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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일본의 게이샤와 매춘부는 어떻게 다른가?


출처 레알뻘짓 블로그 | 만쭈리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40206512324
● 일본 공창제의 시작 : 화류계

때는 
1589년의 일이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수하 장수에게 이런 보고를 받는다.

 
"각하, 교토에 여자가 부족해서
노총각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어허, 그거 큰일이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여자는 부족하고 남자가 많다면 
어쩔 수 없구나.."

그리하여 히데요시는 
교토에 커다란 유곽을 짓도록 명령한다.

그전에도 매매춘은 이었지만, 
국가가 공식적으로 유곽을 만든 것은 처음이었다.
 

이것이
일본 공창제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교토의 유곽을 통째로 
나가사키로 옮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전쟁에 앞서 사기가 중요해.
병사들의 욕구해결만큼 중요한 것도 없지."

 도요토미 히데요시 
"어? 그런데 이곳에
버드나무랑 꽃이 왜 이렇게 많은 게냐?"

 
"원래 이 동네가 좀 그렇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흠, 유곽이 꽃으로 둘러싸였구만."

 
"맞습니다. 
꽃과 버드나무 세상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화류계(花柳界)?"

이때부터 일본인들은 유곽을 
화류계라 부르게 된다.
 
▲ 꽃과 버드나무

그리고 그 이름은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에도 건너오게 됐으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화류계'의 어원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 17세기 초 게이샤의 등장

도요토미에 의해 만들어진 공인된 유곽은 
이후 성적 해방구 역할을 하게됐다.

유곽의 매춘부(오이란)들은 화려한 연회에서 
사무라이와 상인들을 즐겁게 해줬다.
 

그리고 17세기 초, 바로 이곳에서 
최초의 게이샤가 등장하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남성이었다.
 

이들은 매춘부들이 벌이던 
연회에 동석하여 

음악과 춤을 공연하거나 
농담을 들려주던 광대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손님이 떨어진 매춘부 하나가 
최초의 여성 게이샤로 나서기로 작정한다.
 

그러자 오래지 않아 
여성 게이샤들의 수가 

남성을 앞지르게 되고 
매춘부의 고객들도 모두 끌어오게 된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랬지."

"암, 님도 보고 
뽕도 따는 곳에 가야지."

이러자 기존의 매춘부들이 
반발을 한다.

 매춘부 
"아니, 게이샤면 공연만 해야지. 
왜 남의 직업까지 침범해?"

여기에 일자리를 잃은 
남자 게이샤들도 맞장구친다.

 남자 게이샤 
"옳소. 이건 공정거래법 위반이야."

때문에 여성 게이샤와 매춘부 간에 
마찰과 경쟁이 상당했다.


● 겐로쿠 대호황 : 섹스산업의 고도화

17세기 후반, 일본은 
막부의 강력한 중앙집권 통치가 이뤄졌고

이 대목에서 조닌(町人)이라고 하는 
상인계층이 득세하기 시작한다.
 
▲ 조닌

이들은 예전처럼 
특정 영주에 얽매이지 않아도 됐고, 

막부의 비호 하에 
자유롭게 상거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일본의 경제는 
사상 초유의 고도성장을 만끽하게 된다. (겐로쿠 호황)

하지만 이들은 
서양의 부르주아와 달리,

돈만 많았지, 
마땅히 쓸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조닌1
"아놔, 이렇게 돈이 많은데
아직까지도 우리가 사무라이들 눈치를 봐야 하는가?"

조닌들은 
이런 현상이 불만스러웠다.

 조닌2
"그런다고 우리가 
사무라이를 뒤엎을 수는 없어."

 조닌1
"왜? 못할 건 또 뭐야?"

 조닌2
"저넘들이 지금 개점휴업 상태이지만
언제 칼 한번 쓰나 몸이 근질근질한 넘들이거든."

 조닌1
"그래서?"

 조닌2
"우리가 일어서봐. 
얼씨구 좋다고 덤벼들 놈들이지."

 조닌1
"그럼 우리는 할 수 있는게 뭐야?
정치 참여도 못하지, 사회적 지위도 인정받지 못하지."

