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족의 침입
● 유목민의 침입과 굽타제국의 멸망 (6세기)
AD 4세기부터 지구의 기후는
급격히 추워지기 시작했다.
추운 날씨로 인해
극지방의 바닷물이 얼자
지구의 해수면은 낮아져
증발된 바닷물이 줄어들었고,
건조한 날씨 때문에
초원의 풀들이 말라죽었다.
목초지가 사라지자
가축들은 떼죽음을 당했고
배고픈 유목민들은 살기 위해
농경 국가들을 쳐들어왔다.
평소 말을 타고 사냥을 하던
유목민들의 전투력은
쟁기질에 낫질이나 하던
농경민족과는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뜨아!"
그렇게 해서 중국에는
5호 16국 시대가 열렸고
▲ 화북지방의 지배층이 된, 6세기 선비족(몽골계) 귀족들
유럽에서는 훈족이
동유럽을 침략하자,
훈족에 쫓겨난
게르만족들이
로마 영토로 쳐들어가서
로마가 멸망하게 되었다.
당시 세계 인구의 30%가 살던
인도 아대륙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에도 '에프탈'이라는
이란계 유목민족이 쳐들어왔던 것이다. ☞ 참고
▲ 에프탈 족의 영역
"흉노족과 훈족은 몽골로이드 계통이었지만, ☞ 참고
이들은 코카소이드 인종이라고 해서.."
"'백색 훈족'으로 불렸다능."
▲ 에프탈족
이들의 침략으로
굽타제국은
서북지방의 인더스(오늘날 파키스탄)와
라자스탄을 잃게 되는데,
▲ 라자스탄 지방
이곳은 페르시아와 아라비아로 가는
'무역로'의 길목에 위치해 있어서
▲ 굽타제국의 무역로 : 육로 (붉은선), 해로 (파란선)
이곳이 떨어져 나가자
굽타제국의 세금은 크게 줄어들게 되었고,
재정이 부족하니, 국방과 행정이
커다란 차질을 빚게 되어
그런 틈을 타, 여러 지방들이
스리슬쩍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다.
"뜨아!"
때문에 6세기 중엽
굽타제국은 망하고 만다.
이로써 인도의 고대사는
막을 내리게 되고
'제국의 시대'가 저물고
여러 권력이 공존하는
중소 국가들의 투쟁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된다.
"서양과 마찬가지로 이후의 시대를
중세로 본다능."
● 이슬람 세력의 침입 (8세기)
7세기 아라비아 반도에서
시작된 '이슬람 제국'은
엄청난 속도로
세력을 확산했다.
이들의 특징은, 정복전쟁을 통해
종교를 포교했다는 점이다.
방법은 이러했다.
일단 쳐들어가서 땅을 차지한다.
그리고 세금(지즈야)을 걷는다.
대신 이슬람교를 믿으면, 세금은 면제다. ☞ 참고
"어? 그래?
나도 이슬람교 믿어볼까?"
▲ 지즈야를 내는 백성
이런 기막힌 발상으로
단 80년 만에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 전역에 걸친
광활한 영토를 차지함과 동시에
이슬람교를 자동적으로
포교하게 된 것이다.
▲ 지즈야를 징수하고 있는 관리들
"오! 천잰데!"
그리고 8세기가 되면, 중앙아시아까지 진출해서
실크로드를 차지하더니
"당나라가 이곳을 포기한 바람에
우즈벡-카자흐 이쪽 동네들은.."
"원래는 불교를 믿었지만
빠르게 이슬람화 된다능."
인도의 인더스 지방까지
꿀꺽 삼켜버렸다.
"페르시아, 알랙산더, 유목민들까지
언제나 인도를 치기 앞서.."
"가장 먼저 접수했던 땅이
바로 인더스 지방이었다능."
하지만 다음 차례인
라자스탄 지역은 쉽지가 않았다.
▲ 라자스탄 지방
이곳 주민들은
이란계 유목민인 '에프탈족'과
'인도인' 사이의 혼혈인
'라지푸트족'이 살던 곳으로, ☞ 참고
이들은 힌두교를 받아들여
인도에 정착했지만
▲ 라지푸트족
여전히 유목민 특유의
호전성이 남아있었다.
▲ 라지푸트의 키타르 : 양날로 제작된 찌르기용 칼
무슬림
"헐! 라지푸트 녀석들은
공략이 쉽지가 않네."
