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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1일 화요일

인도의 고대사 : 수천 년간 '세계 최고'였던 문명 + '인도제국'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찬란한 인더스 문명

● 축복받은 땅, 인더스 (BC 8000)

1만 년 전 지구의 날씨가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 1만년 전 빙하의 분포 (하얀색)

빙하가 녹기 시작하고
바닷물의 증발이 증가하게 되자

비구름이 많이 만들어져
곳곳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눈으로 뒤덮였던 곳이
숲과 초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자 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들소, 매머드 같은
대형동물들이 사라져 버렸고


이들을 사냥해 먹고살던
구석기인들은

부족해진 사냥감을
매우기 위해

뿌리, 열매, 곡식 등의
식물들을 닥치는 대로 채집하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아예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농사는 중동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는데,


그곳에 아생 밀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농사짓기'는
주변으로 빠르게 확산되어

비슷한 시기, 인도 북서쪽에서도
농사를 짓기 시작하는데

▲ 인더스 문명의 농사

이곳은 히말라야 산맥에서 시작된
눈 녹은 물이

산기슭에 쌓인 흙을
실어 날으면서


3천 km나 되는
거대한 강줄기를 형성하고 있어


우기(6월~9월)가 되면
강물이 범람하여

매년 새로운
토양이 쌓였기 때문에

농사로 지력이 소모되더라도
신선한 흙으로 덮여져

따로 땅을 옮기지 않아도 됐기에
인구가 빠른 속도로 증가할 수 있었다.


▲ 농사는 물이 빠지는 건기(11월~4월)에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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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료가 없고 농기구도 조악했던
과거의 농사법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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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한 곳에 농사를 지으면 수년 동안은
지력이 회복할 때까지 방치해야만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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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더스 강가에서는
매년 같은 땅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던 것임."

게다가 히말라야 산맥이
차가운 바람을 막아 주어

1년 내내 따뜻하고
강수량도 풍부했다.


또 6천 년 전 쯤에는
갠지스강에 살던 이웃으로부터

벼농사 방법을
전수받게 되어,

이때부터 인더스 강 유역의 사람들은
쌀, 밀, 보리, 조, 콩 등의

다양한 곡식을
재배하게 되었고


세계 최초로 목화도
재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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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도 먹고, 빵도 먹고,
무명옷도 입고.."

뿐만 아니었다.

이곳의 주민들은
일찍부터

수확한 농산물이나
가축, 공예품을 배에 실어


강을 따라 형성된
도시들을 찾아다니며

필요한 물건들과
물물 교환을 하곤 했으니,

일찍부터 상업과 수공업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육로를 이용하는 것보다
수로를 이용하면

더 많은 물자를
더 빠르게 수송할 수 있기 때문에

고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강은
고속도로와도 같은 것이었는데,


그런 면에서 인더스 강 유역의 사람들은
기름진 농경지와 더불어,

천혜의 교통로까지
선사받았던 것이다.

▲ 가까운 주변은 수레를 사용했다


● 인더스 문명의 탄생 (BC 2500)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흘러
4500년 전,

인더스 강 주민들은
멀리 서쪽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청동 제작술을 배워
한층 더 진화한

▲ 청동으로 만든 '춤추는 소녀' : 인더스 문명은 '드라비다인'의 문명이었다 

문명을 건설하며
살아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더스 문명'이었다.

▲ 인더스 문명에서 출토된 장신구와 놀이기구, 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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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문명은 5500년 전
메소포타미아에서 최초로 시작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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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후 이집트로 전파되고,
다시 500년 후 인더스 지방으로 전파됐던 것임."



그러나 인더스 문명은
유입 시기는 늦었어도

그 규모에 있어서는,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문명보다 훨씬 광대해서

발굴된 도시 유적지만
250여 개가 되는데,

▲ 인더스 문명의 도시 유적지 : 붉은색

도시마다 인구가
2~3만 명씩이었던 걸 감안하며,

대충 어림잡아도
500만 명 이상이 거주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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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세계 인구가
약 2800만 명이던 시절이니." ☞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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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0년 전, 세계 인구의 20%가 
인더스 주변에 살고 있었던 것임."

또 도시의 발전 수준도
당대 최고를 자랑하여,

바둑판 모양의 포장도로,
폭이 10m나 되는 넓은 대로,


5층 높이의 고층건물,
광장,


공중목욕탕,
 


댐과 저수지,
강물과 빗물을 분리하여 저장할 수 있는 인공 수로,
 

▲ 도시 주변의 인공 저수지

아파트, 수세식 화장실, 

▲ 모헨조다로의 아파트 내부 구조

개인 우물,

▲ 개인 우물

도시 곳곳에서 완벽히 조성된
상하수도 시설까지

▲ 하수로

고대 도시라고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을만큼
발전된 시스템을 구축하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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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해 4500년 전의 로마 문명."

