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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인도의 현대사 : 민주주의 국가인 동시에 왕조국가 + 인도는 왜 가난하게 살았나?

인도의 분열

● 자치권의 획득 (1935)

1935년, 인도인들의 독립 요구가 
갈수록 거세지자

영국은 이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신 인도통치법'을 발표했다.
 

인도를 캐나다, 호주처럼
'연방제'로 통치하기 위해서였다.

moon_and_james-83영국 
"앞으로 군사권과 외교권을 제외한
모든 자치권을 부여하겠음."

다만 일정 이상의 재산을 가져야만 
한다는 조건에 따라,

인도 성인 중 1/6에게만 
선거권이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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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쳇! 부자들만 사람이라는 건가?"

어쨌든 연방제로 거듭난 인도는
의회 구성을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인도 11개 주 가운데
7개 주에서 국민회의가 승리했다.
▲ 인도의 의원들 (1935년)

이때 무슬림 연맹은 국민회의와 
연립정부 구성을 제의했지만
▲ 무슬림 연맹

국민회의는 
이를 거부했고,

 무슬림
"쳇! 언제는 같이 
화합하자고 해놓고선.."

 무슬림
"혼자서만 정권을
독차지하겠다는 얘기네.."

때문에 무슬림들은 힌두교도들을
더욱 신뢰할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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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정치권에서 타협과 양보가 있었다면
인도의 분단은 막을 수도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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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면 오늘날 인도는 
16억의 엄청난 인구 대국이 되었을 것임."


● 2차대전의 참전 (1939~45)

1939년 난데없이
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이때 영국 정부는 
인도인들과는 아무런 상의 없이 

인도가 대영제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james_special-8영국
"또 도와주는 거지?"

 국민회의
"누구 맘대로?"

james_special-33영국
"아놔, 좀 도와주라능."

 국민회의
"1차 대전 때도 파병 대가로 자치권을 주겠다더니
제대로 약속을 안 지켰잖아." 

moon_and_james-86영국
"시간은 걸렸지만, 
결국 약속은 지켰잖아."

그렇게 영국과 국민회의가
옥신각신하고 있을 무렵,

이를 세력 만회의 기회로 여긴
무슬림 연맹은 국민회의와 입장을 달리했다.

 무슬림
"지금은 우리가 영국을 
돕는 게 맞는다고 생각함."

 무슬림
"영국이 망해봐. 
그러면 우리는 무사할 것 같나?"

 무슬림
"히틀러가 쳐들어오고, 
일본이 쳐들어올 거라고."

moon_and_james-86영국
"하하하. 그렇지."

james_special-10영국
"만약 인도가 우리를 돕는다면
나중에 더 큰 자치권을 부여하겠다능."

하지만 국민회의는
여전히 반대했다.

 국민회의
"우리가 원하는 건 
자치가 아니라 독립이라고!" 

moon_and_james-86영국
"그래, 독립은 그때 가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능."

 국민회의
"대신 전쟁 비용은
너희가 책임지라능."

james_special-26영국
"전쟁 비용?" 

moon_and_james-71영국 
"좋아! 그것도 모두 
우리가 떠안겠음."

그렇게 국민회의는
영국의 조건을 수락했고

곧 수많은 인도인들이 
동원되었으니,

일본의 침입에 맞서
버마 전선으로 파병되었는가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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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싸운 연합군 100만 명 중
70%가 인도인이었음."

유럽 전선에도 투입되어
독일과 이탈리아와 맞서기도 했다.


● 영국의 인도 포기 

2차대전 기간 중,
인도는 250만 명의 군인을 파병했고

이 중 10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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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다른 참전국에 비해 
피해가 적었던 편."

하지만 엄청난
참전 비용이 문제였다.

영국이 모든 전쟁 비용을 
지불하기로 했기 때문에
 

인도는 전쟁 중에 썼던
'18억 달러'를 내놓으라고 독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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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영국 정부 예산의 5% 수준"

하지만 영국은 
당장 갚을 수가 없었다.

전쟁으로 영국의 경제는
1/4이 증발해버렸고, 

물자를 구하기 위해
미국에 막대한 빚을 졌기 때문이다.
▲ 폐허가 된 런던

 인도
"얼른 빚 갚어!"

moon_and_james-59영국
"지금 내 코가 석 자라능."

때문에 영국은 인도에 갚아야 할
막대한 빚도 부담됐지만,

식민 통치에 대해서도
깊은 회의감에 빠지게 된다.

"도대체 인도를 지배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게 뭐야?

"예전처럼 맘 놓고 수탈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반란이라도 생기면
군대를 파병해야만 하니, 통치비용만 더 든다능."

"맞아. 애물단지가 됐어."

게다가 인도인들은 
이번만큼은 

기어코 독립을 하겠다고
벼르고 있었으니,

더 이상 인도를 
붙잡고 있을 수도 없었다.

moon_and_james-86영국
"알겠어. 1946년쯤 해서
독립을 시켜주겠음."

 인도
"좋아, 믿겠어!"


