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원길과 비단길
유라시아 대륙을 동서로 이어 준 길은
역사적으로 크게 초원길, 비단길, 바닷길 3개가 있었다.
▲ 통합적인 바닷길은 16세기 서유럽인들에 의해 개척된다.
이 중에 최초로 등장한 길은
초원길이었고,
그 다음에 비단길,
마지막에는 바닷길이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길들을 통해서
인간·물자·정보가 동서로 이동을 했다.
그러면서 인간·물자·정보의 흐름은
곧 권력을 창출했고,
길을 장악한 세력들은
곧 세계적인 패권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구석기시대부터 활용된
'초원길'을 차지했던 세력은 유목민족이었다.
반면에 농경민족들은
초원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던지라,
유목민족보다 인간·물자·정보의 흐름에서
뒤쳐질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청동기·철기,
각종 문물과 기술 등은
초원길을 장악한 유목민족에 의해
농경민족으로 전파가 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고대시대만 해도 유목민족은
농경민족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었다.
▲ 스키타이인들의 세공술
예컨대 중원을 통일한
한나라의 유방도
북방의 흉노족만큼은 감당할 수 없어,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어야만 했다.
한고조 유방
"매년 쌀, 비단,
그리고 예쁜 공주 드릴게요."
그러다가 기원전 2세기
중국이 '비단길'을 개척하게 되면서부터
농경민족이 유목민에게 우위를 점할 수 있다라는
가능성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한무제
"에헴!"
하지만 여전히 유목민족은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발휘했으니,
농경민족뿐만 아니라 유목민족도
비단길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비단길 시대에서는
농경민족이 우위에 서 있는 상황일지라도
여차 방심하면 유목민족에게
호되게 얻어맞는 등의 상황을 종종 연출하게 된다.
구대륙의 중세시대는
기본적으로 이런 구도였다.
반면에 '길'에서 멀리 떨어진 민족들은
문명의 혜택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어서
역사의 비주류가
될 수 밖에 없었는데,
15세기까지
서유럽과 일본이
세계사의 변방으로만 머물러야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초원길과 비단길,
그 어느 쪽에도 제대로 접근할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세계사의 비주류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서유럽, 바닷길을 개척하다
일본은 그렇다쳐도,
서유럽이 세계사의 변방이었다고?
사실
그랬다.
다만 서유럽은 로마 문명의 영향으로
고대로부터 기술 수준이 높았다.
석조 건축물, 포장도로,
수레, 복층 가옥 등을 놓고 보자면
동양의 19세기 말보다도
어떤 면에서는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왔다.
하지만 서유럽이
세계사에서 두각을 보이고
다른 대륙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는 16세기 이후로,
그 이전에는 동유럽(동로마)이나 중동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낙후됐던 지역이었다.
그랬던 이유는
'길'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길에서 멀리 떨어졌기 때문에
서유럽은 발달된 문명을 접할 기회가 적었다.
예를 들면,
화약, 나침판, 종이와 같은 문물들은
모두 중국을 거쳐 이슬람을 통해
수백년이 지나서야 서유럽으로 전래되게 된다.
▲ 종이의 전파 사례 : 중국보다 1000년 이상, 중동보다 300년 이상 뒤쳐진다.
서유럽은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하고자
아시아의 동쪽과 교류를 해보려 했지만,
그때마다 번번히 이슬람과 이탈리아 상인들에게
제지를 당해야만 했다.
이슬람과 이탈리아 상인들은
무역으로 인한 중개차익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상인
하지만 뜻밖에도
12~13세기의 십자군 전쟁을 통해
서유럽은 이슬람 세계를 통해서
화약, 나침판, 항해술 등의 선진문물을 접하게 된다.
▲ 십자군전쟁 : 전쟁을 하다보면 상대방 포로를 사로잡게 되는데,
그런 포로들 중에는 솜씨 좋은 장인도 있기 마련이다.
이후 유럽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고
곧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그리고 안에서 넘치면
밖으로 흐르는 법이다.
서유럽인들은 축적된 에너지를
곧 밖으로 쏟아내게 되는데,
이때 에너지를 쏟아붓기에는
비단길은 너무 멀었다.
때문에 새로운 길을 직접 만들고자 했으니
그게 바로 '바닷길'이었다.
15세기 후반과 16세기 초반
지구촌 곳곳에서는 바닷길이 만들어진다.