 조닌2
"우리에겐 돈이 있잖아."

 조닌2
"그냥 맘껏 펑펑 쓰면서, 
인생을 즐기는거야."

그래서 겐로쿠 시대(17세기 후반~18세기 초반) 때 
유독 발달하게 되는게 '섹스산업'이었다.

일명 화류계로 알려진 
'유곽'이 번창하는 것은 물론이고
 
▲ 유곽

야설(야한 소설)에 대한 높은 인기로
급기야 동성애 소설까지 나오는가 하면

남녀의 애정행각을 보다 실감나게 
표현하는 방법으로 '가부키'가 등장하게 된다.
 
▲ 가부키

여기에 '우키요에'라는 형식의 
목판으로 찍은 춘화(春畵)가 일대 인기를 끌게 된다.
 
▲ 우키요에

모두 경제호황과 맞물려
부유해진 상인들의 수요로 만들어진 

일대의 섹스산업이자 
문화사업이였다.


● 18세기 후반 게이샤의 매춘 금지 

1779년 게이샤는 
마침내 정부로부터 '정식 직업'으로 인정되게 됐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동시에 매춘 행위도 강력히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쇼군
"게이샤는 예술인일뿐이다."

 쇼군
"애초에 매춘부들과 
경쟁을 해서는 안되는 직업임."

때문에 이때부터 게이샤들은 
매춘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된다.

겐반(파출소)에서는 
연회에 참석하는 게이샤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호위함으로서 
이들이 매춘의 길로 새어 나가는 것을 막았다.
 

그러다보니, 법률 시행 초기 
게이샤의 인기는 급추락했다.

 조닌1
"아니, 요즘 게이샤들은 
술만 따르고 노래하고 춤만 추면 끝인가?"

 조닌2
"가장 중요한 그것이 없는데.."

이로 인해 당시 게이샤들의 외모는 
상당히 소박(?)하기 짝이 없어서

얼굴이 박색해서 인기가 떨어지는 매춘부들만이
게이샤의 길로 들어설 정도였다.

 
"아놔.."

반면에 당시 매춘부들은 게이샤보다 
훨씬 예쁘고 화려했다.

참고로 일본의 게이샤와 매춘부를 
구분하는 법은 이렇다.

먼저 옷을 입는 방법이 
살짝 다르다.

게이샤은 기모노의 끈을 뒤로 매지만
반면에 매춘부는 앞으로 맨다.

▲ 뒤에 매듭(게이샤), 앞에 매듭 (매춘부)
 
그 이유는 기모노를 벗었다가 
다시 입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또 게이샤들의 머리스타일은 단순했지만
매춘부들은 매우 화려했다.

 
▲ 게이샤(좌), 매춘부(우)

머리 장식만 봐도 
대략 게이샤인지, 매춘부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매춘 금지법이 시행되자
초반에는 게이샤의 인기가 뚝 떨어졌다.

하지만 게이샤들은 점차 
매춘부와는 차별되는, 

격식있는 예술인으로 인식되었으니,
여기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데
천박한 매춘부에게 술을 따르라 할 수 있나.."

또 당국의 보호 하에 있었기 때문에
차츰 게이샤들의 인기가 올라가게 됐다.

때문에 19세기가 되면 
게이샤들은 

매춘부와는 전혀 다른 소비 목적으로
일본 열도 전역으로 확산되게 된다.


● 19세기 중엽, 서양 야만인과 게이샤의 사랑

임진왜란 이후 일본은 
줄곧 쇄국정책으로 일관했다.
(서양과의 통교는 나가사키 항, 한곳을 통해서만 이뤄졌다)

내국인이 해외로 도망치다 붙잡히면 
참수형으로 다스렸고,

외국인, 특히 서양인들은
인간 이하의 '야만인'으로 취급되곤 했다.
 

이런 시기에, 
1856년 타운젠드 해리스라는 미국인이

통상조약을 위해 
일본으로 파견된다.

그리고 협상 도중 해리스는 
아리따운 게이샤에게 홀딱 반하고 만다.

그리고 
일본인들에게 부탁한다.