● 인도의 분열 (1947)

인도인들은 그렇게 독립에
직면하게 되었지만,

내부적으로 힌두교도와 무슬림의 
입장 차이가 너무도 컸다.
▲ 양측의 협상

힌두교도들은 자신들이 주체가 되어
인도를 건국하려고 했지만,

무슬림들은 그게
몹시도 불만이었다.

 네루 (국민회의 대표)
"종교가 무엇이든, 
어쨌든 인도는 모두 하나에요."

 네루
"독립 인도는 하나의 헌법 아래 묶인 
하나의 나라여야 합니다."

 진나 (무슬림 연맹 대표)
"그러면 먼저 힌두교와 무슬림의 
연립정부 수립을 약속하세요."

 진나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함께 할 수 없음요."

하지만 국민회의는
요구를 수락하지 않았다.

 힌두교도
"아니, 우리가 다수인데
왜 자꾸 무슬림들 눈치를 봐야 하는 거임?"

때문에 인도의 분단은
점점 현실화되고 있었고

이들은 곧 물러날 영국을 향해
각각 이렇게 요구하고 있었다.

 국민회의
"얼른 떠나라!"

 무슬림
"영국은 물러가기 전에
무슬림들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해주고 떠나라!"

그러는 가운데 
힌두교와 무슬림 사이의 

무력 충돌이 
연일 계속되고 있었다.

분쟁의 중심지는
힌두교도와 무슬림의 숫자가 엇비슷했던

동쪽의 벵골 지역과 
서쪽의 펀자브 지역으로,
▲ 양측의 인구이동(화살표)과 충돌(별표)

이곳에서의 무력 충돌로
수만 명이 사망하고

수백만 명의 기록적인
인구 이동이 발생했다.
▲ 고향을 버리고 이주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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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날 벵골과 펀자브는
각각 두 개로 쪼개져 있다능."

▲ 동서로 분열된 펀자브와 벵골 (벵골 동부는 방글라데시가 되었다)



인도의 독립

● 인도의 독립 (1947)

1947년 8월 14일,
파키스탄이 먼저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다음날, 8월 15일
인도가 독립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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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한국이랑 독립일자가 똑같네."

새롭게 시작한 독립 인도는
민주주의와 세속주의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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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주의가 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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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고
정치에서 종교를 분리하는 것."

그리하여 인구 3억 5천 만 명,
유권자 1억 7천만 명을 지닌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가 
탄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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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도 인도에 
존재감이 가려서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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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당시 인구가 9500만명으로
세계 5위의 인구대국이었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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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신생국 인도는 
연방제를 표방했다.

 네루
"인도는 워낙 인종·언어가 다양해서리
지역마다 높은 자치권을 보장하고.."

 네루
"중앙정부는 국방·외교·화폐발행에만
전념하는게 낫겠다능."

또 의원내각제를 
표방했으니,

대통령이 아닌 
'총리'가 실권을 잡게 되었고

초대 총리는 
네루가 맡았다.


● 간디의 사망 (1948)

한편, 인도 국민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던 간디는

독립을 축하하는 기념식에는 
코빼기도 안 비췄고,

오히려 그는 그날,
24시간 단식 투쟁을 하고 있었다.

 간디
"인도가 둘로 쪼개졌는데,
뭐가 좋다고 축하를 한단 말인가!"

그리고 1945년 10월, 
카슈미르 지역을 놓고

인도와 파키스탄 양측이 전쟁을 벌이자
간디는 또다시 단식 투쟁을 했다.

 간디
"모든 종교 집단이 진심으로 화해할 때까지 
단식투쟁을 하겠다능."

때문에 국민회의는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간디의 대중적 영향력은
그만큼 엄청났기 때문이다.

 국민회의
"정부는 무슬림들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할테니,"

 국민회의
"고향을 버리고 파키스탄으로 떠난 
무슬림들은 안심하고 돌아오세요."

간디는 그제야 
단식을 중단했지만

이번에는 비난의 화살을
국민회의로 돌렸다.

 간디
"국민회의는 봉사정신을 잃고 
권력만 탐하고 있고,"

 간디
"백성들이 굶어죽는 판에 
만찬을 열어 흥청망청하고 있다."

 간디
"국민회의가 목표로 했던 
독립을 이루었으니.."

 간디
"이제 국민회의는 
해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가!"

하지만 그것은
지나친 욕심이었다.

 국민회의
"아놔, 저 늙은이가 노망이 났나."

 국민회의
"참는 것도 한도가 있지."

그리고 1948년 1월, 
힌두교 청년이 쏜 총을 맞고

간디는 쓰러져 
숨을 거두게 된다.


● 다양성과 통합의 어려움

인도는 '언어'를 기준으로
전국의 행정을 나눴다.

a_bosss_life-2정부
"사용 인구가 100만 명 이상 되면
하나의 독립된 주로 인정해주겠다능."

