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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막장정치의 최고봉 : 명나라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무너졌나?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40209545017
● 들어가기 앞서

전통시대에 한 나라의 경제적 수준이나 
생산력을 평가하는데 있어 

가장 일반적인 척도는 
바로 '인구'다.

18세기 산업혁명으로 
증기기관이 발명되기 전까지

인류의 생산력은 
인간과 가축의 '노동력'이 결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구의 수가 많았다는 의미는 
그 사회의 생산력이 좋았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또 그만한 인구를 부양할 만큼 
식량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런데 전통시대의 인구는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

전적으로 쌀과 밀 등의
곡물 생산력에만 의존해야 했었다.

그런 곡물 농사일은 
대체로 힘이 들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농경국가들에서는
여자보다 남자의 출산을 더 요구하고, 축하하고

더 나아가서는
남존여비를 정당화하는 풍조로까지 발전했으니

이는 남자가 가지고 있는 노동력이 
여자보다 더 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6세기 이후로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쌀과 밀이 아니어도 
인구를 부양시킬 수 있는,

그러면서 노동투입량은 훨씬 줄어들고
척박한 기후와 토양에서도 잘 자라는

이른바 '구황작물'이라는게 들어오게 된다.
대표적인게 감자, 옥수수, 고구마, 땅콩이었다.

그리고 이 구황작물 탓에
구대륙의 인구는 급성장하게 된다.

유럽이 그랬고, 
중국이 그랬고, 일본이 그랬다. 

우리나라는 20세기 이후부터 
그 혜택을 보게 된다.

오늘날에는 이들 4대 구황작물이
세계 식량에서 1/3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다.

여기서는 구황작물을 통해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이 

근세시대 어떤 혜택을 보게 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일본의 구황작물

● 일본의 구황작물 전래

일본에 감자가 전래된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해였던 1598년 경으로

네덜란드인에 의해 인도네시아에서 재배되던 감자가
나가사키로 반입되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상인 
"이번에 신기한 작물 하나 줄게."

하지만 고추가 그러했듯이,
일본인들은 처음에는 

흰 꽃이 예쁘다고 하여
그저 관상용으로만 이용했다.

 네덜란드 상인 
"니들 왜 우리가 준 감자 안 먹음?"

 일본 상인
"됐어. 먹어봤는데 맛도 별로고..
그냥 이렇게 꽃이나 감상하는 재미로 기르지 뭐."

이랬었다.

그리고 1615년 이번에도 나가사키항을 통해
영국인이 고구마를 선물해줬다.

 영국 상인 
"이거 함 먹어보라능. 
달달하고 먹을만 해."

당시 고구마는 중국의 속국이었던 
류큐(오키나와)에서 가지온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일본인들은
고구마를 당(唐) 감자, 류큐 감자로 불렀다.

 일본 상인
"당감자는 먹을만하네."

하지만 이런 고구마도 
일본 전역으로 쉽게 퍼질 수가 없었다.

"왜 그래? 
고구마는 그래도 감자보다는 맛이 있잖아."
(참고 : 예전의 감자는 정말 맛이 없었다.)

"일본은 18세기까지 철저한 봉건체제 국가였어.
그래서 의외로 지방끼리도 교류가 별로 없었던 나라였지."

"중세 유럽의 폐쇄적인 장원경제마냥
일본도 비슷했거든."

"그랬어?"

"심지어 고추가 원래는 16세기 중엽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일본의 규슈 지방으로 전래되었지만,"

"규슈 상인들은 일본 본토(혼슈)보다는 
조선의 왜관(부산)에 먼저 고추를 팔았지."

"그런데?"

"하지만 일본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몰랐고.."

"임진왜란 때 한반도 남쪽에서 
난생 처음 고추라는 작물을 보게되었어."

"아! 그래서 일본사람들이 고추를 
조선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했던 거구나."

"틀린 말은 아니지." 

"그때 본 고추를 일본사람들은 가지고 들어왔고
이후로 고추를 고려후추로 불렀으니깐."


