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굴제국의 성립
● 티무르 제국과 바부르
13세기 초, 칭기즈칸이
천하를 제패하고
그의 후손들은
땅을 ↓이렇게 나눠가졌는데,
이때 중국과 이란처럼
발달된 농업국가를 차지한 이들은
행정체제를 통하여
세금을 거두는 형식으로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지만,
▲ 세금을 걷는 페르시아 공무원
황무지와 초원을 차지한
몽골인들은
그런 행정체제가
당최 미약했으니,
때가 되면 쳐들어가서
공물을 뜯어가는
약탈 방식으로
살아가야만 했다.
▲ 러시아인들에게 공물을 받고 있는 몽골 관리(다루가치)
"세금을 뜯어가는 것이나
삥을 뜯어가는 것이나 비슷하지 않음?"
"아니지. 세금은 언제 얼마큼
납부하면 되겠다는 예상이 가능했지만,"
"약탈이라는 건 기분 내키는 대로 쳐들어가서
마음대로 퍼갔으니.."
"똑같은 금액을 털어가더라도
사람들은 더 짜증을 느끼게 될 거라능."
그리하여 똑같이
몽골의 지배를 받는 처지었지만,
초원의 피정복민들의 반감은
더 극심할 수밖에 없었고,
▲ 러시아인들에게 공물을 받고 있는 몽골 관리
결국 1세기 만에 중앙아시아에서는
튀르크족들에 의해 반란이 일어나
중앙아시아를 관리하던
몽골족들이 망하고,
그 자리를 반란을 주동한
'티무르'가 차지하게 되었다. ☞ 참고
▲ 현재 우즈베키스탄에서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티무르
티무르
"이제부터 이 땅은 우리가 접수."
그리고 티무르는 내친김에
페르시아까지 접수하게 되어
1400년 경, 500만㎢라는
광활한 영토를 획득하게 된다.
(캐나다 영토의 절반 사이즈)
티무르
"하하하"
하지만 티무르가 세운 제국은
중앙집권체제가 미약하여
그의 사후,
제국이 분열되기 시작하게 되어
1500년 경, 지방 호족들이 대거 군웅할거하는
'서바이벌 현장'으로 바뀌고 말았다.
이때 우즈벡 지역의 한 도시에서,
영주의 아들로 태어난 청년 바부르는
아버지가 전쟁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 바부르의 아버지
그만 땅을 모두 잃고
집도 절도 없는 처지가 되어
허허벌판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바부르
"아놔.."
하지만 바부르는 패잔병들을 추슬러
산 넘어 아랫동네,
'카불'로 쳐들어가
도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
실크로드 길목에 위치한 카불은
나름 부유한 도시였다.
▲ 카불을 차지한 바부르의 병사들
바부르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지대로 화풀이했다능."
그렇게 카불을 점령한 바부르는
전열을 가다듬고
복수를 하겠노라고
여러 번 우즈벡 땅을 쳐봤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고,
▲ 바부르가 차지하려 했던, 우즈벡의 사마르칸트
바부르
"에겅.."
대신 화풀이 상대로
남쪽 나라, 인도를 택하게 된다.
바부르
"에잇! 열받는데,
오늘 저녁은 카레다!"
● 무굴제국의 건설
하지만 생각해보니
인도 공략은 쉽지가 않았다.
바부르
"듣자 하니, 인도에는
엄청난 코끼리 부대가 있다며?"
"방법이 있습니다."
바부르
"그게 뭔데?"
"페르시아에서 화약 무기들을
사들여오는 겁니다."
"코끼리는 원래 소리에 민감해서
화포 소리에 놀라 달아나게 될 겁니다."
바부르
"오, 그래?"
그리하여 바부르는
화포와 화승총을 대거 사들였고
그걸 가지고
인도 침략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인더스 지방'을 쳐들어 가서
테스트를 해봤다.
"탕탕탕!"
바부르
"하하하. 정말 효과가 있구먼."