그리하여 인도는 행정구역을
30여 개로 나누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언어는 총 1652개나 되었고

그중 1만 명 이상 사용하는 
언어만도 106개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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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어쨌든 언어를 기준으로
행정구역을 나눴기 때문에

인도의 주(州)
유난히 체격 차이가 커서

최고와 최저의 편차가
인구는 330배, 면적은 92배나 된다.

언어(=민족)를 중심으로
행정 구역을 나눈 이유는

그만큼 '다양성'을 
존중해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언어를 중심으로 한 '민족성'이 강화되는 한편

하나의 인도인이라는 소속감은 
외려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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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겅.."

재밌는 것은, 
1650여 개의 언어를 가진 인도에서 

정작 '국어'가 없다는 것이다.
공용어만 있을 뿐이다.

국민의 80%가 
힌디어를 이해할 수 있지만,

이를 국어로 한다면 
불만을 터뜨릴게 뻔했다.
▲ 힌디어 문자

특히 남부 지역에서
반발이 커서

이들은 힌디어 간판을 부수며
공공연히 독립을 요구하고 있었다.

cony_special-28타밀족
"북부 언어를 
왜 우리한테도 강요하는 거야?"

결국 인도 정부는 
고민 끝에 국어를 포기하는 대신 

공용어를 선택했으니
그 공용어만 20개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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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그중에서도 '영어'가
공용어로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지역마다 다른 언어는
인도 통합의 주된 걸림돌이 되고,

분리 독립의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 (위에서 순서대로) 아삼, 타밀, 카슈미르의 독립 시위

그런데 식민지 시대 영국인들은
오히려 다양한 언어를 적극 활용해

인도인의 분열을 
부추기려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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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슈미르 사태 (1947~48)

통합에 반대하던 
토후국의 처리도 문제였다.

독립할 당시 인도에는
영국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지 않고

자치권을 행사하던 토후국이 
무려 562개나 되었기 때문에

인도는 토후국들을 통합하는데만 
골치를 깨나 썩어야 했다.

a_bosss_life-21정부 
"아놔, 니들이 바티칸이야?
산마리노야?"

a_bosss_life-21정부
"대세를 받아들이고
얼른 연방의 일원으로 들어오라능."

이 가운데 하이데라바드, 주나가드는
주민 대다수가 힌두교도였으나

군주가 무슬림이란 이유로 
끝까지 통합을 거부하는 지역이라서

인도는 이 두나라를 
강제로 연방에 편입시켰다.

하지만 카슈미르는
상황이 정반대였다.

이 지역은 지역 주민의 
3/4가 무슬림이었기에

파키스탄이 애초에
자국의 영토로 간주하던 곳이다.

 무슬림
"PAKISTAN에서 
K자가 카슈미르에서 따온거라능."

그런데 카슈미르의 군주는 
힌두교도였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영토를
인도에 통합하려고 했고,

이에 카슈미르의 주민들이 
대대적으로 반발하고 나섰다.

"왜 우리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인도에 통합하려고 하는 거임?"

"독단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다.
주민 투표를 실시하라!"

급기야 파키스탄 정부가
군사적으로 개입하려고 하자,

카슈미르의 군주는
인도 정부의 지원을 요청했고

 하리 싱 (카슈미르 군주)
"헐! 도와주삼!"

결국 1947년 12월
전쟁이 발발하여,
▲ 1차 카슈미르 전쟁, 인도군 포병 (1948년)

그 결과 카슈미르의 영토는
40%는 파키스탄이, 60%는 인도가 

가져가는 것으로
잠정적인 휴전을 맺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 점령 카슈미르 지역에서는
주민들의 불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주민 투표를 실시하라!"

그러나 투표를 하면
영토 상실은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에

인도 정부는 주민 투표를 
계속 미루고 있고,

급진주의자들의 
분리 독립운동이 이어지면서
 
▲ 카슈미르의 독립 시위

카슈미르는 일촉즉발의 
화약고가 되었다.
▲ 카슈미르의 국경선



네루와 인디라 간디

● 네루주의 (1947~64)

초대 총리 네루는 
'민주주의'의 신봉자였다.

인도에 만연된 
불평등과 사회적 모순을

민주주의를 통해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때문에 보통선거 제도를 
독립 이후 곧바로 도입했다.

 네루
"브라만도 1표, 불가촉천민도 1표
남자도 1표, 여자도 1표"

 네루
"부자도 1표, 가난한 사람도 1표
힌두인도 1표, 무슬림도 1표.."

 네루
"모두가 민주주의 앞에서는
평등하다능!"

 

실제로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민주주의 제도를 확립한 데 있었다.

그리고 그의
대중적 인기를 발판으로

그가 이끄는 국민회의는
총 의석의 3/4 이상을 차지했고,

덕분에 그는 17년 동안
총리직에 앉아있을 수 있었다.

한편 네루는 '사회주의'의 
신봉자이기도 했다.

다만 그는 소련식 공산주의보다는
온건한 사회주의 경제를 표방했다.

 네루
"인도는 카스트 전통이 깊어서
소련식 계급혁명은 현실적으로 불가."