● 텐메이 대기근과 구황작물의 보급

원래 낯선 작물이 들어오면 
보급되어 재배되기까지 

보통 1~2세기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일본인들 역시 그랬다.

"혹시 땅속에서 작물을 캐먹는데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던거임?"

"그건 절대 아님."

"사실 칡뿌리를 캐먹는 것은
조선 초 일본에 간 사신들이 배워온 것이거든."

"어? 그럼 그전에 우리 조상들은 
칡뿌리를 안 먹었어?"

"응. 15세기 초에야 일본인들을 통해 
칡뿌리를 먹을 수 있다는걸 알게됐지."

하지만 일본인들은 18세기 후반까지도
감자, 고구마를 대체로 먹지 않았다.

그러다가 일본은 1783년 
사상초유의 기근에 시달리게 된다. (텐메이 대기근)

당시 동아시아를 강타한 기후 변화로
조선에서도 수 십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던 터였다.

이때 일본은 전국적으로 
100만명 단위의 아사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온갖 식물의 뿌리는 다 캐먹었고
지푸라기도 죄다 갈아 먹었을 정도였지."

"심지어 독초도 마다않고 뽑아서 
삶아먹을 정도였어."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했네."

"그런 상황에서 개, 말과 같은 동물들도 
닥치는대로 잡아먹었고,"

"종이도 가리지 않아
절간의 경전들이 남아나지 않았어."


"헐!"

심지어 당시는 인육도 횡행하고 있었으니,
이런 일화도 있었다.
 
▲ 당시 인육을 먹는 모습 (일본 센다이 지방)

어느 추운 날씨, 눈보라를 헤치고 
한 여자가 들어와 이렇게 말했다.

 기근자1 
"실례합니다."

 기근자2 
"여기 왜 왔음?"

 기근자1
"이 집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한쪽 팔이던 한쪽 발이던 나누어 주세요."

 기근자2
"..."

 기근자1
"우리 할머님도 2, 3일 안에 돌아가실 것 같으니 
그 때는 꼭 답례하겠습니다."

일종의 품앗이었다.
이럴 정도로 끔찍했던 때였다. ☞참고

당시 일본의 피해가 유독 극심했던 이유로는
지방분권적인 봉건체제가 강해 

국가적인 대책을 제대로 세울 수 없었던 데에도 
원인이 있었다.

때문에 대부분의 피해는
번(藩) 스스로 해쳐나가야 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어느 영주는 
기근을 버티는 묘책으로 

진흙이나 배설물을 익혀 먹는 방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기도 했었다.

 영주
"원래 똥에 영양분이 많아. 
잘 구워먹으면 먹을만 하다니깐."

그런데 이토록 참혹했던 시기에
다른 어떤 곳에서는 의외로 피해가 적었다.

바로 감자를 먹었던 지역이었다.

당시 홋카이도와 토호쿠(동북부) 지역에서는
기후가 척박하여 
 

평소에도 구황작물로 
감자를 재배하던 지역들이 많았다.

그러했으니 이들 지역에서는
대기근 와중에도 감자를 먹으며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또 고구마를 재배하고 있었던
규슈 지역 역시 기근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자 
곧 소문이 퍼졌다.

 
"감자, 고구마를 먹던 사람들만
대기근에서 구원을 받았다지 뭔가."

"맞아. 그게 그렇게도 냉해에도 잘 버티고 
가뭄·홍수에도 잘 자란다더군."

그리하여 19세기 들어
일본 전역으로 감자와 고구마는 빠르게 보급되게 되었고

이는 19세기 일본의 폭발적인 인구증가의
주요한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조선의 구황작물

● 조선시대 틈만 나면 찾아왔던 기근

조선시대에 흉년은 
얼마나 자주 찾아왔을까?

조선 건국 시기부터 18세기 정조 때까지
약 400년간의 기록을 보면

가뭄·황충(메뚜기떼)·태풍·홍수해 
등의 재해로 기근이 발생하여 

조정에서 대책을 논의했던 횟수만 총 152회에 달한다. 
또 전국적인 기근은 그 절반에 이른다.

결국 적어도 4~5년에 한번마다
백성들은 끼니를 걱정해야만 했던 것이다.