때문이 라자스탄 지역이
방파제가 되어
한동안 인도 전역은 이슬람의 침입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 라자스탄의 라지푸트족
● 돌궐족의 침입 (11세기)
그리고 200년이 지난, 10세기 무렵
우리나라로 치면 고려시대가 시작되던 때,
이란 동부 ~ 인더스 지방에는
튀르크(돌궐)족이 쳐들어 내려와
'가즈니 왕조'라는
이슬람 국가를 세웠고, ☞ 참고
▲ 가즈니 왕조
"참고로 이때 튀르크인들은
몽골인과 소그드인(이란 계통)의 혼혈이었고,"
"오늘날 중앙아시아인들의 선조들임."
▲ 8세기 당시의 돌궐(괵튀르크)의 영역 ☞ 참고
"어? 그러면 오늘날 중앙아시아인들은
몽골 + 이란 혼혈인 셈이네."
곧 풍요로운 북인도의
갠지스 평원을 탐내게 된다.
"평소 농사만 짓던
약골들인데.."
"우리가 쳐들어가면
쉽게 전리품을 챙길 수 있을 거야."
▲ 가즈니의 왕
그리하여 1018년경
12만의 대군으로 쳐들어갔다.
"똑같은 시기에 고려에도
거란족이 쳐들어왔었지."
"이런 걸 보면 고대~중세 역사는
늘 유목민이 농경국가를 침략하는 패턴이 반복된다능."
▲ 요새를 공격하고 있는 가즈니 군대
그렇게 인도로 쳐들어간
가즈니 군사들은
'세는 자의 손가락이 아플 만큼'
많은 보물과 노예들이라는
전리품을 차지하고
유유히 되돌아갔다.
▲ 파괴된 힌두 사원과 약탈된 보물들
"하하하"
하지만 그런 가즈니 왕조는
12세기 후반,
같은 튀르크족 출신의
'고르 왕조'에게 무너졌고,
이때 고르 왕조는
내친김에 북인도 깊숙이 쳐들어가서는
아예 터를 잡고
나라를 세워버린다. ☞ 참고
▲ 고르 왕조의 영역
"삥을 뜯고
돌아가는 것보다.."
"여기서 죽치고 앉아서
세금을 걷는 게 더 낫지."
그렇게 갠지스 평원을 차지한
고르 왕조는
수도를 '델리'로 정하고
이슬람을 국교로한 술탄국을 세워, ☞ 참고
이를 바그다드의 칼리프에 알려서
정식 술탄국으로 인정받게 된다.
"북인도 델리에 술탄국을 세웠습니다.
허락해 주셨으면.."
칼리프
"응? 그래?
좋아, 허락."
그리하여 1206년
정식으로 '델리 술탄 왕조'가 출범한다. ☞ 참고
인도-이슬람 문화
● 델리 술탄 왕조 (13세기)
그동안 인도에 침입한
이민족들은,
인도의 문화와 전통을 받아들이면서
기존 인도 문화에 동화되었다.
"1세기 쿠샨족도
불교와 카스트질서를 받아들이고,"
"6세기 에프탈족들도
힌두교와 카스트질서를 받아들였지."
그런데 이슬람 세력은 달랐다.
유일신 알라의 가르침을 내세워
인도인의 종교를 억압하고,
힌두 사원의 신상을 부숴버렸다.
술탄
"우상 숭배하지 말라능!"
▲ 델리 술탄의 상징 '쿠트브미나르' : 높인 72.5m의 거대한 이슬람 탑
그들은 인도 고유의
'카스트 제도'도 부정했다.
술탄
"알라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한 거임!"
때문에 힌두교와 카스트제도로
차별과 고통을 받던,
하층민들과 일부 상인들에게는
이슬람교는 가뭄에 단비와도 같았다.
"우앙! 이슬람교 무지 좋다능."
하지만 모든 이를 유혹하기에는
인도의 인구는 엄청 많았고,
대다수 인도인들은
오랜 종교와 관습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하층민조차도
그러했다.
"지금은 그냥 참고 순응해야
내세를 보장받을 수 있어."
결국 델리의 술탄들은,
소수의 무슬림이
다수의 힌두교의 전통을
강제로 바꿀 수 없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술탄
"아놔, 이슬람이 먹히지 않는 곳은
또 처음 보네."
때문에 지배층들은
더 이상 이슬람을 강요하지 않았고,
대신 '지즈야'라는
세금을 부과하도록 했다.
술탄
"이슬람교 안 믿겠다고?
그럼 지즈야를 내!"
▲ 지즈야를 내는 인도인들
그러면서 힌두교도들에게
손을 내밀었으니,
술탄
"어찌됐든, 국가를 통치하려면
인재가 필요함."