그렇게 자신감을 얻은
1만여 명의 바부르의 병사들은
델리 술탄국의 수도인
델리 인근까지 쳐들어 가는데,
이때 인도군은 황급히 4만 명을 소집해
이들과 맞섰다. ☞ 참고
술탄
"뭐? 돌궐족들이
겁도 없이 쳐들어왔다고?"
술탄
"본때를 보여주마!
예비군에 민방위까지 싹 다 소집해!"
고로 인도군은
병력 면에서 3~4배나 많았고
이 중에 전투코끼리만
1천 마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바부르는 두렵지 않았다.
이미 약점을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헐! 코끼리 부대가 쳐들어온다!"
바부르
"야 임마! 쫄지말랬잖아!"
바부르
"정신줄 놓지 말고
화약 빵빵 터트리라능."
"쾅쾅쾅!"
여기저기서
대포와 화승총이 발사되었다.
그러자 놀란 코끼리는
방향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인도 병사들을 짓밟으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뜨아!"
그리고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서
바부르의 기병대가 측면을 공격하게 되는데,
이들은 유목민 출신답게
특유의 기마 궁술을 뽐냈다.
"뜨아!"
결국 전쟁은, 바부르 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바부르
"하하하"
"폐하, 이젠 전리품을 챙기고
카불로 돌아가시죠."
바부르
"아놔, 지금 제정신이야?
삥이나 뜯으려고 이 고생을 한 줄 알아?"
"..."
바부르
"여기까지 왔는데,
인도 땅을 모두 차지할 생각은 않고.."
그렇게 병사들을 독려한 바부르는
곧 북인도 전체를 쓸어 담았다.
"쾅쾅쾅!"
이로써 300여 년에 걸친
델리 술탄왕조가 막을 내리고
'무굴'이라는
새 왕조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튀르크어로 '무굴'은
'몽골'을 뜻하는 말이었다.
"웬 몽골?"
사실 바부르는 튀르크인이었지만,
자신이 티무르 왕족의 혈통인 점을 내세워
칭기즈칸의 후손이라
평소 사칭을 하고 다녔던 터였다.
바부르
"왜 무굴이냐고?"
바부르
"짜샤, 내가 칭기즈칸의 후예니깐!"
"사실 그런 사칭은
티무르 때부터 시작됐으니,"
"족보가 부실한 티무르 왕족들은
칭기즈칸의 혈통이 부러워.."
"칭기즈칸 왕족의
몽골 여인들과 혼인을 하곤 했었음."
● 악바르, 북인도 전역을 획득하다
바부르는 갠지스 평원을
몽땅 접수하면서
델리 술탄국의 영역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바부르는
4년 만에 병으로 죽고,
그의 어린 아들(후마윤)이
보위를 물려받게 된다.
▲ 후마윤
당시 바부르가 아들에게 남긴
유언은 이러했다.
바부르
"아들아, 절대로 다른 종교를 차별하지 말라능."
(참고로 튀르크족은 이슬람교를 믿었다)
바부르
"토착민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소도 죽이지 말고, 사원도 파괴하지 말라능."
하지만 후마윤이 집권하자
곧 내란이 일어나
무굴제국은 삽시간에 망해버렸고,
후마윤은 페르시아로 도망을 쳤다.
▲ 페르시아에서의 환대 : 페르시아 황제(좌측)와 후마윤(우측)
후마윤
"에겅.."
그리고 10년 만에
페르시아의 도움으로
다시 제국을 되찾았으나,
이게 웬걸!
그만 도서관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사망하고 만다.
나라를 되찾은 지
6개월 만의 일이었다.
"세상에, 지지리 복도 없지."
그리고 보위를 물려받은 이가
13살의 어린 꼬마, 악바르(재위 1556~1605)였다.
"훗날 무굴 제국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는 왕이라능."
하지만 악바르가 집권했을 때만 해도
무굴제국은 보잘 것 없었다.
악바르
"아놔, 시골 면장도 아니고.."
▲ 코끼리를 타고 놀던, 악바르의 어린 시절
때문에 청년이 될 즈음,
악바르는
할아버지 바부르 때의 영역을
모두 되찾는 걸, 숙명적 과제로 받아들였으니,
실제로 잃어버린 영토를
하나둘씩 되찾았고
악바르
"여기 옛날에 우리 땅이었어."