 네루
"공산주의 보다는
사회주의를 통해 농촌을 개혁하겠다능."


● 토지개혁과 공업화의 실패

당시 인도는 농업이 
인구의 70%, GDP의 50%를 차지할 정도로

농업 중심의 경제였기 때문에
경제 개혁의 핵심은 단연 '토지개혁'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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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신생국들마다
가장 먼저 실시하는 게 토지개혁이긴 했지만.."

 네루
"지주가 소유할 수 있는
토지의 상한선을 정해서.."

 네루
"그걸 초과하게 되면
유상으로 몰수하겠다능"


그런데 그토록
중요한 토지개혁을 

중앙정부가 아닌,
주 정부가 주도했던 게 화근이었다.

지주들은 토지의 상한선을 
높게 책정하라고 주 정부를 압박했고,

"뭐? 5헥타르가 상한이라고?"

"다른 주는 10헥타르인데 
우리 주는 왜 이래?"

지주들의 거센 반대 속에 
결국 토지개혁은 실패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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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신생국들 중
토지개혁에 성공한 나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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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대만 등 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 나라에서는 실패했다능."

때문에 인도의 경제 개혁은
시작부터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다.

다만 화학비료의 사용과
종자개량 등으로 

농업 생산성이
크게 늘어나게 되지만,

그렇더라도 그만큼 
인구가 늘어났기 때문에

인도인들의 생활이 
나이진 것은 거의 없었다.

무엇보다 공업의 성장이
제대로 되지 못한 탓이 컸다.

인도는 값싼 노동력, 풍부한 자원,
넓은 시장 등을 가진 매력적인 투자처이지만

식민지 시절 인도 출신 자본가들의
비중이 적었기 때문에

건국 후에도 인도는, 산업을 일으킬만한 
자본가들이 당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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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국가가 주도적으로
공업을 일으켜보려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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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신생국들의 경우 대부분
스탈린식 계획경제를 따라했었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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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도 60년대
박정희 정권이 그러했고.."

공업을 일으켜줄 만한
전문적인 인력이 부족했고

공업 투자라는 것도, 
공기업 위주에

중공업에만 자원이 
편중되었기 때문에

자발적이고 효율적으로
성장하기가 어려웠다.


● 네루의 외교정책 : 비동맹주의

네루는 정치에 있어서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경제에 있어서는
사회주의를 표방했지만

외교 정책에서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냉전시대가 본격화 된 50~60년대,
미국과 소련은, 신생국들에 

경제적·군사적으로 도움을 주며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워 나가려 했고

많은 나라들이 
여기에 의지하게 되지만

인도는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은 
제3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네루
"미국 아니면 소련을
선택하라고?"

 네루
"그동안 우리는 영국의 식민 지배만 
200년 넘게 받아왔는데.."

 네루
"강대국에 의존하라는 말은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그렇게 해서 '비동맹주의'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한국전쟁에서도 
잘 드러났다.

당시 인도는 중립국의 대표 자격으로
남북한 포로교환을 감시했었고,

포로들이 남북한이 아닌, 제3국을 택하게 되면
일단 도착했던 곳이 '인도'였다.
▲ 한국전쟁 당시 인도 감시단

이후 비동맹주의는 
이집트와 유고슬라비아 등의 지지를 받아

아시아와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외교정책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 나세르(좌)와 티토(우)와 함께 선 네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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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세계끼리 단합해서 
우리의 힘을 보여주자!"

하지만 비동맹주의는
현실에서는 잘 지켜지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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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파키스탄'이라는
존재 때문이었다.

사실 인도는 그런 이유로
'영국 연방'에서 탈퇴하지도 않았다.

"왜 독립을 했으면서
영국 연방을 탈퇴하지 않는겅미?"

 네루
"영연방을 탈퇴하게 되면
당장 손해 보는 게 많아진다능."

"힘겹게 독립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임?"

 네루
"모르는 소리. 지금 파키스탄도
영연방에 남아있으려 하잖아."

 네루
"이럴 때 우리가 탈퇴하게 되면
영국은 파키스탄을 지지하게 될 것임."

 네루
"그러면 카슈미르의 운명은 
어찌 될 것 같음?"

"아!"

인도를 괴롭힌 장애물은 또 있었으니,
바로 중국이었다.

1951년 중국이 
티벳을 강제 병합하자

인도와 난데없이
종주국 분쟁이 일어났다.

 인도
"티벳은 전통적으로
우리와 가깝던 나라인데.."

 중국
"무슨 소리야?
청나라 때부터 우리 영토였는데."

 인도
"뭐, 싸우자는 얘기는 아니고.."

그리하여 1954년, 
인도는 중국과 평화조약을 맺게 된다.

하지만 티벳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의 망명을 받아들인 후,  
▲ 인도로 망명을 온 달라이 라마 (1959년)

두 나라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됐고

급기야 1962년에는 중국과 
국경선에서 무력 충돌까지 하게 된다.

 
 
▲ 현재 중국과 인도의 국경선

이때 얄미운 건 
파키스탄이었다.

