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도 회사의 인도 지배
● 플라시 전투 (1757)
때는 1750년 경,
무굴 제국이 약해지자
유럽 각국의 동인도회사들은
인도의 이권을 놓고 더욱더 설쳤다.
특히 영국 동인도회사의
활약이 돋보였는데,
남부에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를 밀어내고
향신료를 독점하더니
영국
"썩 안 꺼져!"
인도의 노른자라고 할 수 있는
'벵골 지방'을 놓고 프랑스와 다퉜다.
당시 벵골 지방은 비단, 모슬린,
초석(화약 만들 때 필요)등의 특산지로
이곳에서만 인도 무역 수입의
2/3가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벵골을 다스리던
시라지 태수는
영국의 야욕을
익히 알고 있어서
프랑스와 가까이 지내
영국인들을 몰아내려고 했었다.
시라지
"누구 맘대로 남의 땅에서
함부로 장사를 하려는 거임?"
시라지
"허락 없이 장사하는 영국놈들은
모조리 다 추방!"
영국
"아놔.."
이에 영국은 시라지의 부하인
자파르에게 접근했다.
클리브 (영국군 사령관)
"님아, 혹시 벵골의 태수가
되고 싶지 않음요?"
자파르
"내가? 어떻게?"
클리브
"아니, 자파르 님처럼 훌륭하신 분이
시라지 따위의 밑에 계셔야 되겠습니까?"
자파르
"음, 그건 그렇지."
클리브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랑 손을 잡고,
님이 뒤통수를 후려치는 겁니다."
자파르
"뒤통수?"
클리브
"그리고 님이 벵골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는 겁니다."
자파르
"헐! 정말?"
벵골의 귀족과 상인들도
영국과의 무역을 바라고 있었다.
"한창 짭짤하게
돈 좀 만져보나 했었는데.."
"시라지 태수는 왜 자꾸
무역을 못하게 막는겨."
그리하여 상인들과 영국의
지원을 약속받고
시라지의 심복 자파르는
배신을 결심하게 된다.
자파르
"OK! 좋았어!"
그리고 1757년, 벵골의 패권을 놓고
시라지와 프랑스 군대는
▲ 시라지 병사들의 이동식 대포 : 오늘날로 치면 자주포다
영국 군대와
콜카타 인근의 '플라시 평원'에서 마주했다.
▲ 플라시 전투 당시 영국군
당시 시라지군은 프랑스군을 합쳐
6만 명이 넘었으나
영국은 용병인 세포이 2천여 명을 포함해
고작 3천 명에 불과했다.
"세포이가 뭐임?"
"페르시아어로 '병사'를 뜻하는데
보통은 영국에 고용된 인도 용병을 말함."
20:1의 싸움,
누가 봐도 게임이 안 됐다.
시라지
"하하하. 겁대가리를 상실했네.
오냐, 오늘이 네놈들의 제삿날이다!"
시라지
"자파르, 너가 가서 영국넘들을
몽땅 쓸어버리고 오라능!"
자파르
"넵!"
하지만 이때부터
짜고 치는 고스톱이 연출되었으니,
자파르는 수적 우위에도
뭉그적거리더니
자파르
"얌마 살살해! 다치면 아퍼!"
난데없이
회군 명령을 내린 것이다.
자파르
"안 되겠다. 전원 공격 중지!
즉시 퇴각하라능!"
그러더니 아군 진영으로 와서는
오히려 총구를 거꾸로 돌렸다.
자파르
"엣다 모르겠다. 전원 공격!
우리의 상대는 시라지다!"
그러자 놀란 시라지 군사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뜨아! 이게 뭥미?"
그렇게 플라시 벌판에서
치러진 전투는
부하의 배신으로, 단 하루 만에
영국군의 승리로 끝나고 만다.
● 본격적인 인도 수탈
그리하여 자파르는
벵골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으나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실질적인 권한은 영국에 있었다.
▲ 클리브(좌)와 자파르(우)
영국은 그에게 플라시 전투에 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게 하고,
영국 상품에 대한 관세 면제 등의
특권을 얻어낸 것이다.
클리브
"이게 다 님 도와주려고
우리가 그렇게 고생한 거니.."
클리브
"깽값은 님이 좀 책임져 줬으면.."
자파르
"나 지금 돈 없는데?"
클리브
"아놔, 너무 하시네.."
클리브
"그러면 우리한테
세금 징수권을 대신 주세요."