특히 이곳에서는, 구운 벽돌을 사용해서
건축물을 지었는데,

이는 진흙을 말려
벽돌로 사용했던

메소포타미아, 이집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기술이었다.

▲ 모헨조다로의 벽돌 건축물 (4500년 전)

또 상공업이 발달하여
도시마다 전문적인 기술자들이 있었는데,


청동기·무기를 만드는 대장장이,
옷감을 만드는 직조공과 염색공,

토기를 만드는 도공,
장신구를 만드는 보석공들이 존재했고
 

비단, 무명, 양모 등
다양한 직물류가 만들어 졌다.

▲ 인더스에서 출토된 4500년 전의 놀이기구 


● 메소포타미아와의 교역

인더스 문명은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하자

바깥 세계와도
교역이 활발해져


상인들은 배에 짐을 가득 싣고서
아라비아 문명과 교역을 하곤 했는데,

이를 증명해주는 유물이
바로 인더스 인장(도장)이다.


인장은 가로·세로 3cm 정도의
작은 돌들에

인도 토종의 '제부소',
보리수, 여신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인더스 문자가
함께 새겨져 있는데,

▲ 여러가지 인더스 인장

이런 인장을
점토판에 찍어,


인더스 상인들은
상거래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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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종이가 없었던 시절이라,
점토판에다 글을 썼음."

그런데 이런 인장이
바다 건너 2천 km 떨어진

아라비아 반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발굴이 된 것이다.

▲ 당시의 교역로 : 두 문명의 사이즈가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또 메소포타미아 유적지에서
발굴된 점토판에서도

인더스에서 온 역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 메소포타미아 왕을 만나고 있는, 인더스의 역관 두명 (우측 두명)

즉 당시 인더스 문명은
메소포타미아와도 직거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인더스는 주로
목재와 장신구를 수출했고

▲ 청동 거울, 머리 핀, 귀걸이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목재 공예품을 수입했었다.

 메소포타미아인
"오! 이것이 홍옥으로 만든
인더스의 목걸이!"


▲ 메소포타미아로 수출하던 인더스의 목걸이

그리고 외부 문명과의 
활발한 교류 덕분에

문명을 더욱
풍성하게 가꾸며

▲ 하라파에서 발굴된 45m 크기의 거대한 곡물(?) 창고 ☞ 참고

오늘날 '인도 문명'의 출발점인
인더스 문명을 완성하게 된다.

▲ 인더스 상인

참고로 당시 동아시아에는
아직 문명이 시작되지 않았을 때였고,

약 1000년이 지난 BC 1600년이 되어서야
황하 문명이 도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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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는 왜 그렇게
문명이 늦게 태동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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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서
문명의 전파가 어려웠기 때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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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역사·인문학적으로 인도문명은
서양 문명으로 취급하는 시각이 많다능."



아리아인의 침입

● 아리아인의 침입 (BC 1500)

하지만 BC 1800년경
'인더스'라는 이름은

메소포타미아 점토판에서
사라져버렸다.

 메소포타미아인
"인더스? 그런 동네도 있었나?"

소빙기가 닥쳐
지구의 기후가 차가워졌기 때문이다.


기온이 차가워지면
극지방의 빙하가 커지고


해수면이 낮아져
바닷물이 줄어들고,

증발량도 줄어들어 (비구름 형성이 줄어들어)
지구가 급격히 가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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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기온은 보통 500~700년마다
추워졌다 따뜻해졌다를 반복함."

그리고 이럴 때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지역은

(半)건조 지대의 
농경지라서

인더스 유역에서는 강이 말라버려
땅이 황폐화되기 시작했고


강가 주변의 인근 도시들간에는
연결고리가 점점 끊어지는 현상이 나타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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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놔, 우기가 돼야
겨우 강줄기가 만들어지니.."

때문에 도시들은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고

살아남은 도시들은
여전히 인더스 강의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지만, ☞ 

▲ 4만여 명이 거주했던 모헨조다로

이조차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바로 북방의
유목민족 때문이었다.


사실 소빙기가 되면
반건조 지역의 농경지대 못지 않게

초원에서 가축을 기르던 유목민족도
극심한 피해를 입게 되는데,

목초지가 줄어들고
가축이 떼죽음을 당하면


유목민족은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결국엔 농경민족을 약탈하러
쳐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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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쳐들어온 흉노족, 선비족
유럽을 쳐들어온 훈족, 마자르족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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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소빙기 시절에, 배가 고파
눈이 뒤집혀져 쳐들어왔던 유목민들임."

3500년 전의 상황도 비슷했다.
마침 황하문명이 시작되었을 무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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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아! 큰일 났슴돠!"


"무슨 일인데 호들갑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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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에서 적들이
물밀 듯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뭐? 도대체 어떤 놈들이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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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피부는 하얗고 코도 크고, 몸집도 아주 큽니다."