 타운젠드 해리스 
"저, 저기 게이샤를 
나한테 주면 안될까요?"

 
"뭐요? 
이건 너무 건방진 요구네요."

일본 정부는 처음에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다른 일각에서는 이런 의견도 있었다.

 
"서양인 마음에 들었나 본데, 
그냥 보내주심이.."

 
"그리고 게이샤한테는 스파이 역할을 시키면 
우리에게 아주 도움이 될겁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오키치'라는 어린 게이샤를 미국인에게 보내게 된다.

오키치는 
아주 외모가 출중한 게이샤였다.

 오키치 

이 이야기는 나중에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하는데
제목이 '야만인과 게이샤'다.
 

그런데 일본 당국은 오키치가 
정보원 노릇을 해주길 내심 바라고 있었지만,

그녀는 기대와 달리 
첩자 노릇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해리스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5년여의 협상 끝에 해리스는 
마침내 무역협정을 맺는데 성공하게 된다.

그러자 그냥 고국으로 떠나버리고 만다.
오키치는 그냥 놔두고선..

이후 해리스의 일기에 보면,
'오키치'라는 여인은 전혀 등장하지 않고 있다.
 

미국으로 가더니 
오키치를 잊었던 것이다.

하지만 버려진 오키치는 
마을사람들로부터 조롱에 시달려야 했다.

 
"어이, 더러운 외국인!"

결국 그녀는 알콜중독에 빠지고 
그러다 물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만다.


● 메이지 시대의 게이샤 : 모든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

250년에 걸친 
억압적인 쇼군정치가 계속되자

이번에는 사무라이들이 
정권을 뒤집을 계획을 세운다.
 

에도 정치에 염증을 느낀 사무라이들은
비밀리에 모여 모반을 도모할 장소가 필요했고,
 

그런 의미에서 
게이샤들의 찻집만큼 안전한 장소도 없었다.

 사무라이1 
"게이샤들은 비밀을 
철저히 지키기로 유명하지."

 사무라이2 
"그렇고 말고, 그걸로 먹고사는 애들인데..
우리의 비밀은 절대 새어나가지 않지."

그런 게이샤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사무라이들은 

쇼군의 통치의 막을 내리는데 
성공하게 된다.

그리고 1868년 
황제가 보위에 오르게되자

게이샤들은 자연스레 
일본 최고 권력들의 비호를 받게된다.
 

게이샤들의 지위가 
일대 치솟는 순간이었다.

그러는 사이 일본은 
빠르게 현대 사회로 변화하게 된다.

서양의 기술문명은 
증기시대를 열었고

남성들은 긴 머리를 짧게 자르고 
중산모를 쓰기 시작했다.

당시 게이샤는 오늘날 영화배우처럼
유행의 첨단을 주도하는 여성들이었다.
 

가장 아름답고 재능있고 멋진 여성들로서
모든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 인기를 반영이나 한듯,
1900년도에 접어들자 

게이샤의 수는 
2만 5천명으로 급격하게 불어난다.

이러한 시기에 게이샤가 
일본 수상, 가쓰라 다로의 정부가 되기도 한다.
 

이것은 일본 역사상 권력자가 
게이샤를 아내로 맞은 최초의 사건이었다.

그런가 하면 바론 무츠 외무성 장관은
두 차례 모두 게이샤와 결혼을 했다.
 

어찌 보면 정치인들에게 게이샤는
여염집 규수들보다 훨씬 나은 신부감이었다.

무엇보다 남성을 깍듯이 받들었고, 
비밀을 철저히 지켰기 때문이다.
 

이렇듯 20세기 초반 
게이샤들은 

일본 권력층의 비호 하에 
모두가 선망하는 삶을 누리게 된 것이었다.


● 1920년대, 게이샤들을 위협하는 재즈문화

하지만 1920년대 
현대사회가 본격적으로 개막되면서

게이샤들은 생존을 
크게 위협받게 된다.

1920년대 일본에도 
재즈시대가 도래한다.

쇼걸들이 무대를 수놓고 
서양식 유행에 목말라하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나이트클럽은 
최고의 인기 장소로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카페 걸들은 단연 인기였다.