악바르
"그러니 되돌려받아야 겠다능."
그러면서 영역을
더욱 늘려나갔다.
이때 가장 눈독을 들였던 곳은
구자라트와 벵골 지역이었다.
"구자라트는 염료의 원료인
'인디고'의 주산지였고,"
"벵골은 쌀과 직물 생산으로
유명한 동네였음."
하지만 이 두 곳을 점령하기란
결코 쉽지가 않았으니,
특히 구자라트를 치려면
사납기로 유명한 '라자스탄'부터 함락해야 했는데,
▲ 라자스탄 지방
"이곳에는 8세기부터 이란-인도 혼혈인
라지푸트 족이 살고 있던 곳이었음."
▲ 라지푸트족
이곳은 800여 년 동안
수많은 세력들이 정복을 꾀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독립을 유지하면서 살았을 정도로
함락 자체가
쉽지 않은 곳이었다.
▲ 라자스탄
그도 그럴 것이
라지푸트 족은 뛰어난 건축술로
수십m 높이의 요새로
철옹성 같은 방어를 하고 있는 터였다.
▲ 라자스탄의 요새 : 길이 38km, 현존하는 성벽 중 만리장성 다음으로 길다
악바르
"아놔, 이쪽 동네는 힘드네.."
하지만 악바르는
대포와 화승총을 앞세워
라자스탄을 점령하는 데
결국 성공하게 되었고,
그 여세를 몰아
인도 중남부까지 진군할 수 있었다.
● 무굴 병사의 무기
인도에는 중세시대 이후
'다마스쿠스강' 제련술이 들어와서
엄청난 강도를 지닌 강철을
실전에 사용할 수 있게 된다.
▲ 다마스쿠스강의 외관
"어느 정도인데?"
"한 번 베이면, 살점은 물론
뼈를 박살내서 골수가 손상될 정도였음."
때문에 당시 인도 회화를 보면
칼이 머리를 관통하는 식의
상상하기 힘든 모습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다마스쿠스강' 이라는 게
대체 무엇이길래 그런가?
이름에서도 짐작이 가겠지만,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지역의 제련 방식이다. ☞ 참고
"철은 탄소가 많이 함유될수록
강도가 강해지지만,"
"대신 탄성이 약해
충격에 쉽게 부러진다능."
"그걸 보완하기 위해서, 탄소 함유량이 서로 다른 강철을
시루떡처럼 층층이 쌓아 붙여서.."
"높은 강도와 탄성을 동시에 가지도록 한 것이
다마스쿠강의 특징임."
때문에 그런 강철을 만들려면
탄소 함유가 많은 철광석이 필요한데
그게 바로
인도의 철광석이었던 것이다.
"아!"
때문에 중근세 시대
인도의 칼은 매우 매우 살벌했다.
또 이러한 다마스쿠스 강이 있었기 때문에
인도의 화승총은
많은 화약을 넣어도
폭발에 강철로 된 약실이 버틸 수가 있어서
약실의 크기를 그만큼 크게 할 수 있어
총의 크기가 컸고,
그만큼 사거리가 길다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 멀리 있는 적도 명중시킬 정도다. 비슷한 시기 일본의 조총은 사거리가 겨우 40~50m 정도였다
"맞으면 마이 아퍼."
또 약실이 컸기 때문에
탄환이 없더라도
아쉬운 대로 돌멩이를 끼워 넣어
사용할 수도 있었다.
"헐!"
이런 강철과 함께,
'코끼리 갑옷'도
병사들의 전투력을 배가시키는데
혁혁한 공헌을 하게 된다.
사실 당시 코끼리 한 마리의 전투력은
'탱크' 한 대라 할 수 있었으니,
훈련받은 코끼리는 적군을 짓밟고
코로 낚아채서 던져버리거나
달리는 말의 다리를 잡아채
던져버릴 정도로 위력이 대단했다.
"뜨아!"
또 상아 끝에 칼날을 꽂아
그것으로 찌르기도 했다.