"뭐? 그런 넘들도 있었나?
어쨌든 두려워말고 당당히 맞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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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좀 힘듭니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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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들은 무기가 단단해서
부딪치면 우리 것은 두 동강이가 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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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적들은 말에다 수레를 매달고
이동하는 터라, 엄청나게 빠릅니다."


"뭐야?"



인더스 도시들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있었던 이들은,

'카프카스 산맥' 일대에 살고 있던
'아리아인'이라는 유목 민족이었다.



이들은 초원이 메마르고
황량해지자,

사방팔방으로
땅을 옮겨다니기 시작했는데,

이때 이란 고원으로 들어온 한 무리가
인도 땅까지 쳐들어온 것이다.


처음 수백 년 동안 아리아인들은
인더스 사람들과 도움을 주고받기도 했으나,

결국 인더스 사람들은
터전을 모두 아리아인들에게 빼앗기고,

남아서 이들의 노예가 되거나
혹은 남쪽으로 도망가게 된다.

▲ 인더스 선주민인 '드라비다인'은 현재 인도 남부에 대부분 거주하고 있다
> 더 보기

그런데 아리아인들은
기본적으로 유목민이다.

그래서 목초지와 가축을 지키기 위해
부족장의 역할이 컸고

부족장은 대부분은
힘이 센 사람, 즉 전사가 맡았다.


다만 정규군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비상시에 부족민들이 모두 나와 전쟁에 임했고

이들 중 힘이 세고 싸움을 잘하면
무사로 간주했던 것이다.
 

그런 아리아인들이 처음 인도에 들어왔을 때
계급은 무사, 사제, 평민만 있었다.

아니, 계급이라기보다는
직업의 의미가 강했다.

이들은 서로
결혼할 수도 있었고

평민이라고 해도 능력만 있으면
무사나 사제가 될 수 있었다.

▲ 아리아인의 침입

하지만 지배층이 된 아리아인들이
인더스 주민들을 상대로 '삥'을 뜯으려면

주민들이 땅을 버리고
도망가지 않도록,

혹은 직업을 바꾸지 못하도록
철저히 단속을 해야 했기 때문에



▲ 이러한 피라미드형 계급 사회는 농경 사회의 특징이다

이때부터 차츰
계급 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직업의 세습과 폐쇄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아리아인들은
브라만(제사장), 크샤트리아(군인), 바이샤(평민) 

인더스 선주민들은
수드라(노예)로 차츰 나뉘게 되는 것이다.



● 인도판 춘추전국시대 (BC 1000)

인도에 들어온 아리아인은
처음엔 유목 생활을 이어갔으나

동쪽으로 근거지를 넓히는 과정에서
토착 인도인에게 농사를 배웠다.


"많은 인구를 부양하려면
가축 가지고는 도저히 안 되겠다능."

그리고 기원전 1000년경
갠지스 강에 터전을 잡고, 정착 생활을 시작했다.



"여기가 서쪽보다
비도 많이 오고.."


"농사짓기에는
더 괜찮을 수도 있겠네."

이 시기 아리아인들은
철을 다룰 줄 알았기 때문에,

철을 이용해 농기구를 만들어
농사를 지었던 탓에

▲ 고대 인도의 쟁기

인더스 강변의 퇴적지보다
비옥하지 못하한 땅이라도

철제 농기구를 통한
'깊이갈이'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었다.


"쇠로 된 농기구로
땅을 깊게 파서 흙을 갈아주면.."


"지력이 소모된 땅에도
농사를 지을 수가 있다능."

그렇게 생활 영역이 넓어지자
갠지스 강을 따라

도시국가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고,

▲ 갠지스 지역에 정착한 3천년 전 아리아인들

원래 전쟁을 좋아하는
유목민의 후손답게

이들 도시국가들은
서로 먹고 먹히는 이합집산을 반복하며

BC 600년 경에는, 대략 16개의
도시국가가 이름을 날리게 된다.

▲ 지도는 BC 500년 경으로 마가다국이 강성해질 무렵이다

묘하게도 당시는
중국에서도 춘추전국시대였다.


도시국가들은 서로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는데,


그 과정에서 전쟁을 지휘하는
국왕의 힘이 자연스레 강화되기 시작했고

국가를 더욱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왕들은 '관료제'를 도입하고
'상비군'을 조직했으며


관리들로 하여금
농민들에게 세금을 거두게 하고,

왕은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국가적 의식을 자주 치렀다.


한편 당시에는 상업과 수공업도 발달하여
구리나 은으로 만든 주화가 널리 유통되었는데

이때 장인들은 가업을 물려받고,
조합을 만들어 이익을 도모했는가 하면


상인들은 수레와 배를 이용해
곳곳을 누비며

옷감, 상아 제품, 항아리
등의 상품을 팔았다.