파키스탄
"적의 적은, 곧 나의 친구!"

중국이 인도와 
사이가 나빠진 틈을 타,

파키스탄은 중국에
적극 구애한 것이다.
 

파키스탄
"친하게 지내자능. 따거~"

뿐만 아니다.
파키스탄은 미국에게도 꼬리를 쳤고

중국은 그런 미국과 
가깝게 지내려 하고 있으니,

자연스레 인도는
소련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moon_and_james-32인도
"헤헤."


● 독재자, 인디라 간디 (1964~77, 1980~84)

네루는 간디의 수제자로
역전의 독립투사였고

인도의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고
비동맹 외교로 업적을 남겼지만,

그의 업적은 
딱 그것뿐이었다.

야심 차게 추진한 
경제개발계획은 실패를 맛봤고,

배고픈 5억 인구의 인도인들을
전혀 구제하지 못 해

인도는 외국의 원조에
의존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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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혁명가 출신이 권좌에 오를 경우
경제가 잘 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능."

그런 네루가 
1964년 사망을 하자,

곧 인도의 총리직은 
네루의 딸인 인디라 간디가 차지한다.

 야당
"뭐야? 인도는 민주공화국 아니었어?
왜 딸이 세습을 하는 거임?"

 국민회의 (여당)
"뭐, 그만큼 인도 국민들이 
네루를 존경한다는 거 아니겠음?"

그렇게 아버지의 후광으로
권좌를 차지한 인디라 간디였지만,

그녀는 아버지가 이룩한 
민주주의를 파괴시킨 주범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1971년 부정선거로
총리직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계엄령을 선포하고 
독재정치를 시작했으니,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치적 경쟁자를 정치범으로
몰아세워 구속했던 것이다.

sally_and_friends-18
"어?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또 1980년 다시 총리직에 오르자
지역 정당들을 억압하며

국민회의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했었다.

 인디라 간디
"인도를 분열시키려고 선동을 꾀하는
지역 정당들은 가만둘 수가 없음!"

하지만 지역 정당의 탄압은
펀자브, 카슈미르, 아삼 등의

분리주의 운동만 
키우는 꼴이 되고 말았으니,

"차라리 독립하겠다!"

특히 펀자브 지역의
시크교도들의 반발이 컸는데,

이들은 '독립'을 외치며
시크교의 상징인 황금사원 앞에서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왜 연방 헌법은
우리를 힌두교도로 규정한 것인가?"

"차라리 연방 정부를 탈퇴하고
독립국가를 만들자!"

그러자 인디라 간디는
군대를 동원해서

무력으로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인디라 간디
"국론을 분열시키는
저 음모의 성을 없애버리던지 해야지.."


탱크와 박격포를 앞세운
군인들에 의해서

400여 명의 시크교도들이
현장에서 사살되고 만다.

하지만 그것이 
화근이었다.

무력 진압의 대가로
1984년 10월 그녀는

자신의 경호원 3명에게
피살되고 만 것이다.

leonard_special-8
"읭? 경호원이 총을 쏴?"

moon_special-28
"사실 그 경호원들이
시크교도들이었음."

그러나 사건의 여파는 
실로 컸다.

인디라 간디 사망에 
화가 난 힌두교도들은 

시크교도를 찾아 
닥치는대로 죽였던 것이다.
▲ 집단 린치를 당하고 있는 시크교 남자

수도 뉴델리에서만 
2천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이때 시크교도를 살해한 죄로
재판에 회부된 이는 아무도 없었다.
▲ 힌두교도들의 시크교도 학살


● 녹색 혁명 

식량 부족은 인도 경제발전의
고질적인 걸림돌이었다.

moon_special-28
"식량이 부족하니,
농산물을 수입해야만 하는데,"

moon_special-28
"그럴 돈이 부족하니 
자원을 헐값에 팔아넘길 수밖에 없었다능."

이런 상황에서 1965년, 
파키스탄과의 전쟁이 일어났고

가뭄까지 심각해지자
나라 꼴이 완전 말이 아니었다.

인디라 간디는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다.

방법은 '농업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것이었다.

 인디라 간디
"앞으로 인도의 황무지를
푸른 들판으로 만들어,"

 인디라 간디
"굶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녹색혁명'을 추진하겠슴돠!"

이를 위해 1년에 같은 작물을 
두 번씩 수확하는

'이기작' 방법을 
농촌마다 널리 보급시켰고,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댐을 곳곳에 건설하는가 하면,

비료 공장도 
대대적으로 증설했다.

그 결과, 그녀의 집권 시기
곡물 생산량은 두 배 가까이 증가한다.

 

독립 당시와 비교하면
단위 면적당 생산량은 30%가 증가했고

주식인 밀의 경우 
70%나 증가했다.

때문에 경제적인 업적에서, 인디라 간디는 
아버지 네루보다는 괜찮았다.