1492년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횡단하며
유럽 ↔ 아메리카 대륙의 바닷길을 개척하고,
1498년 바스코 다가마는
아프리카 최남단의 희망봉을 돌며
유럽 ↔ 아프리카 ↔ 인도의
바닷길을 개척한다.
그런가하면 1522년 마젤란은
세계일주를 하며
아메리카 ↔ 태평양 ↔ 아시아라는
거대한 바닷길을 개척하게 된다.
● 바닷길의 개척으로 일본은 숨통이 트인다.
서유럽인들의 바닷길 통합은
크게 두 지역에 축복을 선사했으니..
바로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끝과 동쪽끝이었다.
즉, 서유럽과 일본이었다.
서유럽이야 프로젝트의 당사자였으니
혜택을 독식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하지만 일본은
무엇 때문에 축복을 얻었단 말인가?
서유럽과 일본은 애초에
기존의 초원길과 비단길을 통해서는
도통 상호교류를
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바닷길은
이런 두 세계를 하나로 만날 수 있게해준다.
그것은 일본으로서
새로운 전환점이었다.
종래 일본은 한반도를 통해야만
대륙과 제대로 소통할 수 있었고
또 대륙과 소통해야만
뜻하는 선진문물을 받아올 수 있었지만,
▲ 임진왜란 전 한반도에 설치됐던 삼포왜관
한반도는 전통적으로
일본의 바람을 순순히 들어주지 않았다.
동양에 뿌리 깊이 자리잡은
사대교린의 관점에서 보자면,
한반도는 오직 중국과 교류하면서
선진문물을 얻어 오면 그만이었지,
애써 일본과
교류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탓이다.
때문에 일본은 이런 부분에서
늘 곤궁했고,
그럴 때면 주로 약탈로서
그들의 욕구를 충족하고자 했다.
왜구의 출현은
바로 이런 이유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특히 왜구는 원나라의 힘이 약해지는
14세기 중반 이후 급격히 나타나게 되는데,
당시 한반도는 물론 중국도
왜구의 피해를 대대적으로 입게되었으니,
▲ 당시 왜구의 침입로
이런 이유로 명나라는 개국 초기부터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했다.
영락제
"너희 나라 정부는 대체 무엇을 하길래
왜구 활동도 제대로 통제 못하는거임?"
이러면서 당시 조공 무역의 횟수에 있어서도
일본을 무척이나 푸대접했다.
당시 명나라는 조선과는 1년에 3차례,
오키나와와는 2년에 한차례,
베트남과 태국과는 3년에 한차례
조공 무역을 하기로 방침을 내리면서
일본한테만은 10년에 한번씩
통상 허가를 내린 것이다.
그런데 말이 10년이지,
10년 동안 선진문물과 담을 쌓고 있으라는 말과 같았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바닷길을 통한 서유럽과의 교류가
일본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 바이다.
● 태풍이 일본을 돕다.
태풍은 역사적으로 볼 때
여러모로 일본을 많은 도움을 줬다.
여몽 연합군의 일본 원정을 저지했던 것도
두 차례의 태풍이었는데,
일본과 서유럽의 만남을 주선해 준것도
바로 태풍이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이러했다.
16세기 들어서 포르투갈은
바스코 다가마가 닦아놓은 바닷길을 통해
인도에서 향신료를 얻게되고, 이를 유럽에 되팔면서,
막대한 금전적 이익을 얻게된다.
▲ 향신료 무역
이후 포르투갈 상선들은 인도를 넘어
동남아시아, 중국 연안까지 진출하게 되는데..
이때 포르투갈이 대중국 교역거점으로
만들었던 곳이 바로, 마카오였다.
▲ 1639년 마카오 전경
당시 포르투갈은
마카오에 거점을 만들기 위해
중국 관리에게
매년 막대한 뇌물을 뿌리고 있었다.
포르투갈 상인
"뭐, 누이 좋고
매부 좋은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1543년 한 포르투갈 상선이
마카오를 가려다가
남중국해 일대에서
태풍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8월 남중국해에서 발생한 태풍은
보통 편서풍의 영향으로 빠르게 북동쪽으로 북상하게 된다.
그러니 태풍의 피해를 받게된 선박은
격랑을 이기지 못해 침몰하는 수도 있었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된다면
으레 일본 해안으로 표류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때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포르투갈 선박은
일본 규수 남단의 가고시마에 도착했다.
▲ 16세기 일본에 정박한 포르투갈 선박
그리고 이 사건은 장차 동아시아 역사를
전면 뒤집어놓는 중요한 계기가 되고
우리 역사에도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ㅣ게 된다.