또 도시 주변에는
농민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면서

저수지와
수로시설을 만들었고

모내기법(이앙법)
우경법의 활성화로


1년에 두 번씩
수확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인도에서는
'모내기법'과 '우경법'이

이미 3000년 전부터
'보편적'으로 행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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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법으로 따지자면 중국보다 2천 년,
우리나라보다 2500년 이상 앞섰던 것임."


● 브라만들의 꼼수 : 브라만교의 탄생

전쟁이 일상화되자
국왕의 권위가 높아졌고,

전쟁의 승리를 위해
제사를 자주 지내게 됐는데,


"신이셔! 이번에 꼭 우리 군대가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이런 제사의 규모는 갈수록 커져서
양, 소, 말 등의 희생물을 바치게 되었고

그러면서 제사장의 권위 또한
강화되게 된다.


 브라만 (제사장)
"이번에 제가 주문을 잘 외워서
이번 전쟁은 꼭.."

 브라만 
"우리가 승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신들에게 신신당부를 하겠슴돠."

당시 국왕은 이런 브라만의 꼬드김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국왕
"어쩔 수 없다능."

 국왕
"얘네들만이
신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데, 뭐.."

우리나라로 치면,
무당의 역할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브라만들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으니,

 브라만
"우리는 단순한 무당이 아니라능."

 브라만
"우리는 신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도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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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정말이야?"

 브라만
"당근이지!"

 브라만
"뭐 이쯤 되면, 우리의 능력도
거의 신과 동등하다고 봐야 하지 않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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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대단하심."

이렇게 해서
'브라만교'가 성립되게 되고

덕분에 브라만들은
제사를 독점 주관하면서

자신들의 권력과 재력을
더욱 쌓을 수가 있었다.

 브라만 
"하하하"

하지만 그런 논리에
브라만도 양심은 찔렸는지,

'업보'와 '윤회사상'을
들고 나오게 된다.

 브라만
"우리가 괜히
브라만으로 태어난 줄 알아?"

 브라만
"전생에 착하게 살아서
브라만으로 태어난 거 아니겠어."

 브라만
"너희들도 불평 말고, 다음 생을 위해
현실에 순응하면서 착하게 살라능."

 브라만
"그러면 다음엔 너희도
브라만으로 태어날 수 있어."

 브라만
"욕심 내고 투정 부리면,
다음 생애에 수드라(노예)로 태어날 수 있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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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아!"

그렇게 '윤회'의 개념이
등장하게 되었으니,


현실의 신분 차별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게 하여,

사람들의
불평과 불만을 잠재우고


각자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이행한다면,

내세에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함으로써


카스트제도를 강화하는 데
획기적으로 기여하게 되고

또 브라만들의 권한을
정당화하는데도 커다란 도움을 주게 된다.

 브라만
"하하하! 천재적인 발상."


● 브라만교에 대한 반발 : 불교의 탄생 (BC 500)

하지만 이런 브라만들의 논리에 
불만이 없을 리 없었다.

특히 정치 권력을 행사하던
크샤트리아와

상공업으로 큰 돈을 번
바이샤의 불만이 컸다.

 크샤트리아 (귀족)
"왜 자기들만 특출나다는 거임?"

 바이샤 (평민)
"쳇! 아니꼬워서.."

그러다가
기원전 7세기경,

일부 브라만들 사이에서
개혁의 움직임이 일어났으니,

대표적인 게
'우파니샤드' 학파였다.


 우파니샤드 학파
"요즘 브라만들 너무
사리사욕만 탐하는 것 같아."

 우파니샤드 학파
"그러게. 아무리 전생의 업보로
브라만이 되었다지만.."

 우파니샤드 학파
"브라만만 되면,
타락해도 되는 건지"

 우파니샤드 학파
"이러다 신이 노하실 거라능."

그리하여 결국 이들은, 권위주의적인
브라만교의 교리를 거부하고 나서게 되는데,

 우파니샤드 학파
"백성들이 가뭄으로
굶어 죽어가는 판에.."

 우파니샤드 학파
"상다리 부러질 정도로
제사상을 차릴 필요가 있는가?"

 우파니샤드 학파
"브라만의 말만 진리이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런 능력도 없단 말인가?"

 우파니샤드 학파
"아냐, 그렇지가 않다고!
모든 이의 마음 속에 진리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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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요?"

 우파니샤드 학파
"당연하지. 누구든 명상과 사색을 하면
해탈에 이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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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그럼, 브라만의 도움 없이도
구원이 가능하단 말인가요?"

이런 우파니샤드 학파의 주장은
곧 대중들을 강타했고, 

 크샤트리아 (귀족)
"브라만의 횡포와 타락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바이샤 (평민)
"맞아 카스트 제도를 철폐하고
계급 차별도 없애야 됨!"

그런 민심을 타고
급격히 부상했던

신흥 종교가 있었으니,
바로 불교였다.