자파르
"..."
그리하여 영국은
벵골의 세금 징수권을 얻게 되었으니,
이때부터 인도에 대한 수탈이
본격화되는 것이다.
영국
"..."
즉 여전히 영국은
인도 상품을 실어 날랐으나,
벵골 지방에서 거둔 토지세로
대금을 지불했기에
▲ 당시 인도의 은화
더 이상 영국의 은이
인도로 들어오지 않았고
인도의 부(富)가 고스란히
영국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가뜩이나 당시 영국은
지구 반대편에서도
삼각무역을 통해
열심히 돈을 쓸어 담고 있었으니,
주체할 수 없는
자본의 축적은..
영국
"하하하. 돈이 흘러넘치네.."
결국 산업혁명으로
터져나오게 된다.
"18세기 후반 영국의 산업혁명에는
바로 이러한 배경이 숨어 있었다능."
한편 영국은, 벵골의 수탈로
더 많은 세포이를 고용할 수 있어서
인도 아대륙을 공격하는 데에도
첨병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 세포이
영국
"하하하. 이거 완전히
꿩 먹고 알 먹고네."
그러나 당시 인도에 있었던,
여러 토후국의 지배자들은
서로 힘을 합해
영국에 대항하는 법을 몰랐다.
원교근공(遠交近攻)이라는
전통적인 인도의 외교정책은
가까운 적은 경계하면서도
멀리서 온 영국은 위험한 존재로 여기지 않았던 탓이다.
"영국? 낯선 이웃과는
친하게 지내는 게 좋겠다능."
하지만 영국은
오히려 그런 점을 이용하여,
야금야금 세력을
넓혀 나갈 수 있었으니,
이때 영국의 위세에 눌려
나라를 넘긴 왕도 있었지만
어떤 왕은 이웃 나라를 치기 위해
영국을 끌어들였다가
도리어 영국에 지배권을
빼앗기는 경우도 있었다.
"아놔, 늑대 잡으려다
호랑이를 끌어들였네."
그렇게 해서 1800년 경 영국은
인도 아대륙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 소비시장으로 바뀐 인도
'플라시 전투'가 터진 1757년부터
'세포이 항쟁'이 터진 1858년까지
100년 동안 인도 아대륙을
'동인도 회사'가 지배 했다. ☞ 참고
▲ 런던의 동인도 회사 본사
"읭? 회사가 나라를 지배해?"
▲ 동인도 회사의 주주들 : 동인도회사의 인도 지배는 철저히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이 시기 영국은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었으니,
'산업혁명'이 도래하여
기계가 실을 짜고 천을 만들게 된 것이다.
때문에 이때부터
모든 게 역전된다.
인도 직물이
영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오히려
영국 직물이 인도로 들어간 것이다.
기계로 제작된 영국의 값싼 직물이
대량으로 밀려오자,
수작업으로 생산하던
인도의 직공들은 도저히 경쟁이 안 됐다.
인도인
"와! 영국 면직물이
품질도 좋고 훨씬 더 저렴하네."
그리하여 인도의 직공들은
졸지에 실업자가 된다.
"에겅.."
유럽의 귀부인들에게 사랑받던
벵골 특산의 모슬린도 자취를 감추었다.
▲ 모슬린을 입은 인도 귀족
영국인들은 모슬린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기 위해
"아놔, 섬세한 모슬린만큼은
기계가 도저히 따라 해줄 수 없네.."
"이거 모슬린 생산을
아예 근절시키던지 해야 되겠어."
▲ 모슬린으로 만든 드레스
80%라는 과중한
관세를 붙이는 한편,
모슬린 직공들의 엄지손가락을
자르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 참고
"뜨아!"
인도의 직물 산업은 그렇게
철저히 파괴되었다.
농민들의 피해도 심각했다.
영국은 막대한 토지세를 부과했기 때문에
농민들은 세금을 감당하지 못하고
땅을 팔고 대거 소작농이 되었다.
"에겅 예전에는 20%를 냈는데,
이제는 1/3이나 떼어가네." ☞ 참고
소작료 또한 엄청나서
농민들은 수확량에 관계없이
해마다 무거운
세금을 내야만 했다.
"아니, 소작료는 원래
수확량의 절반을 떼어가는 거 아니었나요?"
영국인
"절반만 떼어가는데 뭐가 문제야?"
"그렇다면, 이번에 쌀 4가마니 생산했는데,
왜 3가마니를 가져가는 겁니까?"