우리는 흔히 임진왜란을 분기점으로
조선 전후기를 나누는데,
그 분기점이 생긴 계기가
바로 포르투갈과 일본의 교류에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랬던 걸까?
당시 표류한 포르투갈 선원들은
감사의 선물로 '조총 두 자루'를 건내줬다. (사실은 돈을 주고 팔았다)
또 일본에게 마카오라는
교역 거점을 알려주게 된다.
일본 상인
"정말로 우리도 명나라에 갈 수 있어?
명나라에선 10년에 한번 씩만 오라고 했는데.."
포르투갈 상인
"그렇데도.
거기 관리한테 뇌물만 먹이면 됨."
일본 상인
"알았어. 나도 앞으로 마카오로 가겠어.
우리 거기서 자주 만나자고."
● 화산과 지진이 일본을 돕다.
사실 포르투갈이 일본을 꼬드겼던 것은
일본의 풍부한 은(銀)을 보았기 때문이다.
포르투갈 상인
"헐, 이넘들 돈(은) 많네.."
당시 일본에서 포르투갈 상인을
유혹할 수 있을만한 물건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일본이 자랑하는 도자기, 칠기도
사실 임진왜란 이후
포로로 잡아간 조선의 도공을 통해 기술이 향상되면서
주요 수출품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었지,
▲ 17세기 서양으로 팔려나간 일본의 도자기
이전에는 유럽에 팔만한
마땅한 물품이 없었다.
때문에
일본에 '은'이 없었더라면
일본은 서양 세계와
친해지기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 당시 일본 은화
그런데 일본에 풍부했던
이나 구리는
모두 화산지대인 신기조산지대에서
많이 출토되는 광석들이다.
▲ 환태평양 조산대 : 페루와 멕시코의 은, 칠레의 구리가 풍부하고
전통시대 일본의 은과 구리가 풍부했던 이유
따라서 화산과 지진은
일본이란 나라에게 소중한 '은'과 '동'을 선물해 준 것이었다.
때문에 일본인들은 은을 들고
마카오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고
그곳에서 포르투갈 상인들이 지닌
중국산 비단과 교환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당시 명나라는
종래 현물로 납부하던 조세를
모두 은으로 납부하도록 하는 '일조편법'을 시행했기 때문에
은에 대한 수요가 무척이나 높았다.
그래서 외국 상인들은 중국인들과 거래하자면
'은'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니 포르투갈 상인들이
일본을 우호적으로 대한 것은 너무도 당연했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
포르투갈 출신 용병이 포함된 것도
어찌보면
전혀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 콜롬부스와 마젤란 때문에 임진왜란이 발생하다.
태풍과 화산, 지진은 일본을 오랜동안 괴롭히던
대표적인 자연재해였지만,
이를 매개로 일본은 서유럽과 만났고
또 서유럽과 교역을 왕성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후 일본의 국력이 급격히 성장했음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오랜동안 한반도 등에
푸대접을 받고
중국에게는 국교단절과 더불어
무역 제제까지 받았던 일본으로서
때마침 불거져온 서유럽의 바닷길 개척은
서유럽과의 교역을 가능하게 만들어,
경제의 숨통을 틔웠을 뿐만 아니라
'조총 도입' 등을 통해 군사력 증강을 달성케 한 것이다.
이런 조건 속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타나
일본을 통일하게 되니,
도요토미 히데요시
오랜 내전을 통해 단련된 병사와
강력한 신무기까지 갖추게 된 일본은
조선과 명나라를 상대로
당당히 전쟁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도요토미
"더 이상 예전의 일본이 아니라능.
말로 안되면 힘으로 보여준다."
결국 16세기 중반
일본을 빠르게 성장할 수 있게 해주고,
임진왜란이라는 도발을 가능케해준
근본적인 원인은
서유럽이 개척한 바닷길에
일본도 하나의 일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콜럼버스와 마젤란의 탐험은
일본의 성장과 대외진출을 도운 셈이었다.
● 일본, 진짜로 임진왜란을 저지른 까닭
그렇더라도 임진왜란은
애초에 발생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일본의 목적은
소박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의
본래 목적은 이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명나라를 치려고 하니
길 좀 비켜줘."
이러면
조금 오해가 생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쉽게 말할까?
명나라랑 다시 교역하고 싶어."
이게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이었다.