불교는 네팔 근처, 작은 나라의 왕자였던
고타마 싯다르타가 창시한 종교인데,

성 안에서 풍요롭게 살던 그는
성 밖에 나갔다가

질병과 굶주림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싯다르타
"뜨아!"

세상이란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싯다르타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고로 인생은 고통이구나.."

 싯다르타
"어떻게 하면 이런 고통을
모두 물리칠 수가 있을까?"

그렇게 그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식음도 전폐하고 고민하다가,

피골이 상접해질 즈음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고 한다.


 싯다르타
"그래, 깨달았어!"

이후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난 그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신이 깨달은 바를
열심히 사람들에게 전했다.

 싯다르타
"삶은 고통인데,
이는 욕심에서 비롯된다능."

 싯다르타
"욕심을 버려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열반과 해탈에 도달할 수 있음."

 싯다르타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모든 생명은 소중한 것이니,"

 싯다르타
"자비로서 대해야 하며,
절대 살생은 하지 말 것이며.."

 싯다르타
"이를 실천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능."



인도 제국의 통일

● 마가다 제국 (BC 500)

기원전 6세기 이후 인도 아대륙은
한마디로 전쟁의 연속이었다.

크고 작은 나라들의
운명을 건 싸움이 계속된 것이다.


또 그런 혼란한 상황을
통제하고 수습하는 사상으로,

종교와 철학이
발전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히말라야 산맥 넘어
저 멀리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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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선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지고
제자백가 사상이 흥하고 있었지."

그런데 이런 혼란한 과정 속에서, 
점차 북인도는

'마가다 제국'에 의해
통일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갠지스 강변에 자리해
농업과 상업으로 성장했던 마가다국은


국가가 정책적으로 불교를 보호해
대중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고

인근에 풍부한 철광석을 바탕으로
강력한 철제 무기로 무장하고 있어서

공격적인 정복사업으로
빠르게 영역을 넓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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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마가다 군대는 투석기와
쇠몽둥이를 단 전차같은 신무기와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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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 20만 명, 보병 6만 명, 전투코끼리 6천마리
등의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음."



그리고 기원전 500년 경
갠지스강 유역 일대를 포괄하는

거대한 땅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최초의 북인도 통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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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년 전 인도의 인구는
세계 인구의 40%를 차지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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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다 제국은
인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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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구의 20%를 다스렸던
거대 제국이었던 것임."

오늘날에도 마다가 왕국의 영역은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곳으로 유명한데,

한반도 5배 크기의 땅에
무려 7억 명 이상이 거주하고 있다.



● 알렉산더의 침입 (BC 326)

갠지스 유역이 '마가다 제국'에 의해
하나로 통일되었을 무렵,

인더스 유역은
통일된 거대 왕국이 없는 대신에

고만고만한 작은 나라들끼리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는데,


BC 516년,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페르시아가 쳐들어오더니
막대한 삥을 뜯고 돌아갔다.

▲ 천혜의 방벽, 힌두쿠시 산맥 

 다리우스 1세
"하하하."

그리고 BC 326년 경,
이번에는 소문을 듣고

페르시아를 물리친
마케도니아(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의 12만 대군이
쳐들어 오게 되는데,


이때 인더스의 소국들은
서로 힘을 합해 물리칠 생각을 않고

혼자서만 맞상대를 하다가
하나둘씩 줄줄이 무너지고 말았고


그렇게 점령당한 나라들은
알렉산더 군대에게

식량과 물자를 열심히 대줘야 하는
처참한 처지에 놓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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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놔.."

그리고 알렉산더 군대는
동쪽으로 더욱 나아가며

여러 나라를 건드려봤지만
더 이상의 성과가 없었다.


병사들은 혹독한 더위로
지친 데다가

식량 부족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또 엄청난 군사력을 자랑하는
마가다 제국(난다 왕조)의 

존재를 접하게 된 것도
그 원인 중 하나였다.


"폐하, 이쯤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말입니다."


"강 건너 동쪽에서는 엄청난
군사력을 지닌 국가가 있다고 하옵니다."

 알렉산더 (알렉산드로스)
"아놔,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자니.."

 알렉산더
"이것들이 빠져가지고."

 알렉산더
"내 생각에는 '인두'는
코딱지만한 땅에 불과해."

 알렉산더
"지금 정복 안 하면
또 언제 정복할 건데."
> 더 보기

하지만 결국 알렉산더는
병사들의 불만에 못 이겨 발길을 돌리고 만다.

 알렉산더
"아놔, 빠져가지고.."

만약 이때 알렉산더 군대와
마가다 제국이 실제로 붙었더라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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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패의 신화가 깨지려나?
아니면 인도 전체가 알렉산더 제국이 되려나?"