영국인
"무슨 소리야! 3년 전에 6가마니 수확했잖아.
우린 그걸 기준으로 했어!"
"그때는 워낙 풍년이 들어서
반짝해서 많이 수확한 건데요.."
영국인
"시끄럿!"
▲ 굶주림에 시달리던 인도인들
한편 넓은 땅을
차지한 영국인들은
자국에서 한창 진행 중인
섬유산업의 원료 조달을 위해
인도인들에게 곡물 대신에
강제로 면화를 재배하게 하는가 하면,
벵골 지역에서는
아편을 대량으로 재배하게 했다.
"웬 아편?"
당시 영국에서는
차 마시는 것이 유행하고 있어서
중국의 차를 사기 위해
많은 양의 은이 유출되었는데,
영국인들은 이런 무역구조가
몹시도 불만이었다.
영국인
"쳇! 중국넘들은
당최 우리 물건을 사주려고 하지 않으니.."
영국인
"안 되겠어. 무역 적자를 해소하려면
마약이라도 팔아야겠어."
그리고 정말로 영국인들은
중국에 아편을 팔기 시작했으니,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인도의 아편 농장이었던 것이다.
▲ 아편을 생산하고 있는 인도 노동자들
영국
"하하하"
▲ 영국은 이런 식으로 무역적자를 해소했다
▲ 아편에 찌든 인도인들 : 아편 재배는 인도인의 건강 역시 해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19세기 중반부터 영국은
인도에 철도를 놓기 시작했는데
50년도 지나지 않아
길이가 6600km에 이르게 된다.
▲ 철도의 터널 공사를 하고 있는 인도의 노동자들
세계에서 4번째 규모이고
아시아의 모든 철도를 합친 것보다 길었다.
▲ 1909년 당시 인도의 철도
하지만 이렇게 영국이
인도에 열심히 철도를 닦아놓은 이유는?
원자재와 상품을
빠르게 실어 나르는 것은 물론,
곳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인도인의 저항을
신속히 진압하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이와 같은 수탈 구조를 빗대어
당시에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마치 스펀지와 같아서.."
"갠지스 강에서 모든 것을 빨아들여
템스 강변에 짜내고 있다."
결국 19세기에 승승장구하던
산업혁명의 첨병 영국의 이면에는
원료 공급지로서,
상품 소비시장으로서
영국에게 헌신을 다 했던
인도라는 거대 식민지가 있었던 것이다.
영국령 인도제국
● 영국의 식민 정책
영국은 식민지배 초기,
인도인의 생활과 종교에 간섭하지 않았다.
영국인
"우리가 필요한 것은
인도의 물건과 자원들.."
영국인
"다른 건 관심 없음."
하지만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거대한 인도 시장의 매력을 알아차리자
인도의 사회·문화 전반을
침략하기 쉽게 뜯어고치기 시작한다.
영국인
"오! 3억 인구의 거대 시장!"
당시 영국의 침투 과정은
대략 이러했다.
가장 먼저
선교사들이 들어갔다.
선교사
"우상 숭배와 미신을 타파하세요."
선교사
"하나님이 가난과 고통에서 시름하는
여러분들을 구원해 줄 겁니다."
그러면서 선교사들은
서구의 화려한 문물을 동시에 선보였다.
"와!"
인도인들이 보기에
서양의 의술은 놀라웠고, 문물은 화려했다.
그러면서 은연중에
서양의 것들을 동경하게 된다.
그럴때 영국인들은,
선교사들이 전해준 정보들을 통해
인도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티' 같은 악습에 주목하게 된다.
▲ 남편이 죽으면 부인도 산채로 태워졌던, 힌두교의 악습 '사티'
그리고는 영국의 지배가
'인도의 근대화'를 이룩해줄 것이라 선전한다.
영국
"우리가 야만적인 악습을 없애고
여러분들을 가난에서 구제해주겠슴돠."
그러면 어느샌가 인도인들도
서양의 가르침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맞아! 미개한 인도를 깨우려면
영국과 같은 나라의 도움이 필요함."
선전이
효과를 발휘하게 되면
다음 단계로, 학교를 세워
유럽의 학문과 영어를 가르치게 되는데,
▲ 콜카타 대학교
이를 통해 식민지배에 필요한
'협력자'들이 길러지게 되는 것이다.
영국
"그래, 식민지배는 이렇게
요령껏 하는 거야."