1543년 포르투갈과 교류를 하면서
중국과 간접적인 교역을 하게 됐지만
그런 기쁨도 잠시, 8년 뒤인 1551년
중국은 일방적으로 무역중단을 선포하게 된다.
일본이 '10년 한차례 무역'이라는 조건을 지키지 않고
기한이 되기도 전에 조공선을 파견했기 때문이다.
또 중국 해안을 쉴 새 없이 약탈하고 있는
일본 왜구들도 골칫거리였다.
가정제
"이 넘들 완전 구제불능이네.
앞으로는 다시는 오지마!"
한마디로
경제를 봉쇄하겠다는 얘기였다.
때문에 일본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중국과의 관계를 복원하지 않으면 안됐다.
필요하다면
전쟁도 불사해야 했다.
그런데 전쟁이라는 것이,
마음 먹는다고 무조건 벌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섣불리 할 수 없는게 전쟁인데,
그런데 침공의 기회가
여러군데 감지됐다.
먼저 당시 조선 군대의 칼날이
기본적으로 동북쪽 여진족만을 겨누고 있었다.
조선 관료
"남쪽에 무슨 외적이 온다고 그래?
우리는 북방만 잘 커버하면 됨."
거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도하에
당대 세계최고의 육군 전투력을 갖추게 된다.
포르투갈인들이 선물해 준 조총을 기반으로
다량의 조총을 만들었던 것이다.
한 군사연구 서적에 따르면
당시 전세계 조총의 절반 가량을 일본이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조총을 기반으로
일본은 조총부대까지 창설해서 훈련 시켰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일본 군함은 현해탄을 건넌 것이었다.
● 임진왜란의 최대 수혜자는 누굴까?
1번 명나라
2번 조선
3번 일본
4번 기타
정답은 4번이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던
전혀 뜻밖의 세력이 최대 수혜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여진족이었다.
사실 명나라는 건국 이후부터 꾸준히
여진족을 두려워해서,
이들의 힘이 뭉쳐지는 것을
최대한 경계하고 있었다.
홍무제
"여진족 이넘들은 만 명만 뭉치면
절대로 못 막아."
그러면서
완전히 없애는 것도 자제했다.
신하
"그래도 여진족이 있어야 몽골족도 견제합니다.
또 언제 원나라 때처럼 커질지 누가 압니까?"
홍무제
"옳거니, 오랑캐는 오랑캐로 막는다(이이제이)?
그거 좋은 생각"
그래서 만주 땅에
띄엄띄엄 여진족들을 박아놓고
최소한의 세력만을 갖추도록
타이트하게 관리를 하던 터였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나니
명나라는 미처 만주땅의 여진족을 신경 쓸 새가 없었다.
그 사이 여진족들은 대거 힘을 기르고
무기를 구입하고, 군대를 만들고 했으니
임진왜란이 끝나자
누르하치가 이끄는 여진족들은
그야말로 감당할 수 없는
막강한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 여진족들은
대륙 진출에 앞서 가장 먼저 조선을 쳤다.
왜 그랬을까?
가장 큰 이유는 여진족은
물자와 인구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또 금나라가 망한 이유를
반면교사 삼았을 수도 있다.
고려시대 여진족은 고려를 압박하여
사대관계를 형성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완전히 발 밑에 두는 데는
실패했다.
때문에 금나라는 남송을 제대로 공격하려고 해도
고려가 뒤치기를 해올까 걱정해야 했고
결국 이런 딜레마에
중국 대륙을 완전 장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들은
두차례 호란을 일으키며
조선에 완벽한 굴복을 받아냈던 것이다.
그랬던 조선시대 여진족들은
또 한번 커다란 행운을 맞게된다.
임진왜란 이후 중국에서는
농민 반란이 대대적으로 일어나는데
이때 치열한 전투 속에서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군이 결국 명나라를 무너뜨리게 된다.
▲ 황제에 즉위한 이자성
하지만 명나라 관군을 물리치느라
힘이 쫙 빠진 이자성의 농민군은
그만 두달만에
청나라의 여진족들에게 제압당하고 만다.
어찌보면
어부지리였다.
따지고보면,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일련의 일들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여진족들은
주변 민족들로부터 야만족 소리를 듣고
옛 금나라의 추억팔이나 하면서
계속 위축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결국 콜럼버스와 마젤란의 바닷길 개척이
나비효과가 되어,
임진왜란 발발과 청나라 건국이라는
전혀 뜻하지 않는 결과를 야기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예기치 않는 파장이야말로
역사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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