한편 알렉산더 군대는 돌아가는 길에
인더스 강 유역에

일부 병사들이 거주하며
살도록 하였으니,


그리하여 그곳에(현재 아프가니스탄 지역)
생뚱맞게 그리스계 국가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 마우리아 (BC 300)

BC 321년 뜬금없이
마가다 제국이 망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33살의 나이로 죽은 뒤
2년 뒤의 일이었다.


백성들에게 지나치게
세금을 부과한 것이 화근이 되어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라는 관리가
반란군을 조직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가다 제국은,
'마우리아 제국'으로 명패를 바꿔달게 된다.

그리고 찬드라굽타는
내친김에 '인더스 유역'까지 차지했으니,


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동쪽으로는 벵골만에 이르는

좌우 3천 km의 광활한
북부 인도 전역을 장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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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부산 거리의 10배!"

하지만 땅이
너무 넓었기 때문에

왕자들을 지방에 보내
그 지역을 책임지도록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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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봉건제도."

이를 위해 상비군 60만 명 정도의
거대한 군인들을 필요로 했다.

 찬드라굽타
"음, 군대를 유지하려면
돈이 꽤 많이 필요하겠군."



때문에 농민, 상인, 장인 모두에게
대대적으로 세금을 징수했고,


▲ 마우리아 제국의 은화

대신 상공업자들을 위해서는
전국 곳곳을 연결하는 '도로'를 닦아주고

농민들을 위해서는
'경작지'를 넓히고 '저수지'를 만들어줬다.

 찬드라굽타
"세금만 무대뽀로 거두면 쓰나.."

 찬드라굽타
"백성들의 소득을 높여주면서
세금을 거둬야지."

여기에 광산을 개발하고 술을 전매하여
국가 재정에 보태도록 했다.

때문에 찬드라굽타는
정복 사업을 하면서도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할 수 있었고,

▲ 당시 은화

덕분에
그의 아들과 손자는

마음 놓고 정복 사업에
매진할 수 있게되어

찬드라굽타의 손자, 아소카 왕은
60만의 보병과 3만의 기병,


9천 마리의
코끼리 부대를 앞세우고

인도 구석구석을
쓸어 담을 수 있어서

결국 인도 끝자락의 일부를 제외한
전역을 통일하게 된다.


 아소카 대왕 (찬드라굽타의 손자)
"드디어! 인도 대륙을
통일했다!"

이때가 BC 261년,
하필 중국에서도

진시황이 최초의 통일왕조
'진나라'를 세웠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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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이 500만㎢로
오늘날 인도보다 1.5배 이상 더 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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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는 6천만 명으로
당시 진나라보다 3배 정도 더 많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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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인구의 40%,
전 세계 GDP의 40%를 차지했었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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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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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당시 고조선의 인구가
10만 명도 안 됐다는 얘기가 있음." ☞ 참고

하지만 아소카왕의
정복 사업은 잔인했다.

 아소카 대왕
"저항하는 자들은
한 놈도 살려 두지 말라!"



이런 명령 때문에
병사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피가 강물이 되었던 것이다.


● 인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아소카 왕

아소카 왕은 인도를 통일하여
넓은 제국을 건설했지만

전쟁의 피비린내 나는 참상은
그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아소카 대왕
"아! 이런 것이 승리인가?
이것이 과연 정의인가?"

 아소카 대왕
"아이와 부녀자들을 죽여서
제국을 넓히는 일이 과연 잘 한 일인가?"

 아소카 대왕
"남편을 잃은 여인, 부모를 잃은 아이,
이것이 승리의 징표란 말인가?"

그럴수록 그는 불교의 가르침에
더욱 빠져들게 된다.


 아소카 대왕
"아놔, 살생을 하지 말라 했거늘."

결국 그는 전쟁에서의 살육을 후회하고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그러고는 불교의 법과 도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자 했으니,

 아소카 대왕
"생명은 소중하다. 앞으로 법을 집행할 때에는
모든 이에게 일관성 있게 집행하고,"

 아소카 대왕
"사형은 함부로 집행돼서는 안되고
신중에 신중을 꾀하라능."

 아소카 대왕
"또 길가에 반얀나무를 심고
우물을 파서 쉼터를 짓고.."



 아소카 대왕
"도로를 건설하고
의료시설도 확충할테니.."



 아소카 대왕
"이런 시설을 이용하는 데 있어
절대 신분차별을 두지 말라!"

실로 놀라운 정책이었다.
아소카 왕은 무려 2200년 전에

'보편적 법치'와 '보편적 이익'을 위한
정치를 행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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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에서도 20세기 들어서야
겨우 가능했던 일인데.."

또 곳곳에 절과 탑을 세워
불교를 널리 퍼트리는가 하면,


불교의 해외 전파를 위해
사절단을 꾸려

스리랑카, 중동은 물론
유럽에까지 보냈었다.