이런 전투 코끼리는
평소에는
사람 죽이는 연습을 연마시키기 위해서
사형집행을 하곤 했었다.
다만 전투코끼리가
적의 화살과 창에 맞아
부상을 당하고
죽는 경우가 잦았다.
악바르
"아놔, 코끼리 한 마리가 얼마 짜린데."
때문에 악바르 대제는
코끼리에 갑옷을 입히기로 결심하고,
강철 금속판을 사용해서
코끼리의 코와 귀까지 덮을 수 있는
전신갑옷을 만들어
입혔던 것이다.
악바르
"무장한 코끼리는 1마리는
말 500필에 맞먹는다능."
완성된 코끼리 갑옷은
130kg이 넘는 무게에
금속판 8천 개,
쇠고리 10만 개가 필요했다고 하니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다만 자원이 넘쳐나고
인건비가 비싼 현대와는 달리,
당시는 자원은 귀한데
인건비는 보잘 것 없었던 시절이니,
수백, 수천 명의 주민들을
집단 동원해
1년에 100여 마리의 코끼리를
무장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 악바르 대제의 내치
악바르는 그렇게
북 인도 전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 영토가 한반도의 12배에 달했고,
인구는 1억 명에 가까웠음."
하지만 소수의 튀르크인들 만으로
넓은 제국을 다스릴 수는 없었기에
토착 세력과
화합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예전 인도의 방식처럼
정복지마다
폭넓은 자치권을 주기는 싫었다.
악바르
"자치권을 주면
언젠가는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능."
악바르
"지방에는 관리를 파견하되,
정복지 수장들에게는 따로 특권을 보장하겠음."
그리하여 악바르는
제국 곳곳에,
황제의 영향력이 미치도록
행정력을 강화하는 한편
토착 귀족들에게는
관직을 하사하고 경제적인 혜택을 주었다.
그리하여 중세 시대 1000년 동안(6세기~16세기)
유럽과 일본에서처럼,
봉건제도 질서 속에서
살아가던 인도는
이때를 기점으로
중앙집권 체제로 변화하게 된다.
"아!"
대신 토착민들에게도
폭넓게 관직을 개방하였고
무엇보다 종교의 자유도
크게 보장했으니,
이전의 인도-이슬람 왕조들이 시행해오던
'지즈야'라는 세금을 없애버린 것이다.
▲ 지즈야를 내는 인도인들
악바르
"이젠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다고
세금을 징수하지 않겠다능."
"와! 정말요?"
악바르
"그럼, 누구에게나 종교의 자유는 있어.
터치하지 않겠어."
"와!"
다만 이런 이유로,
무슬림들에게는 불만을 샀다.
무슬림
"쳇. 알라의 교리를
널리 포교하지는 못할망정.."
▲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성직자들을 모두 포용했던 악바르 대제
또 토착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악바르는 친히 지방 호족의 공주들과
정략결혼을 했으니,
덕분에 독립적이고 배타적이던
라지푸트인들의 환심을 대거 얻을 수 있었다.
"다만 이런 식의 결혼이 워낙 잦아.."
"26세의 나이에 악바르는
300명의 아내와 5천 명의 첩을 가지게 된다능."
"뜨아! 고려시대 태조왕건은
비교도 안 되네!"
한편 악바르 대제는
여성의 인권에도
관심이 많았던
'흔치 않았던' 군주였으니,
무엇보다, 그동안 힌두교도들 사이에서 행해졌던
'사티'라는 악습을 폐지하도록 했다.
▲ 남편이 죽으면 부인도 산채로 태워졌던, 힌두교의 악습 '사티'
악바르
"왜 남편이 죽었다고
멀쩡히 살아있는 부인까지 화장시키는 거임?"
악바르
"당장 잔인한 사티를 금지하라능!"
여기에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는가 하면,
악바르
"여인네들도 밤은 외롭다능."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1부 1처제를 지키도록 했고
악바르
"혼자서 여러 여인들을 독차지하면
다른 홀아비들은 어쩌라고!"
무슬림
"쳇, 황제는 부인들만 수천 명이면서.."
여자는 14세 이상, 남자는 16세 이상
되어야 결혼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악바르
"조혼 금지!"