"4년에 한번? 
이건 뭐 올림픽도 아니고.."

그런데 기근이 들면 
상황은 생각보다 처참했다.

길가에 
굶어 죽은 사람의 시체가 즐비했고,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자신과 가족을 기꺼이 노비로 팔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꾸준히 노비가 늘어나게 된 이유도 
사실 이런 기근 때문이었어."

"기근이 들면 늘어나는건 굶어죽는 시체와 
몸을 판 노비들이었거든."

살던 곳을 떠나 떠돌면서, 부모들은 아이들을 버리고
심지어 인육을 먹는 경우도 있었다.

"죽은 사람의 시체를 먹는 ☞경우도 있었지만
자식을 삶아 먹었던 ☞경우도 있었지."

"심지어는 서로 잡아먹을까봐
노심초사하던 ☞경우도 있었지 ."

"헐, 정말이야!"

"식인은 농경국가라면 
어디서나 발생했던 일이야."

하지만 우리나라는 
유독 피해가 잦았던 이유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기후를 생각해봐.
기후가 너무 변화무쌍해. 특히 강수량이 그렇지." 

"기후가 안정되지 못한
☞몬순기후대에 위치한 탓이야."


"아!"

"또 습도가 너무 높아
식량이 빨리 상해서 저장하기가 어렵지."

"우리나라에 발효음식과 
젓깔이 발달된 이유도 다 그런 이유지."


● 조선시대 사람들은 구황작물로 무엇을 먹었나?

국가에서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게 되면
이를 '구휼(진휼)'이라고 한다.

그런데 개인차원에서 
스스로 배고픔을 이겨냈다면?

그걸 바로 
'구황'(救荒 : 굶주림에서 구원받다)이라고 한다.

"그럼 부황은 뭐임?"

"부황은 오랫동안 먹지 못해 
살가죽이 누렇게 뜬 현상을 말함. 쉽게말해 영양실조."

그렇다면 옛날 우리 선조들은 
가뭄에 들때 무엇으로 배고픔을 해결했을까?

고려시대까지는 
주로 이런걸 먹었다.


"조선시대에 흉년이 들면 
가장 쉽게 찾았던게 소나무였어."

"어휴.. 그걸 어떻게 먹어?"

"아니야.  솔잎, 솔방울, 송진, 소나무 껍질 등
뭐든 다 다양하게 이용할 수 있었어."

"특히 솔잎은 빻아서 가루를 내면 
매운맛이 나는데,"

"이걸 약간의 곡물과 섞어서 (솔잎가루 10: 쌀가루 1의 비율)
먹으면 나름 먹을만 하다고해."

"하긴 솔잎 음료도 있고."

 

"송홧가루는 굳이 흉년이 아니어도
떡을 만드는데 이용하잖아."

"여기에 소나무 껍질이나 뿌리도 
우리 조상들은 닥치지 않고 먹었으니,"

"가히 소나무는 
초근목피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었지."

그런데 흔히 구황작물까지는 아니지만
우리민족의 대표적인 식사대용 작물이 있었다.

바로 '물외'라고 불리우는 오이와 참외였다.
또 수박이 있었다.
 

"고려시대까지 오이와 참외는 
대표적인 식사대용이었고.."

"특히 오이로 갈증과 허기를 자주 달랬지." 

"헐, 그거로 배 채우면 살 빠질텐데."

"고려 말에 들어온 수박은
조선시대 때 대중화되어서,"

"수박이 열리는 철이 되면
아예 식사 대신에 수박만을 먹었을 정도였어."


● 칡뿌리와 신대륙 구황작물

조선시대 칡뿌리(갈근)는 분말을 만들거나 
녹두와 섞어서 면을 만들기도 하여
 

소나무 다음으로 
구황식품으로 즐겼던 것이다.

이러한 칡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자생적으로 자라고 있어

예로부터 소와 말이 아프면 
약재로 먹이곤 했었다.

그런데 이런 칡뿌리를 고려시대까지
우리 조상들은 먹지 않았다.
 