술탄
"힌두교도에게도
관직을 개방하겠다능."
그런 관용적인 정책으로
델리 술탄은
14세기 초에 데칸 고원 남부까지
영토를 넓힐 수 있었고, (일시적이었지만)
인도 특유의
풍부한 농업 생산력과
이슬람 특유의
상공업과 무역이 결합하여
막대한 재력을
축적할 수 있었다.
▲ 16세기에 지어진 펀잡 지방의 황금 성 '암리차르'
그 결과,
도시 규모는 더욱 커져
수도 '델리'는 50만 명이라는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당시 중국의 북경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음."
● 인도-이슬람 문화의 탄생 (13~16세기)
인도의 문화를 엿보면
왠지 중동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 무굴시대의 델리
착각일까?
아니다. 실제로 그러하다.
델리술탄 왕조 이후
인도 왕조에는
줄곧 중동 문화가
이식되고 있었고,
이를 두고 흔히,
'인도-이슬람 문화'라고 한다. ☞ 참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란(페르시아)의 선진 문화가
인도와 아라비아 등지로
퍼졌다는 게 맞겠지만..
▲ 페르시아 문명
"사실 이슬람 문화는 '이란'이 키워나가고
발전을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음."
어떤 게 있을까?
가장 먼저 '우르두어(語)'가 있다.
▲ 우르두어 낱말
인도를 점령한 이슬람 세력들은
지배층은 튀르크인들이었지만,
다수는 이란인들이었고,
이들은 페르시아어를 사용했다.
때문에 페르시아어는
곧 지배층의 언어를 상징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다 보니
페르시아어에 델리 지역의 고유언어가 혼합되어,
독특한 언어로 변형되는데
그것이 바로 '우르두어'였다.
"페르시아어 + 튀르크어 + 아랍어 + 토착어 = 우르두어"
"오늘날에도 6500만 명이 사용하고 있어서,
전 세계에서 21번째로 많이 사용하는 언어임." ☞ 참고
또 미술에 있어서도
페르시아의 세밀화가 전파되어,
인도의 그림을 보면
중동의 그림과 매우 유사하다.
▲ 페르시아의 그림
▲ 무굴시대의 그림
건축물도 돔, 아치, 첨탑과 같은
페르시아 양식이
아라비아는 물론,
인도까지 전파되게 된다.
"흔히 모스크 양식의 이슬람 사원을
아라비아 전통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페르시아의 전통 양식임."
▲ 페르시아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이스탄불의 성소피아 성당
음악에서는 강한 음률과
빠른 템포가 강조되게 되는데,
이는 페르시아의 전통악기,
시타르(기타)와
타블라(북), 나이(플룻)
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 페르시아의 전통 연주
▲ 인도의 전통 연주 : 페르시아의 기타 '시타르' 연주
"괜히 인도 음악과
중동 음악이 비슷한 게 아니라능."
또 페르시아의 전통 복장인
'스카프'와 '파자마'도 유행하게 된다.
▲ 스카프를 걸치고 파자마를 입은 인도 여인
"어? 스카프와 파자마가
이란이 기원이었어?"
인도인의 주식인 쌀에
무슬림이 즐겨 먹는 양고기가 어우러진
볶음밥 '비랴니(biryani)'를 먹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부터다.
한편 귀족들은 페르시아의 전통 스포츠인
'폴로'를 즐겼는데,
당시의 폴로는
중국을 거쳐 고려에도 소개되어
(페르시아의 폴로는 고대 시대부터 중국에 전래되었지만..)
▲ 페르시아의 폴로
▲ 인도의 폴로
'격구'가 고려 귀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된다.
▲ 고려의 격구
● 시크교의 탄생 (15세기)
인도-이슬람 문화의
대표적 사례로 꼽는,
'시크교'가 만들어진 것도
바로 이때였다.
"왜 시크교임?
시크해서?"
"그건 아니고, 산스크리트어로
'교육(sisya)'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됐다고 함."
시크교는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장점을 결합해 만들어졌으니,
당시 시크교의 창시자
나나크(1469~1538)의 말을 들어보자. ☞ 참고
나나크
"힌두교는 왜 이렇게
신들이 너무 많은 건지.."
나나크
"소도 믿고 뱀도 믿고 원숭이도 믿으라고?
차라리 나를 믿고 말지."
나나크
"우상숭배는 나쁜거임.
만물을 창조한 신(알라)은 오직 하나라고."
나나크
"그렇다고 이슬람교를
믿자는 얘기도 아님."
나나크
"하루에 메카를 향해
5번씩 기도하라고?"