"와! 무슬림 왕조인데도
여성 인권에 이토록 신경을 쓴 황제가 있었다니.."
"괜히' 대제'의 명칭이 붙은 게 아니지."
그런 악바르 대제는
유난히 '그림'을 좋아했다.
악바르
"내가 사실
일자무식 까막눈이라능."
악바르
"그러니 보기 쉽게
책에다 그림을 많이 그려주라능."
그런 이유로, 실력 좋기로 소문난
페르시아 화가들을 대거 고용하게 되는데,
덕분에 페르시아의 섬세한 화풍의 영향으로
'무굴 세밀화'가 탄생하게 된다.
무굴제국의 전성기
● 그럭저럭 할 일을 했던, 자한기르
악바르가 죽자 그의 아들,
자한기르(재위 1605~1627)가 새 황제가 되었다.
그는 무굴 황제 중 최초로
인도 귀족의 어머니를 둔 황제였다.
자한기르
"쳇! 그렇더라도 나는,
고귀한 티무르의 후손이라능!"
그의 집권 기간 중,
지방 곳곳에서 반란이 있어
진압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자한기르
"아놔, 라자스탄과 벵골,
이쪽 동네가 늘 말썽이라능!"
영토를 더욱 늘려, '세계의 정복자'라는 뜻의
'자한기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자한기르
"하하하."
하지만 그 역시,
제국의 안정을 위해서는
다양한 세력을 감싸 안을 수 있는
'포용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한기르
"나도 아버지처럼
관대한 정책으로 제국을 운영해야지."
때문에 반란을 일으킨
라지푸트와 벵골의 반란군들을
윽박지르기 보다는
회유책으로 달랬다.
자한기르
"다 용서해줄 테니,
앞으로 소란피우지 말라능."
"헐! 용서해주시는 건가요?"
때문에 틈만 나면
문제를 일으키던,
라지푸트와 벵골 지역은
이무렵 충직한 동반자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하지만 자한기르는
선대왕처럼 완벽한 인물은 아니었다.
서북 지방의 아프간 지역을
끝내 잃어버렸고,
술에 취하면
개가 되는 고약한 술버릇도 있었다.
자한기르
"이 XX들이!"
그런가 하면 페르시아 출신의
아내 누르자한에 대한 집착이 워낙 강해,
▲ 황제와 누르자한
▲ 누르자한 ☞ 참고
그의 집권 후반기에는
국정을 누르자한이 좌지우지하기도 했었다.
▲ 누르자한
"당나라의 측천무후, 원나라의 기황후와
같았다고나 할까."
● 무굴제국의 전성기, 샤 자한
자한기르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샤 자한(재위 1627~1658)이 집권했다.
▲ 아들(샤 자한)의 체중을 재고 있는 자한기르
선대왕이 간다라 지역을 상실하여
제국의 영토가 줄어들었지만,
샤 자한은 데칸 고원의 땅을
그만큼 더 확장했다.
때문에 그의 호칭은 '세계의 왕'이라는 뜻에서
'샤 자한'이 되었다.
▲ 샤 자한
"한반도의 12배나 되는,
260만㎢ 면적에.."
"당시 세계 인구의 1/4이나 되었던
1억 3천만 명이 거주하고,"
"30개 언어와
7개의 종교를 가진 대 제국!"
샤 자한
"하하하"
▲ 샤 자한의 사자 사냥
그의 집권 시기는
무엇보다 정치가 안정되었기 때문에
▲ 어전에서의 샤 자한
상업과 수공업이
더불어 발전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중국·아라비아·페르시아 상인뿐 아니라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동인도회사를 설치하고 교역을 하고 있어서,
해마다 3만여 톤의 물품들이
배로 실려 나갔다.
"3만톤의 화물이면
범선 800여 척의 화물 능력임."
"즉, 거의 매일 2척 이상의 배가
물품을 싣고 갔던 것."