하지만 피식민지인들에 대한 근대 교육은
부작용을 낳기 마련이다.
협력자를 양성하기 위한
근대 교육이었지만
동시에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도
깨우치게 되는 것이다.
"어? 민주주의와 민족주의가
숭고한 이념이라면서.."
"왜 우리들에게는
적용되지 못하는 걸까?"
▲ 영국인들의 생활
결국 협력자를 만들려는
서구식 교육은
외려 인도인들이
근대화를 고민하고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데 있어
주요한 단초를 제공하게 되었다.
● 세포이 항쟁 (1857)
동인도회사는 갈수록
인도의 종교를 무시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슬람교가
돼지고기를 금기하고
힌두교가 소고기를 금기한다는
상식도 간과하여
인도인 용병 세포이들에게
소기름과 돼지기름이 묻은 총을 지급했다.
▲ 세포이
힌두인
"이게 뭐야?
설마 소... 소기름?"
무슬림
"이런 젠장!
총에 돼지기름을 처발랐어!"
이런 소문은 삽시간에
세포이들 사이로 퍼져나갔고,
세포이들은 자신의 종교를
부정하는 일로 받아들여,
세포이
"도저히 참을 수 없다!"
홧김에 그만
영국인 장교를 죽이고 말았다.
1857년 델리 인근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피를 본 세포이들은
일제히 흥분했고,
"영국을 몰아내자!"
항쟁의 구심점을 찾기 위해
델리로 향해,
영향력이 거의 없어진
시골 면장과도 같았던,
무굴의 마지막 황제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추대했다.
바하두르 샤 2세
"뭐? 너희들의
수장을 맡아달라고?"
바하두르 샤 2세
"그러면 다시 나를
제국의 황제를 받들겠다고?"
그것은 마치 임오군란 당시
구식군대가 우발적으로 사건을 일으킨 다음,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옹립하려던 것과 상황이 비슷했다.
"헐! 그러고 보니 비슷한 역사네."
그런 사실이 알려지자
수많은 인도인들이 합류했다.
영국의 약탈에 시달리던
농민, 수공업자, 상인들은 물론
기독교 전파에 불만을 가진
힌두교·이슬람 지도자들도 뜻을 같이 한 것이다.
"영국을 몰아내자!"
이런 엄청난 봉기에
영국인들은 깜짝 놀랐다.
영국
"뜨아! 갑자기 왜들 저래?"
영국
"아! 인도를 식민지로 삼기 위해
100년을 노력했는데,"
영국
"이렇게 공든 탑이 무너지는 건가!"
그러나 인도인들의 저항은
즉흥적이었고,
치밀한 계획하에서
일어났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구심점이었던
바하두르 샤 2세도 상징적인 존재일 뿐,
영국의 지배를 받던
각지의 번왕들은
무굴 황제를 추대한다는 소식에
저마다 콧방귀를 쳤고,
"쳇! 누구 맘대로
추대를 하겠다는 거임?"
영국의 통치하에 협력자로서
호의호식하던 대지주와 대상인들도
세포이들의 저항에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뭐, 무굴 시대로 다시 돌아가자고?
택도 없는 소리!"
특히 무굴 제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펀자브 지역의 시크교도들은
무굴 황제 옹립 소식이 크게 반발하여
오히려 영국에 편에 서서 세포이들과 싸우고 있었다.
▲ 시크교 병사들
결국 세포이의 봉기는
구심점이 없었고,
즉흥적인 항쟁이었기에
곧 한계에 봉착했고,
영국 본국에서
지원군이 도착하자
세력은 크게 위축되어
각개격파되기 시작하더니
"쾅쾅쾅!"
이듬해 모든 세포이들이
토벌되기에 이른다.
이때 영국인들의 복수는
실로 잔혹했다.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죽이고
닥치는 대로 불태웠던 것이다.
"파괴된 기독교 교회 하나에
힌두교 사원 100개를 파괴하고.."
"살해된 영국인 하나에
이교도 1000명을 처형하라!"
이러한 구호 아래,
영국인들은
아무 죄가 없는 어린아이와
여성들까지 무참히 살해했고
수백 명의 머리를 효수하여
가로수에 매달아 놓기도 했다.
또 포로로 잡은
힌두교도와 무슬림 세포이게는
소와 돼지의 피를
강제로 먹이기도 했다.
"헐!"