나나크
"왜 그렇게 종교가 형식적임?
신앙은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와야지."
그리하여 나나크는
시크하게 '시크교'를 창시하게 된 것이다.
나나크
"모든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함.
카스트 제도는 사악한 것임."
나나크
"몸과 마음을 순수하게만 하면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음."
나나크
"그러니 면도나 이발 같은 거 하지 말라능.
신이 주신 거 함부로 훼손하면 안 됨."
그래서 시크교도들은, 머리에 터번을 쓰고
덥수룩한 수염을 달고 다닌다.
▲ 시크교도들의 행진
그러면서도 청결을 강조했고
직업을 강조했다.
나나크
"그렇다고 몸을 더럽게 하고
다니자는 말은 아님."
나나크
"빗은 항상 가지고 다니고,
팬티는 꼭 입고 다니자능."
나나크
"또 직업에 충실하고
봉사하면서 살자능."
그래서 인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걸하는 걸인들 중에서,
시크교도들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또 단검을 평상시에
차고 다니도록 했다.
나나크
"용기를 위해서, 약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항상 칼을 차고 다니라능."
때문에 인도에서 터번을 쓰고
수염을 기르고 칼을 찬 사람을 본다면
그런 사람은 십중팔구
시크교도들인 것이다.
중세 남부 인도
● 촐라 왕국과 비자야나가르 왕국
상대적으로 비중이 없는
인도 남부의 역사라지만,
중세시대 '촐라왕국'과 '비자야나가르왕국'은
반드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비자야나가르?
아놔, 이름조차 외우기 힘드네."
"이름을 외우기보다는, 당시 남부 인도가
어떠했다 정도로만 알고 가면 될 듯."
먼저 촐라왕국은
우리나라 고려시대 때
인도 남부에 ↓이러한 형태로
존재하던 나라다.
남부에서 발흥하여
북부가 어수선한 틈을 타서
벵골만까지
쳐올라온 케이스다.
"헐! 인도판 칠레?"
여기에 멀리 동남아시아 지역까지
그 영향력을 미쳤던 왕국이었다.
▲ 촐라의 영역(회색)과 촐라의 영향권(보라색)
인도인들은 일찍부터
동남아 지역과 활발하게 교류를 했다.
마우리아 제국 때는 불교,
굽타 제국 때는 힌두교가 동남아로 전파되었고
이후 동남아의
풍부한 금과 향신료를
확보하기 위해
무역이 활발하게 일어나
인도의 발전된 문화가
동남아 일대로 널리 전파되게 된다.
▲ 촐라의 무역선
그 결과, 동남아 각지의 왕국들은
인도의 문화의 영향으로
강력한 왕국을
건설하게 되는데,
9세기 인도네시아의
'프람바난 사원'이나
12세기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는
모두 인도의 영향을 받은
힌두 사원들이다.
인도네시아라는 이름 자체가
'인도인의 섬'을 뜻하니
그 이름만으로도 인도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지 않는가!
중국과 인도 사이에 있다고 하여
'인도차이나 반도'라고 하지만,
실제로 베트남 북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인도 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곳이었다.
"고로 전통시대의 동남아는
필리핀과 북부 베트남을 제외하면, 전부 인도 문화권."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인도 문화의 동남아 전파는
군사적 정복이 아닌,
대부분 평화로운 교류에 의했다는 점이다.
물론 상인들이 현지에서 공격을 받을 때는
해군을 투입하기도 했지만, 그런 모습은 예외적이었다.
▲ 말레이 반도에서의 촐라 해군
|
본래 촐라 왕조가 있었던
인도 남부지역은
비옥한 토양으로 유명하여
이런 소문도 있었다.
"코끼리 한 마리가 누울 땅이면
7명을 먹여 살릴 수가 있다능."
또 활발한 상공업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해상무역이 발달하던 곳이었다.
게다가 왕들은 더 많은 수확물을 얻기 위해서
거대한 댐과 호수를 만들고
광산, 염전 등을 통해서
많은 재정을 확충하고 있었다.
때문에 북부의 인도 왕조들은
쉽사리 남부를 정복하지 못했다.
이런 남부에서도 '힌두교'와 '카스트제도'가
체제 질서의 근간으로 자리 잡고 있었는데,
다만 보수적인 북부와는 달리
어느 정도 개방적이고
융통성이 있었다는 게
남부 힌두교와 카스트제도의 특징이다.
"북부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부인을 산 채로 화장하는.."