쿠샨 제국과 굽타 제국

● 이민족 왕조, 쿠샨 제국 (AD 1세기)

아소카 왕은 법과 도덕으로
제국을 하나로 묶고자 했으나,

그러기에는 영토가 너무 넓고
각 지역의 상황들이 너무 달랐다.

때문에 아소카왕은
각 군(郡)에 관리를 파견하는 식으로


각 지방을
관리하고자 했으나,

태수와 현령들은 점차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아소카왕 사후,
제국은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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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카왕은 훌륭한 왕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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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집권적인 통제를
효과적으로 시행하지는 못 했던 것."

결국 인도는 다시
여러 작은 나라들도 사분오열했고


그동안 불교 때문에
자신들의 권익을 억눌림 받고 있었던

브라만들은 반감을 가지고
BC 185년도에 마우리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만다.

 브라만
"앞으로 제사 의식 부활,
브라만의 특권 인정!"

하지만 그런 틈을 타서
헬레니즘(그리스) 세력이

인더스로 쳐들어오자
북부의 지배권은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그리스인들은
박트리아 왕국을 세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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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읭? 박테리아?"

다만 이때 박트리아 왕국은
인도인들과 교류를 하며

동전, 유리 제조술, 조각 미술 등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였기 때문에


인도의 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박트리아는
BC 125년 경,

페르시아 계통의 쿠샨에게 멸망하고 마는데,
이때 사연이 참 얄궂다.

▲ 쿠샨 제국

원래 쿠샨(월지)족은
중국의 감숙성에서 살았는데,


흉노족의 침입으로 땅을 잃고,
중앙아시아(우즈벡)로 이주를 하게 되고, ☞ 참고 (검색어 : 월지)

나중에 그곳까지 흉노족이 쳐들어어자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박트리아를 쳐서
아예 땅을 점령해버린 것이었다.

▲ 월지는 수세기에 걸쳐 중앙아시아를 전전하다가 최종적으로 인도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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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읭? 피난민 주제에
엉뚱한 나라를 빼앗아 먹다니.."



또, 그러다 내친김에
인더스 지방까지 차지했던 것이고,

세력을 확장해서
인도 북서부 일대까지 접수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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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성공한 피난민들이네."

이런 쿠샨 제국은 2세기 중엽,
카니슈카 왕때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 카니슈카의 금화

인도와 로마를 잇는
바닷길과

중국과 서역을 잇는
비단길을 장악하여

중계무역으로
짭짤한 이익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카니슈카 대왕
"하하하. 교통의 요충지를
우리가 떡하니 장악했구먼."

다만 당시 쿠샨 제국은
로마 제국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중국의 한나라와는
비단길을 놓고 다툼이 잦았다.

 카니슈카 대왕
"쳇! 서역은 원래 우리 땅인데
중국 놈들이 차지해버려서.."


▲ 실크로드를 차지한 한나라

한편 카니슈카 왕은
이민족 출신이었지만

인도의 여러 종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했기 때문에

토착 인도인들에게
크게 인정받게 된다.


"외국인이면 어때?
인도 출신 황제보다 훨씬 잘 하는데.."

특히 그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
불교 진흥에 힘써

▲ 불상 앞에 카니슈카 왕

곳곳에 사원과 탑을 세우고
불교 경전 정리 사업을 벌이게 되는데,

이런 과정에서 개인의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기존의 불교(소승불교)에서 벗어나

'대중의 구제'를 강조하는
대승불교가 탄생하게 되게 된다.

 카니슈카 대왕
"나만 깨우치면 뭘 해.
그건 이기적인 발상."

 카니슈카 대왕
"모두를 깨우치도록 해야지."

이때부터 사람들의 신앙생활에도
변화가 찾아왔는데,

깨달은 자를
뜻하던 '부처'가

인간을 구원하는 힘을 가진
'신'으로 숭배되기 시작한 것이다.

▲ 쿠샨 제국의 불상

그리하여 이때부터
불상도 만들어지게 되는데,

이때 불상은 간다라 지역의
그리스인들의 조각상에 영향을 받게 되는 특징이 있다.

▲ 간다라 불상
> 더 보기


● 굽타 제국, 북부를 재통일하다 (AD 4세기)

3세기 중반, 페르시아가
거대한 제국을 세우며

인더스 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대하자,

▲ 페르시아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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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놔, 이넘들은
허구한날 인더스 땅을 넘보네."

쿠샨 제국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북인도는 또다시
수많은 나라로 갈라지게 된다.

이때 갠지스 강 일대에서
굽타 가문이 세력을 확산하면서
 
▲ 굽타 제국의 병사들

4세기 초반 인도 북부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고

남쪽으로도 세력을 확장하여
데칸 고원 중부까지 진출하게 되는데,


특히 대외무역이 활발한
항구도시들을 획득함으로서,

굽타 제국은 경제적으로
커다란 도움을 얻게 된다.

▲ 굽타 제국의 금화


"하하하."