● 영국령 인도 제국의 탄생
세포이 항쟁을
무력으로 토벌한 영국은
이후 인도에 대한 식민지 정책을
전면적으로 바꾸게 된다.
"인도인들에게 무리하게
서구화 정책을 강요하지 말자능."
"맞아! 서구화 정책에 반발해서
그 엄청난 인구가 똘똘뭉친 것 좀 봐."
"차라리 고유한 관습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는 게 더 낫겠다능."
"관습대로 살도록 하자고?
그러다 독립이라도 하겠다면 어쩌고?"
"아냐! 인도는 엄청나게 다양한 나라라고.
사용 언어만 1600개가 넘어."
"그냥 그대로 제각기 살도록 놔두면
절대로 통합하지 못해."
"오히려 자기들끼리 서로 반목하고
이간질하기 바쁠걸."
"하긴, 그렇긴 하네."
그렇게 해서 영국은
인도에 대한 서구화정책을 포기하고,
인도인의 관습을
존중한다는 명목하에
인도가 하나의 힘으로 합치는 것을 막는
'지능적인 통치'로 일관하게 된다.
영국
"앞으로 인도의 종교에
절대 관여하지 않겠삼."
그러면서 영국은
교묘하게 힌두교와 무슬림이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도록 부추겼다.
이를테면, 이이제이였다.
영국
"무슬림들이 힌두교도를 죽였다."
힌두교도
"뭐야?"
영국
"힌두교도들이 이슬람 사원을 파괴했다."
무슬림
"뭐야?"
군대도 개편했다.
봉기에 적극 가담한
힌두교와 무슬림의 수를 크게 줄이고,
영국을 도와줬던
시크교도를 대대적으로 육성한 것이다.
▲ 시크교 병사들
그런가 하면 토후국에 대한
무리한 병합 정책도 포기했는데
(토후국 : 영국의 보호하에 자치권을 부여받은 번왕국)
토후국들을 그대로 놔두면서
자치권을 보장해주는 것이,
인도 분열 정책에
더 이득이 된다는 계산에서였다.
"당시 인도에는
500여개의 토후국이 있었다능."
그리고 이듬 해인
1858년에는,
그동안 약탈과 지배로 악명 높았던
'동인도회사'를 폐지하고
영국 정부가 직접 통치하는
'영국령 인도 제국'을 출범하게 된다.
▲ 인도제국의 국기 : 1900년부터 올림픽에도 참가했다
영국
"앞으로 동인도회사와 같은
무지막지한 강압 통치는 없을 거라능."
영국
"인도 역시, 자비로운 빅토리아 여왕께서
직접 다스리겠음!"
▲ 빅토리아 여왕
하지만 그런 유화책은
기만술에 불과했다.
영국은 세포이 항쟁을
진압하는 데 쓴
5천만 파운드라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고스란히 인도인의 빚으로 떠넘긴 것이다.
영국
"폭동을 진압하려고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영국
"그러니 어서 인도인들은
수고한 우리들에게 빚을 갚으라능."
때문에 19세기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타이틀로
▲ 19세기 후반 영국의 영토
화려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지만,
반대로 인도인들은
더욱더 빈곤해졌다.
▲ 기아에 시달리던 인도인들
인도인들의 독립 운동
● 국민회의와 무슬림연맹의 대립
인도 제국의 탄생 이후,
빅토리아 여왕은 인도에 총독을 파견했고
관리들을 대거
현지인으로 충당했다.
한편 영어를 할 줄 알고
근대 교육을 배운 지식층이 늘어나자
지식인들은, 인도인을 대표하는
정치기구를 만들겠다고 요구하고 나섰는데,
뜻밖에도 영국은
이를 반대하지 않았다.
"차라리 얘네들을
방패막으로 활용하면,"
"오히려 인도인의 저항을
약화시킬 수 있겠다능."
"그렇지. 적어도 세포이 봉기와 같은 사태는
또다시 일어나지 않을거야."
그래서 1885년,
'인도 국민회의'가 결성된 것이다.
▲ 인도의 국민회의 (1885년)
하지만 인도인을 대표하는
정치 기구라고 하기에는 문제점이 많았다.
다양한 종교와 계층을 참여시킨다는
당초의 계획과는 달리,
72명의 참석자 가운데
3/4 이상이 힌두교도였던 것이다.
무슬림
"젠장, 이런 게 어딨어?"