"힌두교의 오랜 관습인
'사티'가 횡행했지만,"
"남부에서는 그 정도까지는
거의 행해지지 않았음."
또 카스트제도가 있었다지만,
서도 다른 계층 간 결혼도 가능했고,
남녀 차별도
심각한 수준이 아니어서,
여성들의 사회 활동이나
여성 상속권도 인정되었다.
하지만 이런 촐라왕국은
13세기 후반, 멸망하고 말았고
대신 비자야나가르 왕국이
그 바톤을 이어받게 되는데, ☞ 참고
비자야나가르 왕조를 세운 이들은
북부의 힌두 집단으로
북부가 이슬람화되자
탈출하여
촐라 왕국을 비롯한, 인도 남부 일대를
점령하게 된 것이다.
"오늘부로 이 땅은 우리가 접수!"
"힌두인들 모두가 힘을 합쳐서
무슬림들의 침략에 맞서 싸우자능!"
● 바스쿠 다 가마의 방문
이렇게 세워진 비자야나가르 왕조는
'100만 명'의 병사를 거느린 군사 대국이었고
면직물, 향신료 등을 통해
막대한 부를 벌어들이는,
세계적인
무역국이었으며
이곳의 다이아몬드 광산은
당시까지 전 세계에서 유일한 곳이었다.
때문에 수도 비자야나가르에는
중국과 페르시아 상인뿐만
이탈리아와 동아프리카 상인까지
찾아오고 있었다.
"바글바글.. 왁자지껄.."
또 행정 제도가
매우 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어서,
가령 이곳에서는, 범죄자의 체포보다는
범죄 예방을 더욱 강조하여
민가에 도둑이 들면
경찰도 책임 지고 배상을 해야 했고,
재판은 여러 법정을 거쳐
몇 단계로 신중히 진행되었고,
최종심은 반드시
황제 앞에서 열도록 했다.
또 마을마다
원형경기장들이 조성되어 있어,
레슬링과 같은
스포츠가 성행했는데
당시에는 남자 선수는 물론이고
여자 선수들도 있었다고 한다.
"헐! 중세판 론다 로우지?"
그런 비자야나가르 왕국의
남부 해안도시 캘리컷에
1498년 5월 어느 날,
낯선 이방인 무리들이 상륙을 하게 된다.
▲ 유럽인들의 그림은 이렇게 거창했지만..
이들은 포르투갈인
바스쿠 다 가마 일행이었고
동아프리카에서
현지 주민의 도움을 받아
인도 캘리컷 항구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그들이 항해를 한지
10달 만의 일이었다.
때문에 일행은
가슴 벅찬 감동을 느꼈다.
"인도다! 인도 땅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들을 대하는
인도인들의 태도는 사뭇 차가웠다.
"이탈리아 상인인가?
왜들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거지?"
"무역을 하러 온 사람들이
가져온 게 왜 이리도 보잘 것 없어?"
"뭐야? 거지들인가?"
여기에 이슬람 상인들의
방해도 가세했다.
"어이? 이봐!
너희들 뭐야?"
"누군데, 남의 구역까지 와서
함부로 장사를 하려는 거임?"
다 가마
"읭?"
결국 다 가마 일행은
서해안 항구들을 정처 없이 떠돌며
이리 쫓겨나고
저리 쫓겨나면서
겨우겨우 개고생 끝에
물물교환에 성공하게 된다.
"에겅.. 제발 부탁합니다."
"만세! 드디어 향신료를 얻었다!"
그렇게 수개월을 떠돌다가
겨우 향신료를 얻게 된 다 가마 일행은
그해 10월, 인도를 출발해
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
이듬해 9월에
포르투갈에 도착하게 되었고,
"우아! 바스쿠가 돌아왔다.
굉장한 보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위대한 항해자'라며 칭송했다.
다만, 출발했을 때에는
4척의 배와 170명의 선원이 있었지만
도중에 괴혈병,
열병으로 죽어나가
돌아왔을 때는
2척의 배와 55명의 선원뿐이었다.
"생존율 32%"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들이 인도에서 가져온 향신료로
투자금의 60배의 이익을
챙길 수 있게 되었다.
"와! 60배!"
물론 인도 현지에서 거지 취급을 받으며
무시를 당했던 것을 기억해보자면,
조금 우스운 얘기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누가 이들을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향신료 좀.."
도전하는 자와
머무르는 자의 차이가 어떻다는 것은,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극명히 알고 있지 않는가!
어쨌든 다 가마의
인도항로 개척이 계기가 되어
이후 인도 해안에는
시시각각으로
유럽인들의 무역 기지가
들어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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