15세기 초 일본을 통해 
그 먹는 방법을 알게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세종 때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윤인보 등의 건의로 

우리나라에도 
칡을 이용하는 방법이 도입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역시 대중적으로 보급될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던걸까?

반세기 후 성종 때, 한명회에 의해 
다시 한번 칡뿌리가 건의된다.

 한명회 
"전하, 일본인들은 흉년이 들면 
칡뿌리를 먹는다고 하옵니다."

 한명회
"우리도 이 칡뿌리를 보급해야 합니다."

 성종 
"오, 그렇소?
그 맛은 어떻소?"

 한명회
"제가 칡을 가루로 내어 
쌀과 함께 죽을 만들어 먹어봤사옵니다."

 한명회
"먹어보니 배를 채울만 했습니다." 

 성종
"그렇소? 그럼 나도 당장 맛을 함 봐야겠소.
여봐라, 가서 칡뿌리 좀 캐와라."

이후로 조선에는 칡뿌리가 
구황식품으로 대대적으로 이용되게 된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가 되면 

옥수수, 감자, 고구마와 같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구황작물이 전래가 된다.

하지만 조선의 경우 
이런 구황작물의 전래가

중국에 비해서 200년, 
일본에 비해서 150년 정도 늦게 이뤄진다.

중국의 마카오, 일본의 나가사키와 같은
대외 무역 항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작물이 들어오더라도
전국적으로 퍼지기까지 1~2세기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사실상 조선시대에 
이들 작물에 의해 혜택을 본 부분은 극히 적었다고 보면 된다.
 

20세기 이후에야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은
전국적으로 퍼져 제대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구황작물

● 구황작물로 인구가 급증하게 된 중국

중국에 고구마와 감자 등이 
전래된 것은 1560년대였다.

이때 땅콩이라는 작물도 스페인 무역상들에 의해
중국에 상륙하게 되었다.

하지만 처음에 중국에 들어온 땅콩은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수확된 땅콩은 너무 빨리 썩었거든."

"왜?"

"원래 땅콩은 수확한 다음에 물에 세척해줘야 함.
그렇지 않으면 흰가루병에 걸리거든."

"그런데 이게 
보통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 아님."

 한명회
"때문에 굳이 중국인들은 
땅콩을 재배하려고 하지 않았어."

때문에 땅콩은 
그 가치를 외면받았다.
 
▲ 땅콩밭 

그런데 18세 후반이 되면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이 시작되어

숲이 줄어들고 토양은 양분이 다 빨려나가
기진맥진한 상태가 된다.
 
▲ 19세기 유럽의 화전민

이럴 때 농사 짓는 땅을 살리려면
구아노(새똥)와 같은 비료를 쓰던지,

아니면 식민지를 개척하던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했다.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17세기 중엽 청나라가 건국할 즈음 
1억에 불과하던 인구는

1세기만에 2억을 넘게되고
다시 50년만에 3억을 넘게되었다. 
 

사상 초유의 인구 증가가 
청나라에 불어닥쳤던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감자, 고구마, 옥수수와 같은
구황작물의 보급 때문이었다.

때문에 18세기 후반이 되면 
중국도 거대 인구를 부양해야할 땅들이 대부분

집약적인 농경 탓에
기진맥진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 땅콩의 마법

하지만 땅콩에는 사람들이 모르고 있었던 
마법과도 같은 힘이 있었다.

"땅콩은 황량한 모래에서도 잘 자라고
토양이 유실되는 것도 막아주기 때문에.."

"토질을 천천히 
개선시켜주는 역할을 하게되지."

"헐, 보통 작물은 재배되면 
지력을 소모시키지 않나?"

"그러니깐, 땅콩은 별종이지."

"환경이 마구잡이로 파괴된
황무지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작물이니.."

"우아!"

그러자 곧 중국인들은 땅콩의 가치를 알고
황량해진 땅들마다 땅콩을 구해서 심게된다.

"땅콩은 버릴 게 하나도 없다해."

 
"땅콩은 먹고
덩굴은 돼지 사료로 주고,"

 
"껍데기는 연료로 사용하고
기름은 식용유로 사용할 수 있다해." 