또 이들의 관심사란
민생의 문제와는 동떨어진,
자신들의 권익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번에 인도인 출신 장교도
많이 뽑아 주세요."
"인도인 출신 공무원도 많이 뽑아주고
유학생들도 많이 좀 뽑아주셈."
"우리 무슬림 출신들도
좀 더 뽑아 많이 주셨으면.."
게다가 국민회의는 점점
힌두교도들이 독점하는 형태로 변해갔다.
무슬림
"이거 완전히 힌두교도들이
몽땅 다 차지하겠다는 속셈이네."
때문에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입장은 고려하지도 않는
힌두교도들의 독선적인 방식에
불안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서,
힌두교도인들의 협조 요구에
매번 딴죽을 걸었고
힌두교도
"너희는 왜 같이 동참하지 않는 거임?"
무슬림
"흥!"
스스로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무슬림들은 오히려 영국과 손을 잡곤 했다.
때문에 영국인들은 신이 났다.
이이제이가 과연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영국은
느닷없이 '벵골 지역 분할령'을 내린다. (1905년)
영국
"벵골 주는 너무 넓어서
둘로 나누어 통치했으면 한다능."
영국
"먼저 벵골의 서쪽을 떼어내어
다른 주에 편입시킬까 하는데.."
하지만 영국의 의도는
너무도 속이 보였다.
벵골 지역에서 동쪽(현재 방글라데시)은
무슬림의 비율이 높았지만,
서쪽은 힌두교도들의
비율이 높았기 때문에
벵골의 서쪽을 다른 주에 편입시키면
그만큼 무슬림의 힘이 커지게 되는 것이다.
"..."
즉 영국은 수적에서 열세인
무슬림의 힘을 강화시켜
양측의 대립과 갈등을
좀 더 격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영국
"힌두교와 무슬림의 싸움이 점화될수록
반영(反英) 운동은 약화되기 마련!"
하지만 힌두인들의 저항으로
벵골 분할령은 폐지되고 말았고,
▲ 법정에 선 틸라크 : 그는 벵골 분할 반대투쟁의 중심 인물이었다
당시의 앙금으로
무슬림들은 스스로
'인도 무슬림 연맹'을 만들며
힌두교도들의 '국민회의'에 대항하게 된다.
▲ 인도 무슬림 연맹 (1906년)
● 간디의 불복종 운동 (1930)
그러던 중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영국이 전쟁 중이기에
인도에게는 독립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하지만 인도인들은
모험보다는 협력을 택했다.
영국
"지금 우리를 도와주라능.
그러면 나중에 자치권을 주겠음."
틸라크 (국민회의 지도자)
"그 약속 꼭 지키셈."
그래서 100만 명이 넘는
인도인이 징병되고
6만 4천여 명이 죽고
7만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심지어 전쟁 비용도
인도가 직접 부담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영국은 입을 싹 씻었다.
인도
"왜 약속 안 지킴?"
영국
"누가 뭐래? 좀 더 기다려 봐."
하지만 이후 영국은
인도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했다.
1919년 법원의 판결 없이도
인도인을 체포·구금할 수 있고
언론·사상·집회의 자유를 제한하는
'롤래트 법'을 발표한 것이다. ☞ 참고
영국
"앞으로 함부로 여러 사람들이 몰려다니면
롤래트 법 위반으로 잡아가겠다능!"
"헐! 인도판 긴급조치인가?"
그러나 이에 인도인들이
파업으로 대응하자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법을 적용하여
이들을 강제로 잡아들였고,
축제를 즐기기 위해
모인 사람들까지도
롤래트 법 위반이라고 해서
무자비하게 총격을 가했다.
당시의 무차별 총격은
어린이, 여성, 노인을 가리지 않았으니,
단지 10여 분 만에
1500명의 목숨을 앗아가 바렸다. (암리차르 학살)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도인들의 반영 감정은 더욱더 거세졌다.
"이런 천하의 원수들!"
이 무렵 국민회의의 지도자가 된 간디는
'불복종운동'을 시작했다. (1925년)
간디
"영국이 하는 일에
일체 협조하지 않으면 됩니다."
간디
"종교를 떠나서 우리 모두
스와데시(조국) 스와라지(자치)를 외칩시다!"
간디
"또 가능하면,
국산품을 애용합시다!"
▲ 간디의 주장은 국민회의의 4대 강령으로 발전한다
이런 그의 주장은
간단 명료했기 때문에
곧바로 전국 곳곳으로
퍼져 나갔고,
이 때문에 감옥에 갇힌 사람만
2만 명이 넘었다.