이후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넉넉해지자

문학과 예술, 과학과 수학 등에서
눈부신 성과가 나타나게 되는데,

특히 '아잔타 석굴'의 불상과 벽화는
7~8세기 당나라, 신라, 일본의 승려들이
 

천축국(인도)에서 유학할 때마다
저마다 크게 감명을 받았던 것으로,


이후에 중국, 우리나라, 일본에까지
그 양식이 전해져

동아시아 불교 미술에
큰 영향을 주게 된 작품이었다.

▲ 아잔타 석굴의 영향을 받은, 둔황석굴과 석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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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의 모습을 했던
간다라 불상과는 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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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잔타 불상은
인도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게 특징임."

당시 자연과학도 세계 수준이었는데,
원주율 3.146을 계산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구의 둘레를
정확하게 측정하는가 하면,


지구의 자전을 밝혀내고,
태양과 달을 비롯한

행성의 운행을 기술했을 뿐만 아니라
지동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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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보다
1100년 더 빨랐음."

수학의 발달도 눈부셨는데
가장 큰 성과로는,

무한대(∞)와 영(0)의 개념을
인류 최초로 발견한 것을 들 수 있다.


또, 우리는 흔히
아라비아 숫자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그 기원은
당시 인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 오늘날 아라비아 숫자는, BC 3세기 브라미 문자, 11세기 힌두 문자가 그 기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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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그랬어?"


● 힌두교, 인도의 대중 종교가 되다

이 무렵 대중들에게 멀어졌던
브라만교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브라만
"아놔, 요즘 계속
불교에 밀리고 있다능."

 브라만
"이러다 우리 입지도
평민으로 나앉게 생겼어."

 브라만
"불교의 인기를 한방에 뒤집을 수 있는
획기적인 묘안이 없을꼬?"

브라만들은 궁리에 궁리를 했고,
결국 얻어낸 결과는 이랬다.

 브라만
"까짓 것, 권위적이고 형식적인 거
다 버리자능."

 브라만
"그것만으로 불교의 인기를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해?"

 브라만
"대신 우리는 모든 종교의 교리와
잡신들까지도 다 포함시키는 거야."

 브라만
"불교의 교리도
당연히 다 포함시키는 거야."

 브라만
"읭?"

 브라만
"그러면서 이거 하나만 믿으면
만병통치 종교라고 선전하는 거임."

그랬다. 브라만들은
'윤회사상'과 '업보'를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또 한 번 천부적인
수를 생각해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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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놔, 이런 잔대가리들."

그렇다면 이런 짬뽕 종교가
과연 효과가 있었는가?

당연히 효과가 있었다. 아주 인기가 좋았다.
이름하여 힌두교였다.

 브라만
"자, 힌두교를 믿어보시라능.
모든 신들이 다 있어. 3억 명의 신들이 있다능."
> 더 보기

 브라만
"기독교, 불교, 조로아스터교, 브라만교
모두 이거 하나만 믿으면 됨."

 브라만
"혹시 알어? 기독교만 열심히 믿었는데
천국에 가보니깐 하나님은 없고 부처님만 있을지.."

 브라만
"그런 위험요소를 한방에 날릴 수 있는
생명보험과도 같은 종교! 그 이름 힌두교!"

 브라만
"제사도 간단함.
이제 소 잡고 닭 잡고 할 필요가 없다능."

 브라만 
"명상만으로 해탈할 수 있냐고? 당연하지.
목탁 두드리면서 찬송가 불러도 된다능."

그야말로 종교계의 잡탕,
종교계의 합기도였다.

그렇게 힌두교는
불교의 아성을 물리치고

빠르게 인도를 대표하는
종교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 신이 많다는 게 힌두교의 특징

여기에 브라만들은
한가지 잔꾀를 더 냈으니,

황제를 '비슈누'의 화신이라며
갖은 아부를 다 떨었던 것이다.

때문에 황제들이 좋아서
입이 찢어졌던 것은 당연지사.

 황제
"하하하. 요즘 브라만들
좋은 일 참 많이 하네."

그리하여 황제는 브라만들에게
많은 땅을 주면서 적극 지원하기 시작했고

대신 황제는 브라만을 통해서
신성한 황권을 얻게 되었다.


그렇게 굽타 제국 시기부터
불교가 서서히 몰락하며

힌두교가 그 자리를
꿰차게 되었고,

그러면서 브라만의 권위가
다시 크게 강해지고


카스트 제도가 더욱 뿌리 깊게
정착하게 된다.

 브라만 
"현실이 시궁창이어도, 내세를 위해서
현실에 순응하면서 살라능."

재밌는 건, 당시 동아시아(한중일)에서는
불교가 정책적으로 수용되어


국가 통치 수단으로 활용되며
대중들에게 크게 포교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moon_special-26
"그런데 정작 불교의 본고장에서는
불교가 시들해지고 있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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