하지만 인도가 
농업 증산으로 흥분했을 당시

세계 경제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었는가?

sally_and_friends-18

선진국들은 중화학공업 단계를 넘어
'첨단 산업'으로 발전하고 있었고

동아시아 국가들은 공업국으로 탈바꿈하여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가가치가 낮은
1차산업의 증산으로

인도의 입지가 달라지면,
과연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토끼 걸음으로 뛰어가는 
세계와 비교할 때

인도의 변화는 
거북이 걸음질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녹색혁명의 혜택은
땅을 가진 지주들의 몫이었고

대부분의 인도인들은 
겨우 끼니 걱정에서 해방된 수준이었으니,

그들의 삶은 
동시대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세상에서 가장 
궁핍하다고 할 수 있었다.

moon_special-19


● 방글라데시의 독립 (1971)

1947년 이후 파키스탄은 
인도를 사이에 두고

동파키스탄과 서파키스탄으로 
나뉘어 있었다.

종교는 같지만 두 지역은
거리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고, 

moon_special-28
"동서로 1400km나 떨어져 있었음.
서울~부산 거리의 7배!"

인종·문화·언어·경제 등에서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그렇다고, 양쪽을 한데 
결합시킬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가 
나타나지도 않았다. 

"왜 같은 나라가 됐지?"

"글쎄.."

그런데 서파키스탄(6500만)
당시만 해도

동파키스탄(7500만)보다 
인구가 더 적었음에도,

정부와 군대 요직을 두루 독점하고 
경제를 지배했으며

심지어 동파키스탄을 
마치 자신들의 식민지처럼 여겼다.
▲ 서파키스탄 병사에게 몸수색을 당하는 벵골인

때문에 동파키스탄 주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는데,

 동파키스탄
"중앙정부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우리의 자치권을 대폭 강화해라!" 

 서파키스탄
"무엇이? 지금 국론을 
분열시키는 거임?"

서파키스탄은 이들의 요구를 
무력으로 짓밟고자 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이때 파키스탄인들은

오늘날 방글라데시의 벵골인들을
무려 100만 명이나 학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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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아!"

moon_special-28
"방글라데시 당국은 300만 명이 
학살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음." ☞ 참고

leonard_special-40
"헐! 2차대전 당시
유태인 학살 못지않았네.."

당시 파키스탄 군인들은
힌두교도들을 사살하는 것은 물론,

벵골의 지식인들이
독립을 선동하고 있다고 해서

교수, 언론인, 의사, 예술가, 
엔지니어, 작가 등을 닥치는대로 붙잡아
 

이유를 불문하고
무차별적으로 학살을 했다. ☞ 참고
 

여기에 수많은 여성들이
군인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했으니,

그 피해 여성만
40만 명으로 보고되고 있고 ☞ 참고

이들 여성들로부터 원치 않게 출산한 
수천 명의 아이들은

평생을 차별과 모멸에 
시달려야만 했다.

"악마의 피를 물려받은
저주스러운 놈들!

또 학살과 만행을 피해, 인도로 탈출한 
벵골인들의 수가 600만 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당시 인도는, 파키스탄의 내분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인도
"하하하. 파키스탄 넘들 
알아서 국운이 쇠락하는구나."

그리고 이참에 파키스탄을 
영구히 분열시키고자 했다.

때문에 인도는 파키스탄 정부의 만행을 
대외적으로 알리면서,

moon_and_james-34인도 
"지금 파키스탄에서
엄청난 인종학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벵골 피난민을 구호한다는 명목으로 
정규군을 파견했다.
▲ 방글라데시로 향하는 인도군의 탱크

그러자 파키스탄 군 수뇌부는
인도에 본때를 보여주겠노라고

기습 공습을 감행했지만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는 못 했고,
▲ 인도 영토를 공격하고 있는 파키스탄 전투기

결국 동파키스탄을
인도군에 내어주고 말았다.

moon_and_james-24파키스탄
"아놔.."

그렇게 동파키스탄,
즉 방글라데시는 독립을 맞게 된다.



오늘날 인도의 모습

● 힌두교 민족주의의 득세

인도는 건국 이래
세속주의 원칙을 버리지 않았고,

 네루
"종교와 정치는 무관하다!"

그것이 바로
국민회의가 40년 가까이 

장기집권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했다.

하지만 1984년, 
인디라 간디 총리가

시크교도에게 암살되면서
이 원칙은 크게 흔들렸고,

이후로 '힌두교 민족주의'가 
크게 득세하게 된다.

"인도의 정치는 
오직 힌두교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다가 1992년,
대형사고가 하나 터진다. (아요디야 사태)

한 힌두교의 성지에 있었던
이슬람 사원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왜 이런 곳까지 
이슬람 사원이 있는 것임?"

"예전에 무슬림들이 침략해서 
여기다 이런 걸 만들어서 그럼."

"그래? 그러면 부숴버려야지."

그래서 힌두교도들은
이슬람 사원을 부숴버렸다.
 


"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힌두교도들을 저지하려던 

무슬림 230여 명이 
무참히 학살됐다.

하지만 폭력은 
폭력을 낳기 마련,

moon_and_james-24무슬림
"이놈들 두고 봐라."