영국
"롤래트 법 위반!
싹 다 잡아들여!"
영국
"에겅, 감옥이 꽉 찼네.."
하지만 그럼에도,
영국이 인도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1930년 국민회의의 대표였던 네루는
급기야 독립을 요구하게 된다.
네루
"더 이상 못 참겠음!"
네루
"이젠 우리가 원하는 건
자치가 아닌 완전 독립이라능!"
그리고 그해 간디는,
영국의 소금 독점에
반대하는 시위로
일명 '소금행진'을 시작했으니,
60세가 넘는 노구를 이끌고
400여 km를 걸어 바다에 도착한 그는
▲ 간디의 소금 행진
손으로 바닷물을 떠다 햇볕에 말려
한 줌의 소금을 만들었던 것이다.
간디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소금을
영국이 독점하는 것은,"
간디
"인도인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다!"
그리고 소식이 알려지자
인도인들은 줄을 이어 소금을 만들었고
당황한 영국 정부는
이들을 마구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때 국민회의를 이끄는
간디와 네루도 체포됐으니,
이들의 구속을 두고 반발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일어났고
그로인해 투옥된 이들만
6만 명에 이르렀다.
"간디와 네루를 석방하라!"
영국
"아놔, 풀어주는 게 낫겠다능."
그리하여 영국 정부는
간디와 네루를 비롯해서
소금 행진으로 잡아들인 인도인들
대부분을 풀어주었고
▲ 네루와 간디
'가정용 소금'이라는 조건 아래
인도인의 소금 생산을 인정하게 된다.
처음으로 간디의 불복종 운동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 위대한 영혼, 간디
인도인들은 간디의 이름 앞에
'마하트마'를 붙인다.
마하트마 간디,
즉 '위대한 영혼' 간디라는 뜻이다.
그의 생일인 10월 2일은
인도의 국경일이고
인도의 모든 지폐의 주인공은
오로지 '간디'다.
"와! 대단!"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던 간디는
덕분에 영국 유학을 하고
변호사가 되어 인도로 돌아왔다.
당시 인도 엘리트들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밟은 셈이다.
그러던 중 간디는
남아공에 사업을 하러 갔고,
현지에서 인도인들의
처참한 현실을 목격하게 된다.
간디
"아! 흑인 노예가
해방되었다지만,"
간디
"이제는 인도 노동자(쿨리)들이
사실상 노예와 같구나."
그조차 유색 인종이라는 이유로
기차의 1등칸에서 쫓겨났을 정도였다.
백인
"감히 유색 인종이
함부로 1등칸에 들어오다니!"
백인
"썩 꺼져!"
그런 그는 남아공 현지에서
인도 노동자들의 대변자로,
인종 차별에 대항하는 투쟁가로
20년의 세월을 보내다가
1915년 인도로 돌아와
국민회의의 정치가로 활동하게 된다.
▲ 1918년 당시 간디
하지만 당시
인도 정치가들의 관심이란,
자신들 이익집단의
의석수 확대와
자치권의 확대 정도에 있었지
민중의 요구와는 거리가 있었으니,
이를 안타깝게 생각했던 간디는
보다 현실적인 문제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간디
"농민들의 소작료를 내려달라!"
간디
"소금세를 철폐하라!"
그가 제시한 방법도
행진하기, 하던 일 멈추기 등
사람들이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영국인과 다를 바 없이
호화롭게 살아가는 여느 지도자들과는 달리
민중과 같은 옷을 입고
그들처럼 소박한 삶을 살았다.
▲ 실을 짜는 간디 (1920년대 후반)
그러했기에 간디의 주장은
민중들에게 더욱더 진정성 있게 들렸다.
실제로 그가 등장하기 전까지
독립운동은 오직 지식인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그가
민중들의 마음을 파고들자,
노동자와 농민을 비롯한
민중들이 함께 하면서
인도의 독립운동은
진정한 대중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된다.
때문에 그는 오늘날
인도의 위대한 영혼으로 불리는 것이다.
● 파키스탄의 탄생과 불가촉천민의 타파
간디를 비롯한
국민회의의 힌두교도는
무슬림 연맹도 자신들과 함께
영국에 대항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무슬림 연맹은
국민회의를 믿지 못했다.
간디
"서로 힘을 합칩시다."