이들은 게이샤들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남성과 동석하기 시작했고 

무엇보다도 
현대적이었다.

때문에 게이샤들은 사상 처음으로 
심각한 존폐위기에 처하게 된다.
 

결국 1920년대는 
게이샤들에게 커다란 전환점이 되고 말았으니,

그들은 춤과 노래, 음악 등
그들만의 전통을 굳게 지키면서 

바-호스티스와는 다른 모습을 부각시키며
자신들을 차별화 하기로 한 것이다.
 

이때부터 게이샤들은 
첨단 패션을 주도하기보다는

전통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바뀌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게이샤들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재즈 유행은 곧 끝나고 만다.

1926년 히로이토 천황의 즉위와 함께
일본은 군사대국으로 성장하게 되는데,
 

이때 일본에는 국수주의 열풍이 
일제히 몰아닥쳤고

서구의 문물은 
부정한 것으로 비난받게 된다.

그리고 게이샤는 
일본 전통문화의 대명사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그러자 다시 인기를 찾게된 게이샤들은
1930년대 초, 그 수가 최대 8만명까지 치솟게된다.
 


● 1930년대 게이샤들의 빛과 그림자

1930년대가 되면 
일본은 전세계적인 대공황에 휩쓸리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이샤들을 위한
아낌없는 사치는 계속되었다.
 

부유층 남성들은 게이샤들을 위해
값비싼 기모노를 매달 한벌씩 사입거나

여러 명의 게이샤들을 거느리고 
꽃놀이 다니는게 다반사였다.

한미디로 게이샤들에게는 
좋은 시절이었다.
 

하지만 게이샤 전성기에도 
어두운 단면이 있었다.

게이샤의 인기가 높아지자,
시골의 빈곤한 가정들이 

7, 8세 되는 어린 딸들을 
게이샤 하우스에 팔아넘기는 일들이 빈번해졌던 것이다.
 

그렇게 팔려간 어린 소녀들은 
포주나 다름 없는, 

게이샤 대모의 소유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팔려간 소녀들은 게이샤 대모에게 받은
기모노와 숙식비, 

그리고 교육비 등의 빚을 갚기위해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을 수십년 동안 해야만 했던 것이다.
 

행여나 도망친다해도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혀 
다시 돌아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한편 당시에는 다시 게이샤들의 매춘이 
암암리에 생겨나게 된다.

특히 가장 비싼 값을 내는 고객에게 
게이샤의 처녀성을 파는 이벤트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1930년대 교토에서는 
사상 최고가인 10억원을 내놓고 

이벤트에 당첨되는 
사례도 있었을 정도다.

그러했으니, 당시 게이샤들은 돈많은 남자를 잡는게
일생의 목표이기도 했다.

좋은 물주를 잡게되면
게이샤들은 비싼 생활비를 매달 챙겨받고

그 대가로 
평생 남자의 정부로 살게 되는 것이다.
 

다만 성관계를 갖는 이는 
평생 물주가 된 남자 한 사람뿐이어야 했다.


● 2차 대전 중 게이샤 : 강제 징용을 피할 수 없었

1941년 미국을 상대로 전쟁 중이던 일본군들은
게이샤에게 애국심마저도 요구한다.

결국 게이샤들은 전쟁영웅들을 환호하면서
선전 도구로 동원되었는데,
 

특히 카마카제 특공대들은 출발 전 
예쁜 게이샤들을 불러 위로의 잔치를 벌였다.
 
▲ 카미카제 특공대 위로 잔치에 차출된 게이샤들

일본 국민들이 강제로 
군수공장에 동원되어 일할 때도

게이샤 업계는 예전처럼 돌아갔다.
이들 고객의 상당수는 군고위 장성들이었다.

1940년대 일본은 전쟁으로 
나라 전체가 내핍상태였지만

군 장성들의 후원을 업은 게이샤들은 
다른 이들보다 사정이 좋았다.
 

그러나 전쟁이 3년이 
넘어서자 

일본의 자원은 바닥을 들어내고 말았고
게이샤 하우스도 문을 닫는다.