당시 주요 수출품은
비단·무명과 같은 '직물'이 주류였고
인디고(염료), 초석(화약 원료), 향신료 등도
인기 품목이었지만
인도인들은 외국 물품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수출 대가로 받았던 것은,
대부분 금화나 은화였고
가끔씩 포도주를
수입했을 뿐이었다.
"아놔, 사들일 것은 많은데,
당최 우리 물건은 사줄 생각을 안 하니.."
어쨌든 무역으로 인해
인도에는 금화와 은화가 대거 유입되었고
덕분에 무역 중심지의 도시들은
더욱 번성할 수 있었다.
"17세기 무굴 제국에만
20만 명이 넘는 도시가 9개가 있었는데.."
"당시 유럽에는 콘스탄티노플, 나폴리, 파리, 런던
등 단 4곳 밖에 없었다능."
● 호화로운 귀족 문화와 가난한 백성들
무굴 제국의 왕족과 귀족들은
튀르크인들로서
원래는 튀르크어를 사용했으나,
페르시아 문화를 동경하게 되어
페르시아어를
공용어로 삼게 되었고,
▲ 페르시아 문명
"18세기 후반이 되면
페르시아어에 토착어가 섞여 우르두어가 된다능."
문학, 미술, 과학, 의학,
철학, 건축술에 이르기까지
모두 페르시아의 것을
따르려 했기 때문에
"마치 조선시대 양반들이
중국의 것을 따르려 했던 것처럼.."
페르시아 문화는 그야말로
무굴 귀족 문화를 대변하게 된다.
▲ 페르시아의 귀족 문화
따라서 귀족들이나
장사로 큰 돈을 모은 상인들의 집은
으레 페르시아 풍의
화려한 저택으로 지어졌으니,
실내에는 화려한 그림과
도자기 등으로 장식되어 있고
정원에는 과일 나무와
분수를 배경으로
▲ 정원에 물을 대기 위해 이러한 수차를 이용했다. 이것 역시 페르시아 방식.
공작이 뛰어노는가 하면,
낙타와 코끼리 등을 길렀으며
수백 명의 하인을
거느리고 있었다.
또 귀족들은 비단옷을 즐겨 입고,
금이나 은으로 장식된 그릇을 사용했고,
여가 시간에는 폴로 경기를 즐기거나
코끼리를 타고 사냥을 즐기곤 했다.
▲ 온갖 동물들을 풀어놓고 사냥을 즐기는 악바르 대제 : 치타가 사냥개 역할을 하고있다
이들은 식사 때마다
다 먹지도 못할 만큼의
엄청난 음식상을 차리는 것을
재력의 상징으로 삼기도 했다.
"헐!"
▲ 황족의 결혼식날, 불꽃놀이
하지만 그런 삶을 즐기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대다수(인구의 90%) 백성들의 삶은
소박하기 그지없어서,
농민들은 대부분
자기 땅이 없는 소작농이었고,
조그만 땅을 빌려
농사를 짓더라도
수확량의 절반 이상을
소작료로 바치고,
거기서 또 세금을 내고 나면
가족들의 끼니를 때우기도 힘겨웠다.
이들은 대부분
초가집에서 살았고
▲ 인구의 대부분은 이런 집에서 살았지만, 무굴시대의 그림은 철저히 귀족 중심이다
살림살이도
매우 단촐했다.
주로 무명 옷을 입었지만,
남자들은 윗통은 거의 벗고 살았고
맨발로 지내는
사람들도 많았다.
"뭐 전통시대 전세계 어딜 가봐도
농민들의 삶은 가난했었지만.."
무슬림은 돼지고기를,
힌두인들은 쇠고기를 먹지 말라고 했지만
어차피 육류 자체가 워낙 귀해
평소에 고기는 거의 구경도 못하고 살았다.
"오늘날에도 인도인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육식 섭취량이 적다능." ☞ 참고
● 화려함의 극치, 타지마할
페르시아의 문화를
흠모하던 왕족들은
건축물에 있어서도
페르시아 풍을 선호했는데,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타지마할'이다.
타지마할은 '궁전의 왕관'이라는 뜻이지만 ☞ 참고
사실 궁전이 아니라, 무덤이다.
"헐! 무덤이었어?"
사연은 이렇다.