무슬림들은 
폭탄 테러로 보복했으니,

"쾅!"

뭄바이 시내에서 폭탄이 터져
300명이 죽고 1000명이 다쳤다.

그러자 화가 난 
힌두교도들은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무슬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다 죽여!"

그렇게 복수는 
복수를 낳았으니,

이어 누군가가 
힌두인들이 탄 기차를 공격해

여성, 어린이를 포함한 
60여 명을 불에 태워 죽였고

이를 무슬름의 소행이라 여긴
힌두교도들은

5천 명이 넘는 무슬림들을 
집단 학살했다.

moon_special-30
"헐!"

그런 피의 복수는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고,

오늘날 인도의 '힌두교 민족주의'는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인도는 오직 
힌두인의 나라여야 한다!"


● 네루 왕조는 계속된다

인도 현대사에, 네루만큼 
강한 영향력을 미친 인물도 없었다.

초대 총리를 지낸 그는
이후 17년 동안 총리직을 계속했고,

그가 죽은 후의 
인도의 총리직도

곧 네루의 딸인 
인디라 간디가 차지하게 된다.

그녀 또한 17년간
장기 집권을 했다.
(77년 선거에서 야당에 패해 권좌를 잠시 넘겨주긴 했다)

만약 그녀가 도중에
암살되지 않았다면

30년, 40년을 
더 해 먹었을런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녀의 사후,
그녀의 아들인 라지브 간디가 

인도의 새 총리로
취임했기 때문이다.

moon_special-24
"헐!"

그런데 라지브 간디마저
암살된 후에는

그의 부인인 소냐 간디가 
여당 대표를 맡았다.

다만 그녀는 
이탈리아인이기에

여론을 의식해 
총리직을 양보했지만 말이다.
▲ 소냐 간디

고로 네루 사후,
인도의 권력은

그의 딸, 손자, 손자며느리로
계속 이어졌으니

가히 현대 인도의 역사는
'네루 왕조'로 불릴만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최근에는 라지브 간디의 아들,
라훌 간디가 

국민회의의 
사무총장을 맡으면서

차기의 유력한
총리 후보로 부각됐기 때문이다.

민주 국가에서 어떻게 
세습 왕조가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그만큼 인도인들의 정치의식이
미숙하다는 방증일는지도 모른다.


● 계획 경제 체제를 수정하다

독립 이후 인도는 
40년 가까이

폐쇄적인 계획 경제 체제를 
고집했었다.


영국 식민지에 대한 반감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 워낙 컸고,

"쳇! 자본주의는 영국에서 시작된
제국주의의 수탈 논리라능!"

인도 자체가 
엄청난 소비시장과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해외 판로를 개척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까닭이다.

 네루
"그냥 우리 식대로 살겠음!"

하지만 그 결과는? 
한마디로 처참했다.

경제대국의 위용을
과시하려던 인도였지만,

'10억 명의 거대한 빈곤 국가'
라는 오명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 물을 긷고 있는 인도인들

사회주의 경제의 모순은
인도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었으니,

정부의 지나친 통제로 
자원은 쓸데없이 낭비되기 일쑤였고

우물 안 개구리로 
갇혀 지내다 보니

개발 의지와 경쟁의 욕구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아

성장 속도가 
거북이 걸음질을 했던 것이다.

"아놔, 뭐가 문제지?"

그러다가 공산국가들이 
우르르 몰락하는, 

90년대 초에야
인도는 정신을 번쩍 차리게 된다.

moon_and_james-13
"뜨아! 계획경제 
이거 문제가 많았네."

"이제부터라도 시장경제로 체질을 바꾸고
개방경제로 나가야 겠다능."

그리하여 1991년,
'신경제정책'이 추진되게 된다.

a_bosss_life-2정부 
"앞으로 깐깐하게 따지지 않을 테니
사업하고 싶거든 마음껏 창업을 하라능!"

a_bosss_life-2정부
"공기업들도 이참에 
대거 민영기업으로 바꾸고.."

a_bosss_life-2정부
"금융시장도 완전히 문을 열었으니,
외국인들은 안심하고 투자 하라능."

그 결과 인도 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되고

moon_special-27
"90년대에만 연평균 
6~7%씩 성장했음."

외국인 투자는 매년 50% 성장이라는
엄청난 속도로 증가하게 된다.

"진작에 이렇게 할걸."

당시 인도 정부가 육성사업으로 
키우려 했던 것은, IT 산업이었다.

a_bosss_life-8정부
"우리가 돈이 있어?
제조업이 탄탄해?"

a_bosss_life-8정부
"그러니 제조업은 그냥 건너뛰고
곧바로 3차산업부터 육성하겠다능."

그리하여 인도는 
공과대학만 2천 개를 세우면서

매년 40만 명의 IT 전문인력을 
배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때마침 90년대 말부터
미국에서 IT 특수가 일어났으니,

덕분에 인도의 IT산업은
비약적으로 성장하여

인도는 졸지에 세계 소프트웨어 산업의 
중심지가 된다.

moon_special-27
"MSN 메신저의 개발자가
바로 인도인이라능."