이때는 게이샤들도 
군수물자 공장에 차출됐다.
 

특이한건 이때 게이샤들은 
기모노 소매를 잘라 작업복을 만들어 입어야 했다.

따로 작업복을 
국가에서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기모노를 입고 나온 게이샤들은
공장에서도 단연 눈에 띄었다.

"헐, 저기 게이샤 좀 봐." 

사람들은 
이렇게 수군되곤 했었다.


● 미군정 하의 게이샤 : 매춘부로 오인받게 된 사연

일본이 패망하자 
미군은 일본으로 들어왔다.

당시 일본은 
완전히 공황상태에 빠졌다.

대도시의 경제는 몰락했고, 
부유한 일본인들은 모두 파산했다.
 
▲ 미군정 하의 일본인들

애국심을 고취시키는데 앞장섰던 게이샤들은
이제 다시 한번 충성의 상대를 바꿔야 했으니,

이때 게이샤의 업소들은 
멕아더 장군의 인가 하에 다시 개장했다.

당시 멕아더의 오른팔이었던 
포비언 바워스의 증언이다.

 바워스 
"생존력이 강한 게이샤들은 예전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여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걸 깨닫고는.."

 바워스 
"어떻게든 영어를 배우려고 했다."

 바워스 
"하지만 세련된 게이샤에 비해 
미군들은 거친 편이어서,"

 바워스 
"흔한 접대부로 생각하고 
함부로 대할 때도 있었다."

 바워스 
"하지만 게이샤는 그런 상황에도 늘 남성고객들을 배려했고
미국인들은 바로 그 점에 깊이 빠져들었다."

 

미국 장교들이 게이샤와 어울리는 동안 
병사들은 다른 곳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일본 여성들은 처음에 미군을 두려워했지만
곧 미군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초콜릿 하나면, 퀸카를 고를 수 있지."

당시 미군들도 게이샤란 말을 들어봐서 
이런 아가씨들을 '기샤'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들은 진짜 게이샤가 아니라 
그저 배고프고 가난했던 여성들이었다.
 

미군정에서는 성욕에 굶주린 
미군들의 습성을 이해하고

미군 부대 내에 
'게이샤 하우스'를 마련해 놓기도 하였다.

미군들이 일반인을 겁탈하는 걸 막기 위해 
특별히 설치했던 것이다.
 
▲ 게이샤 하우스 앞의 미군 병사들

그런데 아가씨들은 스스로를 '게이샤'라 불렀지만 
실은 매춘부들이었다.

1950년대초 5만명에 달하는 매춘부들이 
그런 식으로 미군을 상대로 영업을 했고 

그중 대다수가 
스스로를 '게이샤'라 칭했다.

바로 이때부터 서양인들은
'게이샤 = 매춘부'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당시 억울한 게이샤들은 
이렇게 외쳤다.

 게이샤
"게이샤들의 고귀한 이름이 
마구잡이의 매춘부들로 인해 더럽혀지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패전과 함께 
게이샤들도 이미 명성을 잃은 뒤였다.


● 짝퉁 게이샤들, 세계최초로 실리콘 가슴수술을 하다

다소곳하고, 남자를 배려하고
아담하고 귀여운 

일본 매춘부들은
미군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곧 싫증을 내는 
미군들이 늘어났다.

 
"아, 일본녀 처음에는 좋았지.
그런데 점점 싫증나."

 
"나도 그럼. 얼굴은 예뻐.
그런데 그걸로 끝이야."

당시 미군들은 
고향에 두고 온 애인의 가슴을 떠올렸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본인 포주들은 저마다 가슴이 큰 여자들을 찾았다.

그러나 찾는게 
그리 쉽지 않았으니..

이때 업소들은 
기발한 생각을 하게된다.

 포주 
"그래, 없으면 만들면 되는거지."

처음에는 여성들의 가슴에 
염소 젖을 주사하기 시작했다.
 

 포주 
"이게 효과 짱이거든. 걱정마."

 포주 
"젖 나오는 데 
젖 넣는 거니깐 괜찮을거야."

하지만 이 염소 젖은 
가슴 안으로 들어가 곧 썩었다.