하지만 땅콩은 수확이 끝나고도 
세척이라는 엄청나게 지루한 과정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중국인들에게는 문제 없었지.
넘치는게 인구인데."

"또 땅콩 씻는 것은 단순한 노동이어서
조그만 어린애도 충분히 할 수 있었거든."

게다가 땅콩은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 
일반 콩의 2배 이상이나 됐고 (사실 땅콩도 같은 콩과 식물이지만)

고단백에 비타민이 풍부한 작물이어서
인구를 부양하는데도 더없이 효율적이었다.

 
▲ 오늘날의 땅콩 생산량 : 중국이 압도적으로 세계 1위다

무엇보다 땅콩을 심는데에는 
돈이 거의 들지 않았다.

그냥 대충 황무지만 구해서 
씨를 뿌리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뜻이야?"

"말라비튼 강바닥이나 황무지 모래땅이나
바위투성이 언덕, 이런 땅은 원래 농사가 안돼."

"당연하지."

"그래도 그런 땅들도 주인은 있거든."

"그래서?"

"이런 황무지를 아주 헐값에 빌리는거야."

"어차피 버리는 땅인데 
운 좋으면 공짜로 쓰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아! 거기다가 땅콩 농사를 짓는다는 얘기군.
거의 비용도 들지 않는 방법이네."

그런데 
의문이 있다.

이토록 탁월한 땅콩은 
왜 오늘날 옥수수, 감자처럼 대중화되지 못했을까?

"땅콩에는 지방함유량이 많아서 그래."

"비만 때문임?"

"그렇지는 않아. 
불포화지방이라서 심혈관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또 소량만 먹어도 포만감을 느끼기 때문에
오히려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쓸 수 있어."

"그런데 지방 때문이라니?"

"바로 폭풍설사.
너무 많이 먹으면 그리 됨."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땅콩은 땅콩버터 등으로 가공되어
오늘날 널리 애용되고 있는 식품이다.



● 19세기 조선만 인구가 줄고 있었다

18세기 이후 한중일 3국의 인구 추이는 이렇다.
                                                                                   (단위 : 100만명)
 
 중일 자료 : 가시모토 마오·미야지마 히로시, 2008 : 18 
 조선 자료 : 권태환·신용하 조선왕조시대 인구추정에 관한 일시론

가장 먼저, 또 가장 적극적으로 
구황작물을 보급하고 활용했던 중국은 

전례없는 인구 증가를 
이미 18세기부터 만끽하고 있었다.

일본의 경우 
주춤하던 인구가

구황작물이 보급되면서 
빠르게 증가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선의 경우는?
이앙법의 보급으로 빠르게 증가하던 인구가

19세기부터는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에 
여전히 취약했던 탓이고

감자, 고구마와 같은 
구황작물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현상을 두고 
만약 저 당시 구황작물이 보편화됐으면 

지금쯤 한반도의 인구가 1억명도 넘었을텐데.. 
라는 식의 가정이 있을 수 있다.

비슷한 식으로, 만약 임진왜란이 없었으면,
한국전쟁이 없었으면.. 이런 가정도 있다. 

하지만 가정이 성사된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나라 인구가 지금보다 더 많았을까?


자고로 한정된 땅에는 
인구부양능력에 맞는 적절한 인구가 있기 마련이다.

흔히 전쟁이 끝나고 
인구가 감소하게 되면

폭발적으로 인구는 성장하고
금세 예전의 인구를 회복하게 된다

양란 이후인 17세기 조선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상승된 이유에는 이런 점도 있었다.



"인구가 줄어든만큼 땅이 넓어지니
보다 여유롭게 살 수 있으니깐.."

다만 다른 나라들이 
빠르게 인구가 성장하고 있던 19세기 당시에,

그것도 서세동점이라는 
격변의 시기에

조선만 시대를 역행하면서 
인구를 떨어뜨리고 있었고

결국 국력의 약화를 자초하고 있었음은 
냉정히 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참고 문헌 :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 (키네스 포메란츠), 못난 조선(문소영), 조선시대 생활사(한국고문서 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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