● 차별 제도를 없애다

세포이 항쟁 이후
영국은 의도적으로 

서구의 근대화 이식을 
포기했던 탓에,

인도는 사회·문화 전반적으로
봉건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다.

신분차별과 여성차별은
더욱 그러하다.

물론 인도는 건국 이래
카스트제도를 불법으로 하고,

공공시설 이용에 있어
차별받지 않도록 법으로 정했지만

악습은 쉽사리 
바뀌지 않아서,
 

인구의 7할을 차지하는 
시골에 가면 

여전히 '하리잔'으로 불리는 
불가촉천민들이 

납득할 수없을 정도로 
불합리한 차별을 받고 있다.

가령 이들은 새 옷을 입어도, 
새 신을 신어도

자전거를 타도, 
우산을 써도,

마을 공용 우물에서 물을 마셔도
고개를 든 채 길을 걸어도 

욕을 듣고 
매를 맞기 일쑤다.

과거의 얘기가 아니다.
21세기, 오늘의 모습이다.

불평등은 하리잔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니,

오늘날 인도 여성들의 인권은
여전히 봉건시대에 머물러 있다.

특히 시골의 경우 
여성차별은 더욱 심각해서,

여성들은 상당한 액수의 
'결혼 지참금'을 들고 와야만 하고

여성에게는 재산의 
상속권이 전혀 없고

남편이 죽으면
과부에게는 재혼이 금지되고

심지어 남편을 따라 죽는 '사티'가 
여전히 행해지고 있을 정도다.
▲ 암암리에 자행된 사티

여성에게는 교육의 기회도
잘 주어지지 않아서

여전히 여성들의 절반 정도는
글을 전혀 모르는 까막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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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왠지 조선시대를 보는 것 같네."


이러한 사회적 차별이
인도의 발전에 장애가 되는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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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호날두, 메시로 태어나면 뭐해.
하수구 청소하러 다녀야 하는데.."


때문에 인도 정부는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

입학이나 취업 시 
일정 비율을 

하리잔에 배정해주는
혜택을 주고 있어서

최근에는 불가촉천민 출신의
엔지니어, 의사, 장관 등이 늘어나고는 있다.

하지만 이런 부분에
반발도 적지 않았다.

"아놔, 하리잔은 인도 인구의 17%인데
왜 쿼터는 28%씩이나 주는 거임?"

"이건 오히려 역차별이라고!"


● 빈부격차는 높은데, 통계수치는 양호하다?

흔히 카스트제도가 만연한
인도를 생각할 때

빈부격차가 엄청날 것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지니계수를 보면
의외의 수치에 놀란다.

인도의 빈부격차는 
미국은 물론, 

영국보다도 
더 양호하다고 나온다.
▲ '카스트 제도의 나라' 인도의 빈부격차는 일본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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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읭?"

인도만 그런 것이 아니라
파키스탄·방글라데시 모두가 그렇다.
▲ 동아시아 국가들의 지니계수

leonard_special-8
"어? 인도는 토지개혁에 실패해서
지주가 땅을 독차지하지 않았나?"

하지만 인도는 
90년대 초까지

사회주의 체제로
경제를 움직였던 나라다.

그러다 보니
이병철이나 정주영과 같은

거대 자본가 육성이
제대로 될 수 없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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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부의 쏠림이 덜했고.."

90년대 들어서야
시장경제와 개방화를 추진하다 보니

아직 경제발전단계에서
산업화 초기 단계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 경제발전 초기에는 지니계수가 낮게 나온다

비유를 하자면, 현재 인도는 
우리나라의 70년대 초반 수준이다.



때문에 소득불균형이
아직 표면화되지 않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인도의 빈부격차가
낮은 수준인 것이지,

앞으로의 추이를 보면
중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 중국의 지니계수 : 80년대 초까지만해도 우리나라보다 빈부격차가 덜했다

빈부격차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될 가능성이 높다.

▲ 인도의 지니계수는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사실 그런 조짐은
이미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특히 도농격차가
심각한 수준이어서,

농촌에서는 아직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가정이 60%,

집 안에 화장실이 없는 가정이 
76%에 이를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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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화장실이 없으면 어디다 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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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겠어?"

도시 내부에서도
빈부 격차는 상당해서

뭄바이 아파트의 임대료는
세계에서 6번째로 높지만,

그런 뭄바에에서 
매년 4천 명 가까운 사람들이 

통근 열차를 공짜로 타다가 
떨어져 숨지고 있다. ☞ 참고

다만 인도는 경제발전단계에서
초기 단계에 있다.

채워야 할 게
여기저기 산재해 있기 때문에

경제가 한창
쑥쑥 자라날 시기이고,

아직 본격적인 성장 궤도에도
도달하지 않은 상태다.

그런데도 이미 
인도의 경제규모는 세계 7위,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중국, 미국에 이어 세계 3위다.


moon_special-37
"헐!"

우리가 인도를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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