 링컨 대통령은 
그 유명한 '홈스테드법'을 제정한다.

sally_and_friends-18
"홈스테드법이 뭥미?"

moon_special-28
"10달러의 등기비용을 지불하고 서부 황무지에서 5년간 경작하면
그 땅을 소유할 수 있게 만든 법."

sally_and_friends-18
"당시 10달러면 현재가치로 얼마 정도임?"

moon_special-26
"약 150달러(16만원)"

즉 성인이 된 미국 국민이면 누구나
현재가치로 16만원의 등기비를 지불하면

서부에서 160 에이커(65헥타르)의 토지를 빌릴 수 있고
5년이 지나면 내 땅이 된다는 법이었다.

참고로 160 에이커면, 축구장 100개의 사이즈로 
여의도의 1/13이나 되는 엄청난 땅이다.
leonard_special-30

소식이 들리자 미국인들은 개떼같이 몰렸다.

뿐만 아니다. 
수천만명의 해외 이주자들이 몰려왔다.
▲ 좋은 땅을 먼저 차지하기 위한 '랜드 러싱'

moon_special-28
"다만 당시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건 
오직 유럽 출신의 백인 뿐." 

moon_special-28
"아시아인들은 이들의 농장에서 
일꾼으로밖에 일할 수 없었지." 

그렇게 반세기가 넘게 진행된 사업이
바로 미국의 서부개척운동이었다.

그 결과 미국의 국토개발은 
동부연안의 좁고 긴 지대로부터 
광활한 서부 오지까지 옮겨지게 된다.

하지만 서부 개척은 생각만큼 낭만적이지 못 했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 서부를 말할 때
석양을 가로지르는 카우보이들을 떠올리지만

당시 서부에 도착한 사람들을 맞이한 것은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벌판이었다.
▲ 당시 개척민

살기 위해 생존의 법칙을 배워야 했고
또 후손들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오늘날 미국의 힘은 어쩌면 
이런 도전정신에서 나온다고들 말한다.

"꿈을 위해 이곳까지 왔는데,
여기서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어!"

역사학자들은 서부개척운동이야말로
오늘날 미국사회의 안정과 번영을 이룩한 토대라고도 말한다.

어떤 이들은 운이 좋아 황금을 발견하기도 하고
사탕수수농장, 오렌지농장으로 떼돈을 벌기도 했지만

그런 행운이 없더라도 
노력한 만큼 대가가 찾아왔으니,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려 했다.

moon_special-20
"에휴. 노력해도 안되는 
다른 나라 사람들은 무슨 죄인지.."

다만 서부개척 운동은 
또 하나의 식민지 개척의 과정이었고

그속에서 원주민들은 토지를 빼앗기고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오지로 내몰리면서
그들만의 보호구역으로 밀려났다.
▲ 백인들에게 좋은 땅을 내어주고, 본인들은 보호구역으로 이동하는 인디언들

moon_special-28
"인디언들은 그때를 두고 
눈물의 역사로 기억하지."

어쨌든 서부개척운동으로 인해

19세기 말이 되면 미국의 황량한 거친 땅들은
대부분 비옥한 경작지로 변하게 된다.
▲ 드넓은 옥수수 밭

인적조차도 드물었던 서부지역이 


미국의 중요한 곡물창고로 바뀐 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