황제 샤 자한은
16세의 소녀, 뭄타즈 마할의 미모에 반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고
이후로 잠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샤 자한
"오! 마이 달링~♥"
뭄타즈 마할
"아힝~♥"
그래서 심지어
전쟁터에도 데리고 다닐 정도였는데
그러면서 그녀와의
20년의 결혼 생활 동안
무려 14명의
자식을 낳았다고 한다.
▲ 뭄타즈 마할
하지만 14번째 자식을 전쟁터에서 출산하다가
황후는 그만 죽고 말았고,
황제는 이를 가슴 아파하며
타지마할을 만들도록 했던 것이다.
"흑흑흑.."
"와! 황제가 일편단심 애처가였나 보네."
"아니, 사실 샤 자한에게는
후궁이 5천 명이나 있었어."
▲ 무굴 황제의 후궁들
어쨌거나,
타지마할을 만들기 위해
황제는 세금을 평소보다 50%나 올렸고
공사만 22년 동안 했으니,
이를 위해 매일
2만여 명의 사람들과
1000여 마리의 코끼리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 참고
또 페르시아의 유명한 건축가들과
오스만의 소문난 장인들을 불러들였는가 하면,
건물 외관을
흰색 대리석으로 마감하고
천정에는 루비, 사파이어, 다이아몬드 등의
엄청난 보석을 박을 정도로 사치를 더했다.
"지금 보석들은 대부분 떼어갔지만.."
그러니 백성의 입장에서는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화려한 건축물의 이면에는
백성들로부터 쥐어짠 고혈이 숨 쉬고 있다능."
무굴제국의 쇠퇴
● 무굴제국의 빛과 그림자, 아우랑제브
결국 샤 자한은 타지마할 축조로 인해
민심을 잃은 것을 빌미로
이들인 아우랑제브의
'쿠데타'에 의해 축출되고
▲ 아우랑제브의 군대
평생 아그라 성 안에
꼼짝달싹 못하고 갇힌 신세가 되고 만다.
▲ 아그라 성에서 멀리 타지마할을 바라보고 있는 샤 자한
아우랑제브(재위 1658~1707)는
뭄타즈 마할의 셋째 아들로
스스로 황제가 되고 싶어
형의 목을 베고
아버지를 유폐시키고
이후 한번도 찾아보지 않았던 '냉혈한'이었다.
새 황제가 된 아우랑제브는
야심만만하고 호전적인 군주였던지라
즉위 직후 바로,
정복 사업을 시작했다.
"원래 정통성이 약한 군주들은
치적을 쌓아 만회하려는 욕심이 있기 마련."
그리하여 아우랑제브 때 무굴제국은
인도 아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한반도의 15배 면적(320만 ㎢)에
1억 5천만 명의 인구!" ☞ 참고
"마우리아 왕조에 이어
2천 년만의 쾌거!"
▲ 2천년 전 마우리아 왕조의 영역 : 무굴제국과 매우 흡사하다
그렇게 아우랑제브는
40살에 즉위해서
90살에 사망할 때까지,
무려 50년을 통치하게 되는 것이다.
"재밌는 것은, 아우랑제브가 집권할 당시
중국의 강희제는 61년,"
"당시 유럽 최강국,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무려 72년을 집권했었다능."
아우랑제브
"50년이 뭐가 길어?
나도 10대 나이 때부터 황제가 됐어 봐."
하지만 그는 최대 영역을 가졌던 동시에
무굴 제국 멸망의 원흉이기도 했다.
무엇 때문에 아우랑제브 때
무굴 제국은 휘청거렸는가?
가장 큰 이유는
선대왕들의 관용정책을 무시했다는 점이다.
아우랑제브
"무굴 제국은
정통 이슬람 제국이라능."
▲ 코란을 읽고 있는 아우랑제브
아우랑제브
"왜 이슬람을 믿지 않은 사람들이
'지즈야'를 내지 않는 거임?"
그러면서 '지즈야'를
부활시켰던 것이다.
"그것이 최대 실수!"