이크발 (무슬림 대표)
"그러면 무슬림들의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있는 대안을 내놓으세요."
이크발
"무조건 화합만
강요하지 말구요."
하지만 국민회의는 결코
무슬림에게 양보하는 법이 없었다.
국민회의
"그래봤자 우리는 다수.
무슬림은 소수!"
그리하여 무슬림들은
끝내 힌두교도들과 화합하지 않았고,
결국 1930년
이크발의 주도로
파키스탄(PAKISTAN)이라는
무슬림 지역 조직을 만들게 된다.
"파키스탄에서 pak는
페르시아어로 '순수함'이라는 뜻도 있지만,"
"인도 북서부의 펀자브 + 아프간 +
카슈미르 + 신드의 머리글자에,"
"땅, 나라를 뜻하는 '스탄'을 붙여
만들어진 신조어였음."
"우리도 무슬림의 나라인
파키스탄을 건국합시다."
그리하여 간디와 마찬가지로
파키스탄에서도 이크발의 생일을
매년 국경일로
경축하고 있다.
한편 국민회의와 무슬림연맹이
종교적 이해를 놓고 서로 옥신각신할 무렵,
이들과 달리
인도 내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사회운동을 전개했던
이가 있었으니,
카스트 제도의 모순과
불가촉천민에 대한
차별을 없애는 데 앞장선
'암베드카르'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당시 인도에서는
접촉해서는 안되는 오염된 존재로
노예 집단인 '수드라'보다 못한,
'불가촉천민'이라는 신분이 있었다.
(인도 12억 인구 중 64%가 수드라, 17%가 불가촉천민이다)
▲ 하수도를 청소하고 있는 인도의 불가촉천민
이들의 신분은 어부·백정·
청소부·세탁부 등으로,
사람들이 더럽게 생각하는 일들을
도맡아 하면서도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 불가촉천민의 집
어느 정도였냐 하면,
당시 인도의 불가촉천민들은
저수지의 물도
함부로 기르지 못 할 정도였다.
"젠장, 저 저넘들 때문에
물이 다 오염됐어."
▲ 물을 얻어 마실 때도 접촉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불가촉천민이라는
이유만으로
경전인 베다를 읽으면
혀를 자르고,
베다를 외우면
그 머리를 잘라야 한다는 식의
관습법이
있을 정도였다.
▲ 인도 남부의 불가촉 천민 (1906년)
하지만 암베드카르의
10년이 넘는 법정 투쟁 끝에
불가촉천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암베드카르
"드디어 불가촉천민들도
힌두교 사원을 이용할 수 있고.."
암베드카르
"공공 시설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
동서양 모두,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직업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백정'이 그러했고
중세 유럽에서는 '망나니'가 그러했다. ☞ 참고
조선시대 백정은
망나니 일도 겸업했기 때문에
사실상 같은 이유로
천대 받는 직업이었다.
그런데 이들에게
직업 선택의 자유를 부여하게 되면
아무도 그런 일을 하지 않으려
할 것이기 때문에
사회는 의도적으로
이들을 차별해야만 했다.
"너희는 태어날 적부터
그런 일을 하도록 운명을 타고났음!"
▲ 불가촉천민 가족 : 신분이 세습되기 때문에, 인도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그런데 인도는 여기에
종교적인 관념까지 더해진 것이다.
살생을 금기시하는
힌두교의 전통 문화는
식물의 뿌리도
생명의 근원이라고 해서
육식과 마찬가지로
자제할 정도였으니,
"그런 이유로 브라만들은 파, 마늘 등도
식물의 뿌리라고 먹지 않는다능."
육식에 대한 혐오는
더욱더 클 수밖에 없었고,
"그렇다고 육식 자체가
완전 금기시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살생을 주업으로 하는
백정, 어부와 같은 직업들은
더욱더 천시되었다.
▲ 고기잡이를 주업으로 하는 불가촉천민
짐승의 가죽으로
신발, 가방 등을 만드는 이들 역시
같은 이유로
불가촉 천민이 되어야만 했다.
그런 전통 때문일까?
오늘날 인도인들은
세계에서 육식 섭취량이
가장 적은 민족이자,
평균 신장이 전 인류 중에서
가장 작은 축에 속한다. ☞ 참고
"성인들의 평균신장이
남자 161, 여자 152 정도로.."
"한국인들보다 10cm가량 더 작고,
조선시대 사람들과 비슷하겠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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