부작용으로 가슴을 절개해야 하는 
여성들도 등장하게 되었다.

염소 젖의 부작용이 문제가 되자
업소에서 찾아낸 것은 

바로 '야메 성형'으로도 유명한 
'파라핀'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어쩔 수 없었다.

파라핀의 부작용으로 업소 여성들은
가슴이 확대되다 못해 부어터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안한 것이 
실리콘이었다.
 

그리고 
효과가 상당했다.

신체 조직과 
별다른 이상 반응도 일으키지 않았고,

물이나 열에도 
변질되지 않았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 실리콘은 
구하기가 무척이나 쉬웠다.

당시 미군 병참 창고에 
산처럼 쌓여 있던 것이 군용 실리콘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의 '실리콘 열풍'은 
이후 미국에서도 이어져서 
 

1950년 말이 되면 헐리우드 스타들도
비밀리에 실리콘을 주입하곤 했다.


● 보급형 게이샤 : 온천 게이샤

미군의 일본 점령후 게이샤라는 이름은 
매춘으로 얼룩지어지게 됐다.

많은 게이샤가 
실추된 이미지를 지워보려 했지만

일부에서는 오히려 
이걸 악용하려고 했다.

그중에서 가장 악명높은 건 
온천에서 운영되는 게이샤들이었다.

일명 '온천 게이샤'라는 집단이 있는데
사실 이들은 매춘부나 다름 없었다.
 

스스로를 게이샤라 칭하면서 
게이샤의 상징인 기모노를 입었지만

진짜 목적은 
연회가 끝나고 이뤄지는 성매매에 있었다.

또 소수의 상류층 고객을 위해 
연회를 베푸는 게이샤들과는 달리

온천 게이샤들은 
한번에 수백명의 단체손님을 받았다.
 

온천 게이샤는 
겉치례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저 주어진 조건 속에서 
많이 버는게 목적이었다.

때문에 이곳에서는 공들인 몸 단장이나 
값비싼 기모노 따위는 없었고

단 15분이면 화장을 마치고
전용 미용사 같은 건 물론 없었고, 머리도 그냥 가발을 썼다.
 

그리고 관광객들은 단돈 만원이면 
한시간 동안 차를 마시며 춤을 관람할 수 있었고

비록 무늬만 게이샤라 할지라도 
관광객들은 진짜 게이샤를 봤다며 좋아했다.

심지어 공연이 끝나면 맘에 드는 게이샤와 
사진을 찍을 수도 있었다.
 

진짜 게이샤가 봤다면 펄쩍 뛸 일이지만 
그래도 이 방법은 대성공이었다.


● 오늘날의 게이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일본의 게이샤들은 

어언 400년간을 존재해왔고,
현재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 출근하는 게이샤

현재 일본에서는 소수의 부유층의 술자리에서
술을 따르고 얘기를 나누고

춤과 노래를 부르는 역할로 
게이샤들을 찾고 있다.

오늘날 이들에게 성매매는 전혀 없다.
그냥 예술인으로 생각하는 수준이다.
 

이런 게이샤들은 
보통 5년간의 견습 훈련을 거치고

낮에는 
춤 연습을 하면서 보낸다.

이중 성공한 게이샤는 억대연봉의
고소득 종사자들도 있고 
(다만 지출도 매달 천만원이 넘는다고 한다. 기모노 한벌이 천만원대임)
 

이런 게이샤 하나를 키워내는데도
1인당 6억원의 비용이 소요된다고 한다.

서양 출신 
게이샤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런 게이샤의 수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무엇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남성들의 기호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의 젊은이들은 
게이샤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 고리타분하게 게이샤가 뭐임?"

솔직히 게이샤가 뭔지 모르는
일본인들이 대다수다.

"게이샤 그거 창녀 아님?"

일본이들조차 
그렇게 오해한다.

나이든 사람들이야 
옛날의 향수로 게이샤를 부르지만

젊은이들은 이와는 달리 
호스티스를 더 좋아한다고 한다.


참고 문헌 : 게이샤 (리자 델비), 엽기 세계사 (이성주), 게이샤 침묵의 400년 (HC 다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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