때문에 지즈야에 반발하며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펀자브 지방에서
시크교도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 펀자브 지방
무굴 군대는 시크교 지도자를 잡아
잔인하게 처형했고
▲ 처형 당하는 시크교 지도자
그런 이유로 반란과 저항은
오히려 더욱 격렬해졌다.
"용서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보다 심각했던 쪽은
힌두교도들이었으니,
인도 중남부에서
궐기하기 시작한 반란군은
'마라타 동맹'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세력으로 뭉치게 되는데,
▲ 마라타의 요새를 공격하고 있는 무굴 군대
무굴 군대는 이들을 진압하는데에만
30년 넘게 국력을 소진해야만 했었다.
(게다가 제대로 진압하지도 못 했다)
아우랑제브
"아놔, 반란이 끊이질 않는구먼."
"결국 아우랑제브는
초반 20년 그럭저럭 잘 하다가.."
"나머지 30년을
시원하게 말아먹었던 황제."
이러한 내란과 저항은
아우랑제브 사후 더욱 거세지는데,
그의 아들들은 권력에만 눈이 멀어
서로 아귀다툼에먼 몰두하다가,
때마침 쳐들어온
페르시아와 아프간 세력에
엄청난 인명 피해와
재산을 약탈당하게 되어,
18세기 중엽이면
제국은 거의 몰락하고
화려했던 과거를 뒤로한 채,
델리 주변만을 다스리는 작은 나라가 되고 만다.
"뭐? 무굴 황제?
그냥 시골 군수라고 하자능."
● 유럽인들의 진출
1498년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항로 개척 이후,
포르투갈인들의
쇄도가 있었다.
"와! 성공만 하면
투자금의 60배!"
"세상에 이런 로또가.."
▲ 16세기 후반 리스본 : 인도의 물건을 싣고 도착한 포르투갈 상선
이들은 처음에는
인도인과 우호적이었으나
상인들간의
충돌이 잦아지자
곧 군대를 파견하여
인도 해안가를 점령하더니,
그곳을 근거지로
향료 무역을 독점했다.
그리고 17세기 접어들자
더 많은 유럽 국가들이 인도로 몰려들었다.
포르투갈의 국력이
약화된 틈을 타,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이
각각 동인도회사를 만들고
인도와의 무역에
뛰어든 것이었다.
특히 영국이 적극적이었는데
영국인들은 열심히 무굴 황제를 꼬드기고 있었다.
영국인
"폐하, 포르투갈이 요즘 너무 설치는데,
우리가 손 좀 봐줘도 되겠습니까?"
자한기르
"오! 그래 줄 수 있겠는가."
영국은 해군이 없는
무굴 제국의 약점을 간파했던 것이고
무굴 황제는 영국을 통해
포르투갈을 견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때문에 황제의 승낙을 받은 영국은,
곧 포르투갈 해군을 소탕하며
인도는 물론, 인도양 일대를
장악하게 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늑대를 잡기 위해 호랑이를 끌어들인 격이었다!
포르투갈을 물리친 영국은
첸나이, 뭄바이, 콜카타 등
인도 해안가마다
동인도회사의 무역 사무소를 차린 것이다.
영국인
"하하하"
그런 과정에서
현지민들과 충돌이 있었는데,
영국인들은 그걸 구실로
무역 사무소마다 요새를 쌓았고,
영국 상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그리고는 포르투갈이 그랬던 것처럼,
무역 사무소를 거점으로 하여
점차 주위로
세력을 키워 나가게 된다.
이때 영국이 가장 눈독을 들였던 곳은
질 좋은 직물 생산지였던 '벵골 지방'이었는데,
▲ 오늘날, 한반도 면적에 2억 5천만 명 이상이 거주하고있는 벵골 지역 ☞ 참고
이곳에서 최고 히트 상품
'모슬린'이 만들어져
이를 통해 벵골 지역에서만
'동인도 회사 수입의 2/3'가 창출됐기 때문이다.
"모슬린이 뭥미?"
"얇고 투명하고 구김살이 없는 면직물."
"가벼운데다 보온성도 좋아서
귀족들의 옷을 만드는 데 애용됐음."
▲ 모슬린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은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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